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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May 31. 2023

정치와 레슬링

벌떼에서 척추동물로

“아, 다 모르겠고 그냥 찢어죽이고 싶다.”


이게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몇 개월 째 증오라는 감정과 씨름하고 있다. 한번 생긴 증오는 잘 없어지지 않는다. 증오를 이리도 보고 저리도 보며 깊숙이 들여다봤다. 양자역학도 다시 공부하고 자연에도 가봤다. 내가 걸려있는 지점이 어딘지 알았다. 이 증오에서 어디까지가 타당하고 어디까지 내가 부풀리고 싶은 지점인지 알았다. 아마 그게 지금 내가 정신으로 갈 수 있는 끝지점일 테다.


사실 증오의 가장 편한 탈출구는 증오를 폭발시켜버리는 것이다. 나에게 상처 준 사람에게 그에 상응하는 상처를 되갚아주기. 즉, 복수다. 그런데 그 복수에는 여러 가지 고려 사항이 있다. 만일 내가 상처를 되갚은 과정에서 내 증오의 대상이 아닌 다른 사람들, 특히 내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들까지 상처를 받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나만 생각해서 복수를 해본 적이 있다. 그 복수의 결과는 참담했다. 그 당시 나는 그저 ”니가 찔렀으니 나도 찌른다"는 마음으로 상처준 이에게 상처를 줬는데, 그 과정에서 내가 가장 상처받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들이 차례로 상처 받았다. 그때 나는 내 손을 떠나버린 복수의 지뢰밭에서 손 쓸새 없이 터지는 지뢰를 보며 주저앉아 울기나 했다. 이제 그런 일을 반복할 수 없다.


그래서 증오를 직시하되 터트리진 않았다. 그러다가 알았다. 응축된 증오가 드러내는 것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내 모습이다. 나는 사실 복수의 화신이다. 나는 그 결과를 모두 다 책임질 수 있다면 복수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복수하는 방식은 나쁘다. 그 지점을 알았다. 나는 정치적인 인간이다. 정치적인 인간은 누군가에게 복수를 할 때도 자기 손은 더럽히지 않는다. 정치가 무엇인가? 정치는 편먹기다. 내 손을 더럽히지 않고 남에게 상처를 주는 방법. 두 가지가 있다. 법과 여론. 즉, 권력에 기대거나 쪽수에 기대거나. 그게 내가 나를 지키면서 나를 상처준 사람에게 복수하는 방식이다.


그간 어찌할 바를 몰라서 목구명만 뜨거웠다.




고등학교 때 일이다. 당시 나는 오래 사귄 남자친구가 있었다. 그 남자친구와 헤어진지 얼마 되지 않아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남자친구가 나를 사귀는 반절의 기간 동안 다른 여자와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 여자는 내 친구였다. 그 사실을 알게 되고 나는 너무 화가 났다. 나의 분노의 지점은 이것이었다. “이 년놈들이 감히 나를 속여?” 지금 생각해보면 남자친구가 나에게 충분히 사랑받는다고 느끼지 못했으니 다른 여자를 찾은 것일 테다. 연인에게 충분히 사랑받는다고 느끼는 사람은 웬만하면 양다리를 걸치지 않을 테니까(양다리를 걸치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다. 지금 충분히 기쁘면 굳이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시 나는 나를 돌아볼 생각따윈 하지 않았다. 그 두 년놈이 나를 상처줬다고만 생각했다. 나는 너무 열 받아서 잠을 못잘 지경이었다. 그때 아버지가 항상 하던 말이 떠올랐다. “누가 널 때리면 가서 샤프심으로 찌르기라도 해라.” 나의 아버지는 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사람이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나도 비슷한 삶의 규칙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 상황을 누가 나를 때린 상황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때리면 샤프심으로라도 찌른다!”라는 거의 아메바 수준의 마음으로 복수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두 사람이 다니는 고등학교의 온라인 커뮤니티에 이 사실을 써서 대자보마냥 게재했다. 그리고 그 여자애에게 “야, 너는 고등학생 때부터 첩질하냐”라는 식의 멸시와 비아냥으로 가득찬 문자를 보냈다.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불행을 좋아한다. 이 흥미진진한 스캔들은 삽시간에 동네 고등학교들에 퍼져나갔다. 그 여자애는 결국 나에게 글을 내려달라며 울면서 사과를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뭐 그게 사과 받을 일인가 싶다. 단지 나의 '사랑받지 못했다’는 불안이 과도한 공격성이 되었던 것이니까. 하지만 나는 그 사건을 최근까지 꽤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나로서는 “누가 널 때리면 반드시 갚아줘라”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잘 수행한 사건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최근에 그 사건이 다르게 해석되었다. 그러면서 알게 되었다. 나는 약하기에 정치적인 인간이구나. 정치는 몸도 마음도 약한 사람들이 하는 거구나. 내가 만일 ‘론다 로우지’였으면 찌질하게 잔인한 문자나 보내고 있었을까? 아니다. 그 정도로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냥 가서 쥐어 팼을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왜 복수의 방식으로 ‘여론전’, 즉 ‘사회적 매장’을 택한 걸까? 나를 한껏 피해자로 만들어놓으면, 대중들이 알아서 나 대신 그들을 공격해줄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는 안전하게 저 멀리서 내 손 더럽히지 않고, 대중들이 그들을 공격하는 걸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실제로 그 사건 때 내가 그랬다. 친구들이 전달해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속으로 “씨발 꼬시다”라고 깔깔대며 웃었다. 나는 정말 여자로 태어나지 않았으면 ‘우병우’ 같은 인간이 되었을 것이다. 정치는, 아니 정치'질'은 약한 주제에 이기고 싶은 마음만 가득찬 사람들이 하는 것이니까.


