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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Jun 25. 2019

5. '내 편'과 '네 편'의 탄생

모든 인간은 이질적이다. 세상에 '내 편'은 없다.

 앞선 글에서 이질적인 존재와 익숙해지면 익숙해질수록 그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은 옅어진다는 주장을 했다. 장애인이나 성소수자처럼 우리 사회에서 아직까지 많이 이질적인 존재의 경우, 익숙함은 분명 부정적인 감정을 완화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익숙함이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조금만 생각해보면 우리는 익숙한 존재에게도 혐오의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여성에 대한 남성의 혐오, 남성에 대한 여성의 혐오다. 세상에 여성과 남성처럼 익숙한 존재가 있을까? 생물학적 구분이든, 성적지향적 구분이든 세상의 반은 여자고 반은 남자다. 홀부모나 동성결혼 등의 경우를 제외하면 우리는 태어나서 오랜 시간 동안 가족 공동체 안에서 여성 구성원과 남성 구성원 모두와 부대끼며 생활을 한다. 예전과 달리 학교도 대부분 남녀공학이고, 직장에서도 여직원과 남직원이 함께 일을 한다. 이처럼 서로 익숙한 존재이기 때문에 길거리에 지나다니는 여성을 보고 외국인을 처음 본 사람처럼 반응하는 남성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궁금해진다. 우리는 어쩌다가 익숙한 존재에게도 혐오를 느끼게 되었을까?




 잠시 학교에 처음 전학 온 상황을 생각해 보자. 환경도 선생님도 반 학우들도 모두 낯설기만 하다. 누군가가 관심을 갖고 먼저 말이라도 걸어주면 좋겠건만 다들 자기 할일하기 바쁘다. 이런 불편한 상황에서 당신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대부분의 경우 반 분위기를 살핀 뒤 자기와 가장 비슷해 보이는 무리를 찾을 것이다. 여학생은 여학생 무리에, 남학생은 남학생 무리에 기웃거릴 테고, 모범생은 공부 꽤나 할 것 같은 무리에, 일진이면 싸움 꽤나 할 것 같은 무리와 어울리려고 할 것이다. 심지어 내가 다니던 중학교에서는 징검다리로 건널 수 있을 만큼 작은 실개천을 중심으로 개울의 북쪽에 사는 아이들과 남쪽에 사는 아이들이 따로 놀았다. 개울의 북쪽에 사는 아이들은 교복을 줄여입고, 남쪽에 사는 아이들은 힙합 스타일로 입는다는 유치한 이유 때문이었다. 하긴 그 이유가 강남과 강북, 경상도와 전라도, 서울과 지방을 나누는 이유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니 그리 유치하게만 생각되지도 않다. 우리는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자기와 최대한 비슷한 사람들 무리에 소속되고 싶어한다. 왜 우리는 이토록 비슷한 사람들을 찾으려고 애를 쓰는 걸까?

 

미국에서는 점심 시간에 학생들이 인종별로 모여 식사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는 '나와 다른 존재'를 알 수 없는, 혹은 예측 불가능한 존재라고 치부하곤 한다. 우리는 이런 예측 불가능한 존재가 불러일으키는 불편함과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나와 비슷한 존재를 찾는다. 나와 비슷한 존재는 예측 가능하기에 두렵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전학을 와서 낯설고 어색해도 일단 나와 비슷해 보이는 사람을 한 명이라도 찾으면 왠지 모르게 안심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심지어 불편한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해 나는 너와 비슷한 사람이라는 걸 필사적으로 어필하는 사람들도 많다. 처음 만난 타인과 억지스럽게 공감대를 형성하려고 하는 부류다. 그렇게 우리는 어디에서든 '내 편' 찾기에 몰두한다.


