왜 흑인들은 '흑형'이라는 단어를 불편해할까?
모든 사물은 전체 속에서 하나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원치 않았던 우리에게 모든 사물은 악이다.
- 피에르 클라스트르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작년쯤 유튜브에서 꽤 화제가 된 영상이 하나 있다.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흑인들이 자신들을 '흑형(흑누나)'라고 지칭하지 말아 달라는 영상이었다. 하지만 그 영상을 본 많은 한국인들은 '흑형'은 흑인들의 뛰어난 능력을 칭송하는 의미로 만든 단어인데 왜 그걸 불쾌해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댓글을 달았다. 실제로 '흑형'이라는 단어는 한국 사회에서 흑인에 대한 이질감을 줄이는데 기여를 한 측면도 있다. 90년대에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흑인의 이미지는 '피부가 까만 사람(깜둥이)"으로 매우 1차원적인 수준이었다면, 최근에 들어서는 힙합과 같은 흑인 문화와 흑인들의 재능을 보여주는 미디어의 영향으로 한국에서도 '흑인은 멋있다'는 이미지가 새롭게 생겼다. 이러한 흑인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상징하는 단어가 '흑형'이다. 그렇다면 흑인들은 왜 '흑형'이란 단어를 불편하게 생각할까?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그들은 입을 모아 이야기하고 있다. 노래 잘하고 운동 잘하고 (남)성기가 큰 흑인도 있겠지만, 모든 흑인이 그런 것은 아니라고. 물론 한국에 사는 흑인들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 테다. 최근 미국에 사는 아시아인들은 미디어에서 그들을 '모범생' 또는 '성실한 이민자'로만 묘사하는 것을 문제 삼은 적이 있다. 그들은 그런 고정관념을 깨고자 아시아인 주연으로 돈 많고 쿨한 상류 사회 아시아인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Crazy Rich Asians>를 제작해 반향을 일으켰다. 게이들 또한 사회의 고정관념과는 달리, 여성스러운 행동을 하는 게이는 일부분이며 일반 남성과 언행이 크게 구별되지 않은 게이가 더 많다고 주장한다. 최근 한국에서도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표현을 하면 거센 반발을 맞는다. 그들은 다 같이 이렇게 소리치고 있는 것 같다. "흑인, 아시아인, 게이, 여자가 아니라 '나'를 봐줘!"
'흑인은 운동을 잘한다', '아시아인은 공부를 잘한다', '게이는 여성스럽다'와 같은 관념을 선입견이라고 부른다. 영상에서 한 인터뷰이가 이태원에서 흑인 남성 몇몇이 거칠게 난동을 부리는 모습을 담은 영상을 보면서, 흑인인 자신은 "저 남자들 미쳤네(Those guys are crazy)!"라고 생각했는데 한국 사람들은 "흑인들 미쳤네(Black people are crazy)!"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했다. 몇몇 흑인의 행동을 보고 모든 흑인들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선입견이다. 이 정의에 따르면 '흑형'도 긍정적인 표현일 뿐 당연히 선입견이다. 비욘세나 알리샤 키스처럼 몇몇 흑인들이 노래를 잘하는 것을 보고 '흑인들은 노래를 잘한다'라고, 우사인 볼트나 무하마드 알리처럼 몇몇 흑인들이 운동을 잘하는 것을 보고 '흑인들은 운동을 잘한다'라고 일반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이나 남성에 대한 선입견도 비슷한 맥락으로 구축된다. 강아지를 좋아하는 여성을 자주 봤다고 해서 '여성들은 강아지를 좋아해', 야구 경기를 즐겨보는 남성이 많다고 해서 '남성들은 야구를 좋아해'라고 하는 건 지나친 비약이다. 이처럼 부분을 보고 전체를 규정하는 것이 선입견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선입견이 부분을 보고 전체를 규정하는 것이라면, 그 전체는 어떤 기준으로 정의하는 것일까? 예를 들어 이태원에서 난동을 부린 사람들은 '흑인'이라는 특징 외에 여러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일단 남성이고 청년이다. 영상만 보고는 알 수는 없지만, 그들은 운동선수들일 수도 있고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원어민 선생님일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이 '남성'이고 '청년'이라고 해서, '남성들은 다 미쳤어' '청년들은 다 미쳤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만일 그들이 운동선수나 영어 선생님이라는 사실이 알려진다 해도, '운동선수는 다 미쳤어', '영어 선생님들은 다 미쳤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들이 속한 많은 전체 중에 유독 '흑인'이라는 전체만 보고, '흑인들은 미쳤어'라는 선입견을 만들어낸다. 그건 어떤 이유에서 일까?
