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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Jun 15. 2023

나의 스타트업 실패기

그리고 밥벌이

“나는 너를 신뢰할 수 없다.”


며칠 전 아버지에게 들은 말이다. 나는 그 말이 나에 대한 비난이 아닌, 진심어린 걱정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아버지가 나에게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 나라는 인간 전체가 아니라 한 부분임을 알고 있다. 아버지는 내가 이혼을 하고 나서 혼자 잘 살 수 있을지, 더욱이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 잘 살아갈 수 있을지를 걱정하고 있다. 결혼이라는 것은 참 웃기다. 사실 ‘결혼’은 나에게 붙어있는 어떤 표딱지 같은 것이다. 이미 남편과 따로 산지 오래된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니까 '결혼'을 한 '나'와 '이혼'을 한 '나'는 사실 같은 사람이다. 하지만 ‘결혼’이라는 표딱지가 주는 어떤 허구의 안정감이 있다. 아버지는 내가 이혼을 말하기 전까지는 나를 그렇게까지 걱정하지는 않았다. 사람은 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고 종종 말했지만, 어쨌든 내가 유부녀고 남편은 회사를 다니고 있기 때문에 결혼을 하고 있는 한 어느 정도 무난한 삶을 이어갈 것이라 생각했을 테니까. 하지만 그 ‘결혼’이라는 표딱지를 사라지자 그 허구의 안정감도 함께 사라졌다. 마치 대기업에서 퇴사함과 동시에, 지금까지 내 모습은 단지 회사에서 만들어준 것에 지나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것처럼.


아버지의 말에 요동쳤다. 왜 그랬을까? 내가 은연중에 숨겨왔던 내 모습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나도 내가 앞으로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 잘 살아갈 수 있을지 신뢰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감정적 요동 때문에 다시 ‘결혼 제도’ 안으로 기어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없다. 이미 결혼 표딱지를 떼어낸 내 진짜 모습은 수면 위로 드러났으니까. 내가 한창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스승에게 받은 글이 있다.


가까운 이들에게 상처주지 않으면서 나 자신이 되는 길은 없다. 가까운 이들에게 상처 주는 일은 어렵다. 그것은 왜 어려운 일일까? 여기에는 두 가지 마음이 중첩되어 있기 때문이다. 공포와 회한. (중략)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공포와 회한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씨름할 때, 비로소 ‘나 자신’이 될 수 있다. 가까운 이들은 나 자신이 되는 길에 장애물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허상 같은 것이다. 근본적인 장애물을 넘어설 때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릴 허상.  



이 글이 마음속에 떠올랐다. 이혼을 고민할 때 나에게 가장 큰 허들은 ‘아버지’였다. 아버지에게 이혼을 말하는 게 두렵고 미안했다. 공포와 회한의 감정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겠다. 가까운 이들은 나 자신이 되는 길에 장애물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허상이다. 내가 근본적인 장애물을 넘지 못했기에 발생한 허상. 그렇다면 내가 넘지 못한 근본적인 장애물은 무엇인가. 바로 내가 내 삶을 온전히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 근본적인 장애물을 왜 넘지 못했는가? 그 장애물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씨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어른은 내 삶을 온전히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마주하지조차 않았다.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 사실을 정면으로 마주한 적이 없다. 왜? 나에게는 책임감 넘치는 부자 아버지가 있으니까. 나는 내 삶을 아버지에게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의존하는 만큼 아버지는 나를 걱정한다. 칠십 먹은 아버지가 마흔이 다 되어가는 딸을 걱정하고 있는 이 상황이 지금 나의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다. 나는 대체 왜 이렇게 된 걸까? 나는 그걸 돌아본 적이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 대학을 졸업하고나서 지금까지 나는 온전히 내 밥벌이를 해본 적이 없다. 왜? 부잣집에서 태어난 나에게 밥벌이는 늘 옵션이었기 때문이다. 그 말인즉슨 나는 이제껏 단 한 번도 내 삶을 온전히 책임지지 않았다는 의미다. 대학을 갓 졸업한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그래, 나는 ‘명예’롭고 싶었다. 밥벌이가 옵션이었으니 그 다음 떠오른 것은 ‘멋있어지고 싶다’는 욕망이었다. 나의 스타트업은 그런 ‘허세’로 시작한 것이다. 그 당시 나와 같이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 중에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레스토랑도 차리고 카페도 차리고 스타트업도 했다. 개중에는 사업을 잘 꾸려나간 사람도 있고, 몇 년 만에 투자금을 전부 말아먹고 취업을 하거나 대학원에 간 사람도 있다. 나는 참 가늘고 길게 버텼다. 화끈하게 1년 만에 말아먹지도 끝끝내 사업을 잘 운영해나가지도 못했다. 내가 그때 잘한 것은 가늘고 길게 그 ‘허세’의 끝까지 가본 것 하나다. 그 ‘허세’의 끝에서 알았다. 나는 사업을 못하는 인간이구나. 그때부터 난 세상이 무서워졌던 것 같다.