나의 복수와 나의 증오를 되돌아보고 현타가 왔다. 요즘 베르그손의 <창조적 진화>를 배우고 있다. 베르그손은 동물의 진화 과정을 세 단계로 나눈다. 첫 번째는 온몸을 갑옷으로 둘러싼 고어류 같은 동물들이다. 이들은 주변의 공격에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온몸에 갑옷을 두른다. 거기서 한 단계 진화한 것이 벌과 개미 같은 막시류다. 이들은 갑옷을 벗고 관절(절지)을 장착해서 활동성이 커진 대신 취약해진 몸을 떼지어 다니는 것으로 보완한다. 실제로 벌이나 개미가 떼로 공격하면 왠만한 덩치의 동물들은 무력화된다. 그 다음 더 진화한 것이 척추동물이다. 척추동물은 떼지어 다니지 않아 독립성과 활동성을 극한으로 확보한 대신(척추동물도 무리를 짓긴 해도 이는 막시류의 ‘떼’와는 달리 개별성이 보장된 상태의 무리다), 극도로 취약해진 몸을 지성의 힘으로 극복한다. 그 수업을 듣고 나는 고어류와 막시류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인간이란 사실을 알았다. 오랜 시간 강박증자로 살며, 나는 온 마음에 갑옷을 둘렀다. 갑옷을 두르면 아무에게도 상처받지 않는다. 대신 활동성이 방구석으로 제한된다. 가끔씩 그 갑옷을 뚫고 상처받는 일이 생기면, 나는 벌떼나 개미떼처럼 행동했다. 왜 사람들은 자기가 상처받은 일을 많은 사람에게 말하고 싶어 할까? 가능한 한 내 편을 많이 확보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자존심 때문에 위로 받는 것을 싫어해서 평소에는 그러지 않지만,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싶을 때는 벌떼나 개미떼처럼 행동한다. 벌떼나 개미떼의 특징이 무엇인가? 여왕벌이나 여왕개미 같은 강력한 중앙권력, 그리고 쪽수. 즉, 법(권력자의 뜻)과 여론이다. 나의 복수를 권력자가 대신 해주길 바라는 것. 그게 법이다. 법이 여의치 않을 때 나의 복수를 대중이 대신 해주길 바라는 것. 그게 여론이다. 정치적 인간은 법과 여론에 능하다. 내가 그렇다.


싸움이 머리로 하는 거였으면, 내가 론다 로우지지.




나는 지금 이혼의 폭풍을 지나고 있다. 나와 남편 둘이 이혼하는 것인데, 그 ‘이혼’이라는 사건에 관계된 타자는 여럿이다. 그래서 ‘이혼’이라는 사건이 그 개별적인 모든 관계에 크고 작은 진동을 일으킨다. 나는 지금 내 인생에서 가장 크고 많은 진동을 한꺼번에 느끼고 있다. 그래서 알게 된 것일 테다. 나는 진동을 싫어한다. 나는 내가 요동치는 상황에 대한 역치가 낮은 편이다. 물론 평균적인 한국 여자의 기준으로 보면 나는 갈등이나 감정이 요동치는 상황을 비교적 피하지 않는 편이다. 할일은 하자 주의다. 하지만 할일은 하되 늘 진동을 최소화하려고 한다. 예를 들면, 감정이 요동칠 것 같으면 얼굴보고 얘기하기 싫고 서면으로 얘기하고 싶다. 그게 내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다. 집을 나오고 오랫동안 남편을 안 보다가 이혼 서류를 건네러 간 길. 원래는 서류와 편지만 우편함에 꽂아놓고 가려고 했는데, 우발적으로 남편을 불러냈다. 그건 나에게 꽤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남편에게 악수를 청했다. 글과 말로는 결코 전달할 수 없는 나의 진동을 전하고 마지막으로 그의 진동을 느끼고 싶어서였다. 그 진동의 공명이 서로의 마음에 어떤 흔적을 남길 것 같았다. 그 흔적이 ‘이혼’이라는 이 상황을 바꾸지는 않겠지만, 지나고 나면 ‘이혼’이라는 표딱지는 사라지고 그 흔적만 남을 것 같았다. 남편을 직접 보고 악수를 청한 건 최근에 내가 한 일 중 꽤 잘한 일이다.