꼭 흑인들이 아니더라도 이태원 한복판에서 주먹질을 하며 난동을 부리는 무리가 있으면 누구나 불편하고 두려운 감정을 느낄 것이다. 그 영상에 달린 댓글을 보면 유독 한국 경찰이 소동을 제대로 제압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분개하는 내용이 많다. 이런 댓글들은 내 주변에서도 이런 격렬한 쌈박질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사람들의 막연한 공포심을 보여 준다. 그렇게 공포심을 느끼는 와중에, 그들이 우리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질적인 특징이 눈에 들어오면 그 모든 원인을 이질성으로 돌리고 싶어 진다. 왜? 그렇게 생각하면 한 방에 공포심에서 해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흑인'을 나와 다른 존재, 예측 불가능한 존재, 그러므로 '네 편'이라고 구분 지어버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자연스럽게 ‘그들이 폭력적인 건 흑인이기 때문이므로, 흑인들만 없애면 다시 안전을 되찾을 수 있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 영상에 '한국에서 난리 치지 말고 니네 나라로 꺼져라'라는 댓글이 가장 많은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닐 게다.
반면 같은 영상을 보고 '남성들은 다 폭력적이야', '청년들은 다 폭력적이야'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왜냐하면 남성과 청년은 본인들의 특질, 즉 자기가 속한 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영상을 보고 남성은 다 폭력적이라고 일반화한다면 (남성의 경우) '나'도 폭력적인 사람이 된다. 또 '운동선수는 다 폭력적이야' '영어 선생님은 다 폭력적이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별로 없을 테다. 왜냐하면 운동선수나 영어 선생님은 우리에게 꽤 익숙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네 편'을 구분 지을 때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상대방의 가장 이질적인 특징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저들이 예측 불가능한 행동을 하는 이유를 모두 '이질성'이라는 하나의 원인으로 탓하기 쉬워지니까. 우리가 이태원 난동 영상을 보면서 굳이 '흑인'이라는 특징에만 집중하는 건 그 때문이다. 솔직히 인정하자. 난동을 부리는 사람은 인종 가릴 것 없이 어디에나 있다.
반대로 우리가 외국에 나가서 '어글리 코리안'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우리는 두려운 것이다. 우리가 흑인들의 한 모습을 보고 흑인 전체를 평가하듯, 외국인들도 우리들의 한 모습만 보고 한국인 전체를 평가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그래서 외국에 가면 쓰레기도 잘 줍고 매너 있게 행동하고 심지어 '여행 가면 우리 한 명 한 명이 외교관이다'라는 끔찍한 슬로건마저 만들어냈다. 하지만 어떻게 '내'가 '한국인' 전체를 대변할 수 있겠나. 매너 없는 한국인을 봤다고 해서 '한국인은 무례하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가 예측하지 못한 불편한 감정을 타인의 이질성을 탓함으로써 해소하려는 비겁한 사람일 뿐이다. 싸움하는 흑인을 봤다고 해서 '흑인은 폭력적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마지막으로 '흑형'도 칭송의 의미이긴 해도 비슷한 메커니즘으로 만들어지는 선입견이다. '흑형'은 유튜브에서 흑인들이 운동하거나 노래, 춤, 랩을 하는 영상이 한국에서 유행하면서 만들어진 단어다. 그 영상에 나오는 흑인들은 우리 관점에서 볼 때는 상상을 초월하는 운동 능력이나 음악 능력을 자랑한다. 성인 동영상에서 보는 흑인들 또한 우리에 비해 신체적인 조건이 월등히 좋아 보인다. 그런 타인의 신체적인 우월함을 마주하면 우리는 상대적으로 위축감을 느낀다. 그런 위축감을 느끼는 순간 흑인들의 이태원 난동 영상을 봤을 때처럼 편 가르기를 하고 싶어진다. ‘저렇게 운동을 잘하고 몸도 좋은 것은 흑인이라서 그래!'라고 생각하면 손쉽게 위축감에서 해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어떤 한 사람의 긍정적인 면을 모두 '네가 부자라서 그래' 혹은 '네가 남자라서 그래'라고 환원하는 것과 비슷하다. 