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혜원 Jun 20. 2019

4. 노브라, 특수학교, 노키즈존에 얽힌 혐오의 심리

이질적인 존재를 격리하는 사회

  나는 20대에 미국에서 몇 년 동안 유학 생활을 했다. 처음 타지에서 생활하는 것이니 음식부터 가치관까지 모든 것이 문화 충격이었지만,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받은 가장 강렬한 충격은 여자들이 브라를 차지 않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모습이었다. 지금이야 한국에서도 노브라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고 있지만, 십 몇 년 전인 그때만 해도 한국에서 여성이 브라를 차지 않고 밖에 나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난 미국에서 브라를 차지 않은 여성들을 볼 때마다 눈을 어디에 둬야할지 몰라 민망해 했다. 하지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다른 여성의 젖꼭지에 신경 쓰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보니 미국에서 브라를 차지 않은 사람은 마치 양말을 신지 않은 사람처럼 매우 익숙한 존재였다. 노브라에 익숙하지 않은 나만 그것을 '이질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나 또한 브라를 차지 않은 여성들을 계속 보다 보니, 어느덧 그 모습이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졌다. 거기서 더 나아가 '어차피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데 나도 노브라로 다녀볼까?'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평소에 브라를 차면 소화도 안 되고 답답했기 때문이다. 처음 브라를 차지 않고 길거리에 나갔던 날 괜히 혼자 긴장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역시나 내 젖꼭지의 윤곽 따위를 신경 쓰는 사람은 역시나 없었다. 그날 이후로 난 웬만한 일이 아니면 미국에서 브라를 차지 않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십몇 년이 흐른 지금, 한국에 돌아온 나는 다시 브라를 찬다. 십몇 년이 흐른 지금에도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노브라'는 이질적인 장면이기 때문이다. 한 여자 연예인이 노브라에 티셔츠를 입은 사진을 올렸다고 뉴스기사까지 나는 걸 보면, 이 사회가 아직도 브라를 차지 않은 여성을 얼마나 불편하게 생각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난 브라를 차면 답답하기 때문에 미국에서처럼 노브라로 다니고 싶다. 그래서 옷을 껴입을 수 있는 겨울이 되면 털갈이를 하는 짐승마냥 신나게 브라를 벗어던진다. 하지만 다른 계절에는 내 젖꼭지 윤곽에 쏟아질 시선들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다시 브라를 찬다. 나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여성들이 바로 그 시선 때문에 브라를 비롯한 많은 불편함을 감수하고 살 것이다. 아니, 여성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될 수 있으면 무난하게 사려고 애쓰는 건 모두 '이질적인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아서다. '이질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은 타인의 적대적인 시선을 끊임없이 감당해야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Burn that bra!




 지난 글에서 나는 우리 안에 이질감을 줄이는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이질적인 존재가 득실거리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마치 노브라가 한국에선 불편한 장면이지만 미국에선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아무리 이질적이라도 자주 봐서 익숙해지면 더 이상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질적인 존재가 득실거리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이질적인 존재는 사람들의 적대적인 시선 때문에 점점 고립되고, 그들이 고립되면 고립될수록 그들에 대한 이질감은 커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악순환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딜레마를 떠올리게 한다. 사람들의 부정적인 시선에도 불구하고 노브라로 다닐 것인가? 아니면 상대가 노브라임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시선을 던지지 않을 것인가? 둘 중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으면 이질적인 존재와 공생하는 사회는 불가능하다.