섹스와 싸움은 같은 것 아닐까? 어느 날 든 생각이다. 사랑과 증오가 닮은꼴이라면 섹스와 싸움도 닮은꼴이다. 섹스가 사랑이 가장 큰 진동으로 표현되는 순간이라면, 싸움은 증오가 가장 큰 진동으로 표현되는 순간이다. 둘의 공통점은 몸이다. 몸과 몸의 부딪침. 섹스도 싸움도 결국 몸과 몸의 부딪침이다.


몸과 몸의 부딪침은 혼자로는 결코 갈 수 없는 어떤 길을 열어준다. 연인과의 관계가 어딘가 엉키고 고여 있을 때, 어떤 대화를 해도 풀리지 않는 것이 섹스를 한 뒤 해소된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섹스는 발산이다. 싸움도 발산이다. 몸과 몸의 부딪침은 ‘틈’을 낸다. 사랑으로 엉켜버린 마음, 증오로 엉켜버린 마음에 단박에 새로운 공기를 불어넣는다. 몸의 부딪침은 상대의 진동을 온몸으로 느끼는 일이다. 나는 그걸 피했다. 사랑에서도 증오에서도 그걸 피했다. 스승이 가끔 이야기 한다. “나는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사회적 매장’을 하지 않고 진짜 땅에 묻어버릴 거다.” 그 말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내가 싫어하는 대상을 진짜로 피떡이 될 때까지 때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나는 그걸 해보지 않았기에 모르지만, 그게 내가 가야할 방향이라는 것은 알겠다.


섹스와 싸움은 닮았다. 좋은 섹스처럼 좋은 싸움도 '유쾌'한 것 아닐까.




레슬링을 시작했다. 사실 오래전부터 끌리던 운동이었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레슬링을 하며 놀던 기억이 좋았던 것도 있고, 아버지와 심권호 선수의 경기를 보며 행복했던 기억도 있다. 예전에 한 친구가 나에게 반 농담으로 “넌 키가 작아서 무게중심이 낮으니까 레슬링에 잘 맞을 거야”라고 말한 것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사실 이유는 없다. 그냥 갔다. 끌려서. 한 2주 정도 망설였고, ‘아 씨발 모르겠다’라는 심정으로 갔다. 긴장이 되어서 오늘 하루종일 심장이 벌렁거렸다. 심장이 벌렁거리길래 이게 내가 해야할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여전히 몸을 쓰는 것, 게다가 다른 사람과 몸을 부딪히는 것은 나에게 어려운 일이다. 나는 몸도 약하고, 운동도 많이 안 해봤고, 몸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제까지 난 이렇게 태어났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핑계만 대고 있을 건가 싶다. 어린 시절 빡세게 공부해서 하나 알게 된 삶의 진실이 있다. (운동신경이나 공부머리처럼 타고난 재능이란 건 분명 있지만) 운동이든 공부든 열심히 꾸준히 하기만 하면 일반인 레벨에서는 누구나 중간은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심지어 철학을 열심히 수행했더니 없는 ‘감성’마저 생기지 않았나. 원래 몸치인데다가 마흔 다되어 운동을 시작하니 레슬링을 잘하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수행하는 마음으로 하면 못 할 것은 없다. 그게 지난 5년 간의 빡센 철학 수행이 나에게 알려준 것이다. 나는 운동을 수행하는 마음으로 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운동이 ‘기쁨’이라는 것을 느끼는 데까지 왔지만, 여전히 운동을 잘하지는 못한다. 운동에 진심을 담아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운동도 수행하는 마음으로 해봐야겠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정신으로 갈 수 있는 지점은 거의 다 간 것 같다. 이제 내가 제일 무섭고 피하고 싶고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몸’을 써야할 시간이다. 치고받고 싸우고 싶다. 그러면 뭐라도 열릴 것 같다. 난 더 이상 내 사랑도, 내 증오도 권위자나 대중에게 의탁하고 싶지 않다. 갑옷도 두르기 싫고, 여왕벌의 심판을 기다리기도 싫고, 내 편을 만들어 떼지어 다니기도 싫다. 이제 '벌'이랑 '개미'에서는 벗어나야겠다. '론다 로우지'는 되지 못하더라도 '척추 동물'은 되어야하지 않겠나. 그런 의지로, "어쩌다 철학, 어쩌다 레슬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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