신체적 조건이 좋은 서유럽의 국가에서는 흑인의 우월함을 상징하는 '흑형'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 정리해 보자. 선입견은 두려움이나 위축감 같은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분'의 가장 이질적인 특징을 골라 '전체'로 일반화시키는 과정이다. 이 정의를 보면 흑인들이 '흑형'이라는 단어를 기분 나빠하는 것은 당연하다. 선입견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한 사람을 개인으로 보지 않고 전체로 보겠다는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제로 흑인들이 다른 인종보다 운동을 잘할 확률이 높다 하더라도 그건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한국인은 다 김치 좋아하잖아'라는 외국 친구의 말이 설령 맞을지라도 유쾌하지 않은 이유는 그 선입견이 함의하는 바, 즉 '난 널 개인으로 보지 않고 한국인으로 볼 거야'라는 의미 때문이다. 선입견은 참 거짓 여부와 별개로 '난 너라는 사람을 알려고 하지 않을 거야'라는 선전포고와도 같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폭력을 '어떤 사람/사건의 진실에 최대한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모든 태도'라고 했다. 그렇다면 흑인들이 이태원에서 왜 그런 난동을 부렸는지 섬세하게 알려고 하지 않은 채 단지 '흑인은 폭력적이라서 그렇다'라고 생각하는 우리야말로 진정 폭력적인 사람이 아닐까?
물론 미디어를 통해서 모든 것을 부분적으로 쪼개 보는 것이 익숙한 사회에서 어떤 존재를 전인격적으로 본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심지어 우리는 시간적 여유도 없고 늘 쏟아지는 정보에 시달리느라 눈 앞에 존재하는 사람마저 섬세하게 알아갈 여력이 없다. 선입견이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미디어, 자본주의, 가치관 등 사회의 매우 많은 요소들이 고쳐져야 한다. 이는 당연히 매우 어렵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일일 테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한 가지만 강조하며 끝내고 싶다. 한 사람을 하나의 '편'으로 묶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예를 들어 나는 '한국인'이라는 '편'으로 묶을 수 있지만, 또한 '여성', '30대 청년', '기혼자', '이성애자'라는 '편'으로도 묶을 수 있다. 이런 간단한 소개만으로도 내가 속한 '편'은 다섯 개나 된다. 그렇다면 나는 '이성애자 남성'과 '여성 외국인' 중 누구를 더 '내 편'이라고 생각할까? '30대 여성 동성애자'는 '내 편'인가, '네 편'인가? 이렇게 나를 다섯 개의 '편'으로만 표현해도 '내 편' 찾기에 딜레마가 생긴다.
그런데 어떻게 한 사람이 속한 '편'이 다섯 개밖에 없겠는가? 성별이나 국적처럼 주어진 조건 외에도 경험이나 취향처럼 한 사람을 구성하는 요소는 매우 다양하다. 그런 요소들을 모두 고려하면 사실 한 개인은 수도 없이 많은 '편'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김혜원'이란 사람이 수도 없이 많은 '편'에 속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아이러니하게도 그건 '김혜원'이란 사람이 고유하다는 뜻이다. 즉, '편이 무한하다'는 것은 '편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왜 '내 편'과 '네 편'을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한지 더욱 명확해졌다. 구분은 이분법적 사고다. 남성과 여성, 노인과 청년을 구분하기 위해서는 성별, 연령이라는 하나의 기준이 필요하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한 인간 안에는 수많은 특질이 존재하기 때문에 기준에 무엇이냐에 따라서 항상 다르게 분류될 수밖에 없다. 기준에 따라 항상 다르게 분류된다는 것은 항상 동일한 '내 편'과 '네 편'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즉, '내 편'과 '네 편'의 구분은 허상이다. 고유한 개인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전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에서 인류학자 피에르 클라스트르가 연구한 중남미 원주민 과라니족이 그랬듯, "하나는 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