스타트업 판은 내가 이때까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본능’적인 이들이 많은 곳이었다. 그럴 만도 하다. 돈을 번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먹이를 구하고 싶다는 욕망과 일치하니까. 누가 사냥을 잘할까? 먹이를 많이, 그리고 효과적으로 구하고 싶은 이들이다. 그런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 스타트업계에 많았다. 나는 거기서부터 글러먹었었다.


내가 스타트업을 하면서 가장 절망했던 것도 그 부분이었다. 어느 정도 사업을 하다가 알아버렸다. 사업을 잘하려면 두 가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 내가 찾은 두 가지는 ‘절박함’과 ‘대중감각’이었다. 나는 그 둘이 모두 없었다. 요즘 베르그손 수업에서 지성, 본능, 직관이라는 개념을 배운다. 절박함과 대중감각은 둘 다 ‘본능’이다. 절박함이 무엇인가? 살아야 된다는 욕망이다. 대중감각은 무엇인가? 베르그손은 본능은 ‘공감’이라고 말한다. 나는 ‘공감’이라는 말보다는 ‘감응’이라는 말이 더 와닿는다. ‘공감’은 너무 오염된 단어라 왠지 위로하고 격려하는 행위를 뜻하는 것 같으니까. 그런 힐링스러운 ‘공감’ 말고 상대를 더 잘 때리기 위해 상대의 움직임에 섬세하게 반응하는 복서의 몸짓, 토끼를 잘 잡기 위해 토끼의 작은 움직임 뿐만 아니라 주변의 지형지물, 자신의 몸 상태에까지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는 늑대의 몸짓. 그런 ‘공감(감응)’이 바로 베르그손이 말하는 본능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스타트업 대표들은 벌떼무리의 수장들 같았다. 많은 돈은 벌려면 절대로 혼자서 벌 수 없다. 무리를 짓고 무리를 잘 이끌어나가야 한다. 스타트업 대표들 중 정말 성격이 지랄맞은 대표도 있고 흔히 ‘유비’형이라고 불리는 덕장도 있었는데, 두 부류 모두 사람들을 끌고 나가는 데는 탁월했다. 회사에 사람이 많으면 당연히 갈등도 생기고 별의별 마찰도 생긴다. 하지만 전자는 군더더기없는 확실한 보상과 처벌로, 후자는 기업문화나 복지, 스톡옵션 같은 ‘기분 좋아보이는’ 여러 제도로 무리를 잘 유지해나갔다. 정말 성격이 지랄 맞은 대표도 직원들에게 민감하게 ‘감응’했다. 왜? 직원을 잘 이끌지 않으면 자기가 손해니까. 그것이 자기 이해관계를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사업을 잘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마음을 잘 읽어야 한다. 직원들이 원하는 바를 예민하게 읽어내서 계속 꿀을 모으도록 독려해야 하고, 반대로 무리에 해가 될 것 같은 벌은 해가 되기 전에 미리 추방시켜야 하며, 다른 유능한 벌을 뺏어오거나 혹은 꽃밭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다른 벌떼무리들의 움직임도 예민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결국 그 벌떼무리를 잘 이끌어서 하고 싶은 건 돈버는 것 아닌가?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예민하게 읽어내서 그것에 적절히 반응해야 한다. 많은 돈을 원할수록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읽어내어 그것을 가져다주어야 한다. 원하는 것을 줘야 지갑을 열테니까. 꿀을 모으고 싶다는 ‘절박함’이 강력할수록, 꽃을 보는 눈도 날카로워지고 꽃에서 꿀을 따는 방법도 정교해진다. 사업가들의 ‘대중감각’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김 대표는 생각이 너무 많아.” 사업할 때 그 얘기를 참 많이 들었었다. 어떤 ‘본능’적인 대표와 내 사업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그때 잠시 수업을 중개하는 플랫폼을 하고 있었는데, 수업 공간 대여료가 너무 많이 나와서 한 수업당 마진이 별로 남지 않는다는 고민을 털어놓았다. 나는 그 문제를 풀기 위해 수익모델을 다시 생각해봐야하나 고민했다. 그때 그 대표가 말했다. “공간 대여료가 문제면 싼 공간을 찾아봐. 나 같으면 잘 안 되는 카페랑 제휴하겠다.” 그 대표가 아무렇지도 않게 한 말에 쪼그라들었다. “나는 쉬운 문제도 어렵게 푸는 사람이구나.”라는 깨달음이 왔다. 나는 지금도 생각이 너무 많다. 꿀을 따고 싶으면 꽃을 찾아 꿀을 따면 되는데, 벌집에서 혼자 꿀은 어떤 맛이며 어떤 영양분일지 어떻게 따는 게 가장 효율적일지를 생각하고 있다. 생각이 많은 이유는 먹고 살만해서 그렇다. 지금 당장 꿀이 필요하지 않으니, 아니 더 정확히는 내가 꿀을 따지 않아도 우리 벌집에는 늘 꿀이 있다고 생각하니 꿀에 대한 헛된 공상이나 하고 앉아있는 것이다. 부잣집 도련님의 ‘허세’이자 '공상', ‘소심함’이다.