 하지만 잠시만 생각해보자. 세상에 정말 예측 가능한 존재라는 게 있을까? 같은 집에서 자라온 형제자매라 할지라도 서로 비슷한 부분이 있을 뿐 근본적으로는 이질적인 존재다. 만일 형제자매가 완벽하게 동일하다면 서로 이해를 못하거나 싸울 일은 없을 것이다. 동일한 존재로만 이루어진 사회, 즉 완벽한 '내 편'은 아마 개미 군단 같은 모습일 테다. 개미 군단을 보라. 수백 마리의 개미들이 같은 목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그들은 서로 완벽하게 예측 가능하기에 오해도, 싸움도, 혁명도 일으키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어떤가? 개개인의 생각과 욕망을 철저하게 통제하는 군대에서조차 쿠테타는 일어난다. 꼭 쿠테타처럼 극단적인 불복종을 행하진 않아도, 군인들 중 개미들처럼 진심으로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군생활을 하는 적은 사람은 없다. 아무리 같은 시간에 같은 밥을 먹고 같은 옷을 입고 같은 훈련을 시켜도 제각기 다른 인간들을 '동일한 존재'로 만들 수는 없다. 인간은 더 이질적이고 덜 이질적인 차이만 있을 뿐 근본적으로 서로 이질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부모, 자식, 형제, 단짝친구, 부부, 연인처럼 깊은 공감대를 공유하는 사이일지라도 세상에 절대적인 '내 편'은 있을 수 없다. 타인이란 근본적으로 예측 불가능한 존재다.

 

같은 옷, 같은 머리, 같은 자세를 하고 있어도 모두 다른 사람이다.

 

 사실 우리는 타인은 모두 이질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내 마음을 몰라주거나 친구가 내 말을 오해하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할 때, 세상에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사실을 머리로는 알더라도 마음으로 받아들이긴 힘들다. 이질성은 늘 두려움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 두려움을 해소하고자 우리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특징인 이질성을 제거하려고 한다. '나와 덜 이질적인 사람'을 '나와 같은 사람'으로 묶는 것이다. 그렇게 ‘내 편’이라는 개념, 혹은 ‘우리가 남이가'라는 정서가 탄생한다.




 세상에 나와 동일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묘한 안정감을 준다. 우리는 그 안정감을 찾아 끊임없이 어디엔가 소속되려고 한다. 하지만 인간의 근원적인 이질성을 무시한 채 억지스럽게 만들어낸 '내 편'이 진짜로 안정적일 리는 없다. 왜 군대가 폭력과 강압으로 군인들을 길들이겠는가? 그런 극단적인 방식이 아니면 '군인은 이렇다'는 허구적인 동질성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동질성이 안정감을 준다면 그 동질성을 위협하는 요인은 극도의 불안 요소로 작용한다. '내 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예측 불가능한 행동을 하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경상도의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라 남중, 남고를 나온 남성이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체격이 좋고 싸움을 잘해서 학창시절 내내 거친 일진 무리들과 어울렸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유재하 추모 앨범’이란 이름으로 발매된 한 곡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하지만 그는 일진 친구들에게 유재하를 설명할 길도, 엄두도 나지 않아 그저 혼자 음악을 듣고 혼자 울었다고 한다. 그가 속한 무리에게 유재하의 음악은 너무나 섬세하고 여성스러운 것, 즉 그들의 남성적인 동질성을 위협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은 매우 보편적이다. 내 학창 시절을 떠올려도 내가 속한 집단의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던 기억이 난다. 어떤 옷이 유행하면 엄마에게 그 옷을 사달라고 졸랐고, 어떤 노래가 유행하면 노래방에서 그 노래만 불렀다. 맨날 붙어다니던 친구 무리 안에서도 좀 튀는 행동을 하는 아이가 있으면 은근슬쩍 왕따시키기도 했다. 내가 아는 어떤 여성은 중학교 때 아이돌 가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했고, 어떤 남성은 같은 반 여학생을 좋아했는데 친구들이 걔를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해서 고백을 못했다고 했다. 심지어 성인이 되어서도 우리는 '내 편'의 기준에 부합하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내 편'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순간 왕따를 당했던 학창시절처럼 순식간에 '네 편'으로 추락할 것이라는 공포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노력들이 진정으로 의미가 있을지는 생각해볼만한 문제다. 군대에서 폭력과 강압이 두려워 참된 군인처럼 행동한다고 해도 그건 연기일 뿐이다. '내 편'에 속하기 위한 우리의 필사적인 노력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겉으로는 거친 척 해도 경상도에서 자란 그 남성은 유재하의 음악에 눈물을 흘리는 섬세한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다. 아무리 왕따를 당한다 한들 신해철의 음악을 좋아하던 여성이 갑자기 아이돌 노래를 좋아할 수는 없다. 아무리 친구들이 뭐라고 해도 같은 반 여학생을 좋아했던 남학생의 마음마저 바꾸진 못했 것이다. 아무리 연기를 한들 진짜 모습을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진짜 모습을 숨긴 채 너무나도 많은 연기를 하면서 산다. 오직 '내 편'이라는 허구적인 개념을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내 편'과 '네 편'의 구분은 허상이다.