 이해를 돕기 위해 노브라를 예시로 들었지만, 사실 브라는 언제라도 입고 벗을 수 있는 선택의 대상이다. 하지만 자신의 존재 자체가 이질적인 사람들에겐 선택의 여지마저 없다. 그들은 삶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혼자만 신체, 성적지향, 성장 환경 등이 다른 상황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부정당하는 느낌을 견뎌야 한다. 그런 그들에게 이질적인 존재가 득실거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적대적인 시선을 감내하며 세상에 활개치고 다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 아닐까? 게다가 그들은 단순히 타인에게 이질감을 유발시키는 것을 넘어 의도치 않게 피해를 끼치기도 한다. 출근길에 한 장애인이 지하철을 타려다가 휠체어 조종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출발이 지체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지하철에 있던 사람들은 말은 하지 않지만 일제히 그에게 따가운 눈총을 보냈다. 그 눈빛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왜 굳이 바쁜 출근길에 나와서 민폐를 끼치는 거야?' 그런 시선을 반복적으로 경험한 사람은 자신의 존재가 남에게 피해가 된다고 생각해 점점 사회에 나오지 않게 된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장애학생들의 통합교육을 가로막는 가장 근본적인 장애물이기도 하다. 이질적인 존재에 익숙해지면 그들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완화된다는 측면에서 아이들을 어려서부터 이질적인 존재와 같은 공간에서 교육시키는 것은 훗날 사회의 혐오를 줄이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래서 유럽의 많은 국가들은 장애학생을 일반 학교에서 비장애인 학생들과 함께 교육시키는 통합교육을 채택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통합교육을 실시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교사들이 장애에 대한 이해도가 낮고 장애학생을 전담하는 특수 교사 숫자가 적다는 구조적인 문제도 있지만,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장애학생이 일반 학생들의 학습권을 침해한다는 인식이다. 실제로 장애를 가진 아이를 일반 학교에 보낸 학부모도 다른 학부모들이 자기 아이가 수업을 방해하고 선생님도 힘들게 한다고 수근 대는 것을 듣고 아이를 특수학교로 전학시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한 장애 아동 부모는 어떤 인터뷰에서 이렇게 이야기 했다. "우리가 입시경쟁 구도에 아이들을 내몰다 보니까 상대를 이해한다는 것이 사치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지금 학원가야 하는 내 문제가 너무나 급하고 피곤하니까 다른 아이를 이해하는 것이 귀찮고 짜증나는 일이 되는 거죠."


 내 아이가 남에게 피해가 되는 존재이기 때문에 격리시키는 것. 공적 영역이냐 사적 영역이냐의 차이는 있지만, 이는 노키즈존의 논리와도 같다. 물론 영업주가 자신의 영업장에서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주의주거나 내쫒을 권리는 당연히 있다. 가게를 뛰어다니는 아이, 술에 취해 옆 테이블 사람에게 찝쩍대는 아저씨, 고성방가하는 아줌마 모두 해당된다. 이때 격리의 기준은 '행동'이다. 이 경우 아이든, 어른이든 누가 행동을 했느냐는 중요하지 않고 그 누군가가 문제 행동을 했느냐만 중요하다. 하지만 노키즈존은 아이가 실제로 문제 행동을 일으키는지 보기 전에 아이란 남에게 피해를 주는 존재라고 못 박아 버린다. 그 누구도 '존재'가 격리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그렇게 '남에게 폐를 끼친다'는 이유로 장애학생은 특수학교로, 아이들은 키즈존으로 격리된다. 물론 일반 학생이나 선생님, 또 가게를 운영하는 영업주의 입장도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수업시간에 소리를 지르는 장애 학생을 보고 불쾌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가뜩이나 할 일도 많은데 선생님 혼자서 장애아동까지 일일이 신경 쓰기는 어려운 일이다.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 입장에서도 아이들 때문에 다른 손님들로부터 컴플레인을 몇 번 받으면 그냥 맘 편하게 노키즈존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아까 언급한 장애 아동 학부모의 말을 떠올려 보자. 우리가 상대방을 이해하는 걸 사치라고 여기게 된 것은 우리가 너무 바쁘고 피곤한 삶을 살아서 아닐까?


"Injustice anywhere is a threat to justice everywhere."