내 삶은 온전히 내가 책임져야 한다. 그걸 정면으로 직면하지 않으면 반드시 의존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내 삶을 전부는 아니라도 일부라도 책임져 줬으면 좋겠다는 마음. 나야 그 의존하고 싶은 마음이 아버지라는 한 대상에 고정되었지만, 그 의존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한 그 대상은 남자로, 돈으로, 회사로, 명예로, 제도로, 종교로 바꿔치기될 뿐 아닌가. 그렇게 평생 허구의 안정감을 전전하며 살게 되는 것 아닌가. 그건 걱정스러운 삶이 맞다. 그걸 직면하지도, 씨름하지도 않았기에 지금 나는 이렇게 걱정스러운 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스타트업을 했던 시기는 ‘허세’였고, 철학을 배우던 시기는 ‘착취’였다. ‘허세’가 깨지고 나는 세상이 무서워졌다. 그리고 숨은 곳이 ‘철학’이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좋았다. 부자이지만 나 역시 상처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하지만 나중에는 참 마음이 기묘했다. 나는 철학을 공동체에서 배운다. 그곳에는 매일 고되게 밥벌이를 하는 친구들이 있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친구도 있고 삶의 현장에서 일하는 친구도 있다. 몸을 쓰며 녹초가 되도록 일하는데 그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돈을 버는 친구도 있다. 나는 그 친구가 처한 삶이 구조의 문제 때문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 구조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소수의 사람들이 부를 독점하고 대물림하며 만들어졌다. 그 구조  때문에 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허세’ 부리고 철학을 배우면서도 ‘허세’ 부리며 잘 살고, 내 친구는 힘들게 일하고도 높은 물가 때문에 또 좌절한다. 나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스타트업을 하면서 세상이 무섭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나는 ‘헛똑똑이’였으니까. 스타트업 할 때 아이템 고민을 정말 많이 했다. 좋은 사업 아이템을 찾으려고 나의 ‘지성’을 있는 대로 쥐어짰다. 왜 그랬을까? 힘들기 싫어서 그랬다. 어떤 천상의 사업 아이템을 발견만 하면 그 뒤로 모든 것이 다 잘될 거라는 순진한 마음(이건 어떤 남자를 만나면 내 삶이 행복해질 거라 생각했던 마음과 같다). 그때 ‘지성’을 간절히 짜내서 그런지, 내가 생각했던 아이템 중에는 실제로 잘 된 것들이 꽤 있었다. 하지만 그때로 돌아가 그 아이템을 내가 한들 지금처럼 성공시키진 못했을 거다. 나는 계속 내 ‘허세’가 충족되나 안 되나를 기준으로 기웃댔을 거고, 공간비를 줄이면 될 문제에 수익모델을 뒤엎을 결정을 했을 거고, 직원들과 마찰이 있을 때도 감응하지 못하고 ‘왜 내 마음, 내 비전을 몰라주지?’라며 서운해 했을 거고, 절박하지 않기에 예기치 않은 큰 변수가 발생하면 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혀 죽고 싶다는 생각이나 했을 테니까. 시간이 알려주는 것들이 있다. 내가 스타트업을 그만 둔지 5년이 되어간다. 그 5년 간 그때 내가 ‘저건 빨리 포기하고 다른 아이템으로 전환해야 할 것 같은데’ 싶었던 아이템을 하던 대표는 자기가 퇴근 후에 택시 대리 뛰어가며 직원들 월급 주면서 각고의 고생 끝에 사업을 결국 잘 일궈냈다. 여행 사업을 하던 대표는 큰 투자를 받고 이제 사업을 한 단계 올려야 할 시기에 코로나가 터져서 아무 잘못도 없이 사업의 메인 수익모델을 날려야 하는 위기에 처했지만 비용을 줄이고, 있는 자원으로 다른 수익모델을 만들어서 결국 사업을 살려냈다. 그게 ‘본능’적인 것이다. 물론 나는 그 자본주의적 ‘본능’ 끝에 행복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본능’을 건너뛴 나의 인문주의(적 제스쳐) 또한 결국 기만이 아니겠는가.