 이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우리는 어쩌다가 익숙한 존재에게도 혐오를 느끼게 되었을까? 차차 구체적인 메커니즘을 밝혀나가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인간 존재의 본래적인 이질성을 부정한 채 ‘나와 덜 이질적인 사람’을 ‘나와 동일한 사람’으로, ‘나와 더 이질적인 사람’을 ‘나와 다른 사람’으로 구분짓기 때문이다. 이런 억지스러운 구분 때문에 우리는 진짜 모습을 숨긴 채 '내 편'에 어울리는 연기를 하면서 살아간다.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답게, 부모는 부모답게, 학생은 학생답게, '내'가 아닌 '내 편’의 가면을 쓰는 탓에 어떤 사람의 진짜 모습을 볼 기회는 좀처럼 없다. 매일 마주치는 익숙한 존재이면 뭐하나? 나도 가면을 쓰고 그를 만나고, 그도 가면을 쓰고 나를 만나는데. 결국 우리가 매일 보는 것은 그 사람이 아닌, 그 사람의 가면 뿐일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내 편'과 '네 편'의 구분으로 세상을 보는 남성은 여성을 한 사람으로 보지 못하고 여성성이라는 이미지로만 본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여성들과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낸다 한들 여성이라는 존재에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부모를 보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태어나자마자 몇십년을 함께 살아도 우리가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은 우리 앞에서 ‘어머니’와 ‘아버지’의 역할을 연기하고, 우리 또한 그들을 ‘어머니’와 ‘아버지’로만 보기 때문이다. '편'이라는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순간 개인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물론 '내 편'과 '네 편'의 구분 없이 오롯이 한 개인을 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미 우리의 관념은 '남자는 이래, 여자는 이래'라는 허구의 잣대로 물들어 있고, 세상은 우리가 그 잣대에서 벗어나도록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이다. '내 편'과 '네 편'의 구분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선 우리 모두가 타인은 본래 이질적이며 예측할 수 없는 존재라는 불편한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우리는 늘 우발성이 없는 안락한 환경에서 살고 싶어한다. 하지만 타인이 이질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내 편' 만들기에 집착하는 사람은 평생 자기 모습을 숨기고 연기하는 허무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불편함이 나을까, 허무함이 나을까. 어려운 선택이지만 한 가지 사실을 말해줄 수는 있다. 나의 지인인 그 경상도 남성은 이제 유재하 음악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유재하 음악을 좋아한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다녔더니 남녀 구분없이 자기처럼 감수성이 섬세한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옛 친구들은 그런 그를 '가스나 같다'고 놀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일까. 그에게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좋아해주는 친구들이 있는데. 더 이상 그는 '남자답다'는 기준에 부합하기 위해 자신을 숨길 필요가 없다. 물론 욕 먹고 눈치 보일 수는 있지만, '내 편'에서 벗어나 '나'로 산다는 건 생각보다 행복한 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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