 아침 출근길이 아니었다면 휠체어를 타고 지하철에 올라타려는 장애인에게 그리 따가운 눈총을 보내지 않았을 수도 있다. 카페를 가는 것이 어쩌다 얻은 휴식이 아니라 일상인 사람은 카페에서 우는 아이를 보고 그렇게 짜증나지 않을 수도 있다. 장애 학부모가 인터뷰에서 말했듯이, 학생들이 입시경쟁 구도에 치이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학교를 다닌다면 장애 학생이 조금 소란을 피워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나와 이질적인 존재를 알아가는 데에는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들게 마련이다. 효율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회에서 나에게 뚜렷한 도움을 주지 않는 존재에게 굳이 시간과 노력을 들일 필요가 있을까? 그러니까 장애 학생과 함께 생활하는 방안을 생각해보기 전에 학원이라도 하나 더 가는 게 이득이다. 또 경쟁 사회에서는 작은 권리를 얻기 위해서도 아득바득 일해야 하기 때문에 자기 권리가 조금이라도 침해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어떤 모르는 아이가 나의 소중한 휴식 시간을 의도치 않게라도 방해하면 짜증을 넘어 분노의 감정까지 드는 건 그 때문이다. 경쟁 사회의 모토는 '나만 잘 살자'다. 나만 잘 살면 되는 사회에서 '더불어 잘 사자'는 말은 모순이다. 그래서일까? 요즘 사회에서 나와 다른 존재를 이해하자는 주장은 사치 또는 의무처럼 느껴진다. 소수자나 약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많은 사람들이 ‘나 하나 살아남기도 팍팍해 죽겠는데 내가 왜 도움도 안 되는 저 사람들을 이해해야 하지?'라고 반응한다. 우리의 사고방식은 이토록 효율과 경쟁의 논리에 푹 젖어 있다.


 하지만 우리만큼 효율과 경쟁을 중시하지 않는 나라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독일에서는 장애아동의 통합교육이 활발할 뿐만 아니라, 비장애 학부모들이 오히려 통합교육을 선호한다고 한다. 장애 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는 통합학교에서 비장애 아이들도 타인에 대한 관용을 배우기 쉽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나라와는 완전 반대되는 사고방식이다. 그들은 장애인을 방해꾼이나 어쩔 수 없이 도와줘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나와 달라서 배울 점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독일의 학교에서는 비장애 학생들에게 장애 학생을 무조건 도와주라고 교육하지 않는다. 대신 소풍을 갈 때 휠체어를 탄 학생들은 어떻게 이동할지 다 같이 학급회의에서 고민한다고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비장애 학생은 자신과 다른 이질적인 존재들에 대해 자연스럽게 알아갈 수 있다. 이 학생들이 커서 장애인을 혐오하는 일은 아마도 없지 않을까?




 앞서 말했듯 사회의 혐오를 조장하는 악순환을 끊기 위해선 1) 이질적인 존재들이 사람들의 부정적인 시선에도 불구하고 사회에 나와야 하고 2) 우리가 이질적인 존재에게 부정적인 시선을 던지지 않아야 한다. 요즘 우리 사회의 소수자들이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점점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걸 보면 첫 번째 단계는 고무적이다. 앞으로 더 많은 소수자들이 더 다양한 방식으로 자기 이야기를 하게 될 것 같다. 하지만 두 번째 단계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분명 전반적으로 이질적인 존재들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긴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에 대한 혐오도 심해졌기 때문이다. 혐오가 심해진 이유는 앞서 밝힌 것처럼 한국이 빠른 속도로 경쟁 사회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효율과 경쟁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약자와 소수자는 도태되면 그만인 존재다. 나 혼자 잘 살면 되는 사회에서 나와 다른 사람은 불필요한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내가 조금 짜증나고 불편하다고 아이, 노인, 장애인을 보이지 않는 곳에 격리시키는 사회가 과연 행복한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그 효율 추구와 경쟁 논리 때문에 우리도 점점 상대방을 헤아릴 여유조차 없는 각박한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 건 아닐까?


 혼자 갈 것인가, 함께 갈 것인가. 숨가쁜 일상에서 잠시 멈춰서서 우리 사회에 대해 생각해볼 문제다. 나는 노브라도, 장애인도, 어린이도 우글대는 사회에 한표 던진다.

작가의 이전글 3. '나와 다른 존재'가 익숙해질 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