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혜원 Jun 10. 2019


3. '나와 다른 존재'가 익숙해질 때

이질적인 존재가 득실거리는 사회를 꿈꾸며

 수년 전 국제학교 근처 편의점에서 담배를 사고 나오는 길이었다. 담뱃불을 붙이는데 한 무리의 남학생들이 떠들며 경사로를 따라 내려오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흑인 소년이었는데 어딘가에 정신이 팔려 무리에서 뒤쳐졌다. 한국인 녀석이 짜증나는 투로 소리쳤다. 

 “빨리빨리 좀 따라와. 깜둥이 새끼야!”

 순간 시공간이 뒤틀렸고 나는 담배를 문 입술을 떨었다. 그러자 유창한 한국어로 흑인 아이가 응수했다. 

 “뭐래. X만한 새끼가. XX도 졸라 작은 게.” 

 흑인 아이는 무리와 합류했고 우리가 중고등학생 때 그랬던 것처럼 다함께 서로를 향해 욕을 주고받으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뒤틀린 시공간이 돌아왔고 나는 세상이 진보하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우리의 미래가 부디 이런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한 네티즌의 글


 지난 글에서 ‘이질감’은 이질적인 존재를 겉모습만 보고 ‘알 수 없는 존재’라고 착각해 생기는 부정적인 감정이므로 그를 ‘알게 되는’ 순간 사라진다고 이야기 했다. 이번 글에서는 이질감이 사라지는 과정, 즉 이질적인 존재는 알아가는 과정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우선 다시 한 번 이질적인 존재에 대한 정의를 떠올려 보자. 이질적인 존재는 1) 나와 다르고 2) 익숙하지 않은 존재다. 이 정의를 조금만 살펴보면 이질적인 존재를 ‘이질적이지 않은 존재’로 만들 방법이 쉽게 떠오를 것이다. 바로 다음 두 가지 방법이다. 


 1) 이질적인 존재와 익숙해지는 것

 2) 이질적인 존재가 나와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 것


 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면 더 이상 이질적인 존재는 이질적이지 않게 된다. 



 

 예를 들면 내가 병동에서 마주쳤던 그 장애 아동이 우리 집 앞으로 이사를 왔다고 생각해 보자.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엘리베이터를 탈 때마다 그 아이를 마주치게 될 것이다. 그런 상황이 반복되면 아무리 나와 다르다고 생각한다고 해도 그 아이에게 점점 익숙해질 수밖에 없다. 한 열 번쯤 마주쳤는데도 볼 때마다 뒤로 주춤할 리는 없지 않은가? 오히려 매일 못 본체 했던 게 마음에 걸려서 어느 날 사탕 한 개를 쥐어 주면서 어색하게 인사를 건넬 지도 모른다. 이처럼 이질감은 단순히 자주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옅어질 수 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상황도 있다. 그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루도록 하겠다.)


 더 나아가 이질적인 존재와 자주 마주치다 보면, 그에 대해 익숙해질 뿐만 아니라 점차 알아가는 점들이 생기게 된다. 예를 들면 반에 외국인 학생이 전학을 왔다고 해보자. 처음 며칠은 이질적인 겉모습 탓에 계속 피하고 거리를 둘 수 있다. 하지만 몇 달 동안 같은 공간에서 부대끼며 생활한 뒤에도 여전히 그녀를 ‘알 수 없는 존재’로 여길까? 어느 날 그녀가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 영상을 핸드폰으로 보고 있는 걸 우연히 발견할 수도 있다. 그 순간 왠지 모를 친근감이 느껴지면서 말을 걸어보고 싶어질 것이다. 그렇게 좋아하는 아이돌 이야기로 실컷 수다를 떨다 보면 어느덧 마음속에 ‘얘도 나랑 비슷하잖아!’라는 생각이 자리잡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든 다음부터는 그녀의 이질적인 겉모습이 그다지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제 나에게 익숙하고 비슷한 점도 많은 존재, 즉 이질적이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충분히 아는 상대인데, 그녀를 계속 이질적인 겉모습으로 판단할 이유는 없다. 아마 친구가 된 다음부터 이질적인 겉모습은 그녀의 많은 특징 중 하나 정도로 여겨질 것이다. 이 글 초반 인터넷 커뮤니티 글에 등장한 국제학교 남학생 무리들이 그랬듯 말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를 보면 저 글을 썼던 네티즌이 느꼈던 것만큼 진보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네티즌의 말처럼 예전보다 외국인에 대한 이질감은 완화되었지만, 그만큼 노인, 장애인, 다른 사회계급에 대한 이질감은 커졌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나와 다른 존재들과 한 동네에서 부대끼며 살 수 밖에 없었지만, 요즘엔 나와 다른 존재를 마주치지 않고 사는 게 너무 쉬워졌다. 아이들도 자기 아파트 단지 내 친구들하고만 노는 세상이니 말이다. 


 분명 이질적인 존재와 거리두는 것은 ‘이질감’이라는 부정적인 감정에서 가장 빠르게 벗어나는 방법중 하나일 테다. 하지만 도덕적인 판단을 떠나서, 그들을 피하고 사회에서 몰아내는 것이 정말 이질감을 없애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이질적인 존재가 희귀해지면 희귀해질수록 그들과 익숙해질 기회는 줄어들고, 그런 기회가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일상에서 조금만 이질적인 존재를 마주쳐도 강렬한 이질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마치 시골 아이들은 벌레를 봐도 아무렇지도 않지만, 도시 아이들은 작은 날벌레만 나타나도 겁에 질리는 것처럼 말이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이질적인 존재와 부대끼다 보면 우리 안의 이질감을 근본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한 가지 깨달음에 다다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아무리 나와 달라보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알고 보면 나와 비슷한 점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깨달음은 머릿 속으로 생각만 해서는 체득할 수 없다. 내가 늘 '장애인도 당연히 나와 비슷한 인간이지'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정신지체 아동을 마주했을 때는 깜짝 놀라 뒤로 주춤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 깨달음은 삶의 경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이질적인 존재와 친구가 된 경험이 몇번 있는 사람은 진심으로 느낄 것이다. 나와 달라보이는 사람도 알고 보면 나와 비슷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런 사람은 또 다른 이질적인 존재를 마주하더라도 섣불리 그를 '알 수 없는 존재'라고 판단하지 않는다. 물론 처음 만났기 때문에 익숙하지 않겠지만, 그는 자신과 달라 보이는 상대를 '다르다'고 규정짓기 전에 '나와 비슷할 수도 있다'고 맘 편히 생각한다. 그래서 그에겐 이질적인 존재가 이질적이지 않다. 당연히 그는 타인에게 이질감도 별로 안 느낄 것이다. 


 아이를 건강하게 키우고 싶다면 완벽하게 병균을 차단하는 방법보다는 아이의 면역력을 튼튼하게 할 방법을 고민하는 게 현명하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이질적인 존재를 격리하고 차단할 게 아니라, 오히려 그들과 부대낄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그래야만 '이질감'이란 부정적인 감정을 근원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질적인 존재가 득실거리는 사회. 이것이 우리 사회의 혐오를 줄이는 첫 번째 방법이다. 

작가의 이전글 2. '나와 다른 존재'는 '알 수 없는 존재'일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