본능적인 움직임은 무엇인가? 내가 가진 자원을 최대한 활용해서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는 것이다. 아니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내가 가진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당연하다. “나는 내 삶을 온전히 책임지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것은 사실 내가 늘 원했지만 외면해왔던 내 진짜 욕망 아닌가. ‘허세’도 ‘착취’도 참 부끄러운 일이다. “어른은 자기 삶을 온전히 책임져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고, 그 때문에 아버지 믿고 ‘허세’를 부리다가 세상이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쪼그라들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착취’하는 세월을 보낸 게 지금까지 내 '있는 그대로'의 삶이다. 이걸 일단 직면해야 한다. 그렇다고 내 지난 삶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내 삶의 맥락을 보았을 때, 그 각각의 시기는 다 있어야 할 시간이었다. ‘허세’의 세월이 알려준 작은 깨달음이 있다. 현타가 왔을 때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해나가면 된다는 것. '직관'은 고사하고 '본능'적으로 살아야겠다. 밥벌이와 몸. 결국 지금 내 삶의 문제는 모두 '본능'과 직결된 것들 아닌가. 꿀 따는 벌이 되고 싶으면 꿀을 따면 된다. 심지어 나는 아버지가 여분의 꿀도 물려주지 않았나. 꽃에 가서 꿀을 따자. '본능'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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