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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Jul 09. 2023

<하객 알바>

#1 아파트 단지 앞 / 늦은 오후


아파트 단지 앞 주차장 입구에 소나타 차량 한 대가 세워져 있다. 단정하게 잘 차려 입은 예원은 두리번거리며 주차장 쪽으로 오다가 소나타를 발견하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차 문을 연다.


#2 차 안


예원 : 오랜만이네. 좀 늦었다.


도준 : 아냐, 지금 출발하면 딱 맞게 도착할 것 같아.


예원은 조수석에 앉아 안전 벨트를 메고 도준은 차를 돌려 단지를 빠져 나간다.


예원 : 잘 지냈어?


도준 : 어, 뭐 잘 지냈지.


예원 : 근데 너 오늘 왜 안경 안 쓰고 왔어?


도준 : 아, 나 지난 달에 라섹 수술했어.


예원 : 아, 진짜? 옛날부터 계속 관심 있어 하더니 드디어 했네. 아프진 않고?


도준 : 어, 처음에는 좀 아팠는데 지금은 괜찮아.


예원 : 그나저나 큰일날 뻔 했네.


도준 : 뭐가?


예원 : 아니, 엄마아빠가 물어봤는데 너가 라섹한 줄 내가 모르고 있으면 좀 그렇잖어.


도준 : (헛웃음을 지으며) 그러게. 큰일날 뻔 했네. 나 화장실 간 사이에 장모님이 오늘 이서방은 왜 안경 안 쓰고 왔나 물었는데, 니가 글쎄? 이러면 딱 걸릴 뻔 했네.


예원 : 남편이 라섹한 지 한 달 됐는데 와이프가 몰라. 누가 봐도 너무나 수상하지.


도준 : 너는 뭐 별일 없었냐? 우리 얼마만에 보는 거지?


예원: 음. 내가 옷 가지러 간 게 4월이니까 세달쯤 됐네.


도준: 그래. 그 기간 동안 있었던 일 좀 서로 알아야할 것 같은데. 라섹 같은 일 안 일어나려면.


예원: 아, 맞아. 나 지난 달에 여행 갔어. 주현이랑. 삿포로로. 언니도 최근에 삿포로 갔거든. 그래서 삿포로 얘기 나올지도 몰라. 너 뭔 삿포로? 이러지 말고.


도준: 에이. 그 정도는 눈치껏 하지. 나는 회사에서 팀 옮겼다.


예원: 아 진짜? 이제 비즈니스 팀 아니야? 어디로 갔는데?


도준: 아 좀 복잡하게 됐는데, 팀이 없어져가지고 팀원들 전부 쪼개져서 다른 팀으로 갔어.


예원: 더 빡센 팀이야?


도준: 뭐 다 비슷비슷하지. 요즘 퇴사하는 애들도 많아.


예원: 그래. 스톡옵션으로 돈 많이 벌면 회사 다니고 싶겠어. 너는 퇴사 생각 없고?


도준: 나도 생각이 없진 않지. 아, 나 최근에 취미로 목공 시작했다.


예원: 아, 그것도 드디어 했네.


도준: 야, 근데 우리 무슨 급한 회의하러 가기 전에 차에서 급하게 브리핑 하는 것 같지 않냐?


예원: 그니까. 이게 무슨 짓인가 싶다.


#3 한식집 안


한식집 주차장 앞에 차를 대고 도준과 예원이 내린다. 식당 안 룸으로 들어가자, 예원의 부모(아빠, 엄마)와 예원의 언니네 부부(예리, 종민)까지 총 네 명이 앉아 있다.


도준: 장인어른, 저희가 좀 늦었습니다. 생신 축하 드립니다.


예원: 아빠, 생일 축하해.


엄마: 아이고, 이 서방. 왜 이렇게 살이 많이 빠졌어. 아주 인물이 훤해졌네.


도준: 하하. 장모님도 뭔가 좀 이뻐지신 것 같은데요?


도준과 예원은 화기애애하게 웃으면서 자리에 앉는다. 룸 문을 열고 웨이터가 들어와서 전채 요리를 테이블에 올려놓는다.


아빠: 그래, 다들 와 줘서 고맙다. 우리 큰 이 서방, 작은 이 서방은 둘 다 회사에 별일은 없고?


예리: 아빠, 종민이는 다음달이면 이직한다고 했잖아.


아빠: 그래, 그렇다고 했지. 어디로 가니?


종민: 아, 제 대학교 때 아는 선배가 제안을 해줘가지고 외국계 로펌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아빠: 그거 참 잘 된 일이구나. 그래, 외국계 로펌이 일은 좀 많이도 실력 키우기엔 좋을 거야. 그럼 우리 작은 이서방은. 아 그래. 요즘 당근마켓이 신문 기사에 자주 뜨더라. 회사가 잘 나가나봐.


엄마: 요즘 아줌마들 모임에서도 당근마켓 주식 사야된다고 난리야. 자네 장모님 할인 같은 건 없나?


도준: (웃으며) 아이구 우리 장모님은 그냥 드려야죠. 요즘 회사가 투자 많이 받아서 직원 수를 많이 늘려서 좀 어수선하긴 해요. 스톡옵션 팔고 퇴직하는 사람들도 많고요.


아빠: 에이, 그래도 젊은 사람이 벌써부터 퇴직을 하면 쓰나. 남자는 회사 안 다니면 무료해서 못 사는 거야. 우리 이 서방은 그런 생각하지 말고.


도준: 아, 저는 아직 의무 고용 기간도 남았어요.


예원: 그게 몇 년이었지?


도준: 5년.


예원: 몇 년 남았어?


도준: 이제 4년차니까 1년 남았네.


예원: 오래도 다녔다.


웨이터가 문을 열고 들어와 사시미를 테이블에 놓는다.


예리: (사시미를 한 점 먹으며) 나 이번에 종민이랑 삿포로 가서 회 먹었는데 진짜 맛있더라.


엄마: 그래, 예원이도 삿포로 갔다고 하지 않았나?


예원: 어, 그렇지.


예리: 넌 어디어디 갔어?


예원: 나 근데 1박2일로 갔다와서 그냥 거의 호텔에서 놀았어.


엄마: 예원이 너 이 서방 놔두고 혼자 여행 간 거니?


예원: 아니, 친구랑.


엄마: 너는 자꾸 이 서방 놔두고 혼자 그렇게 다니면 안 돼. 아이고, 이 서방. 혼자 심심했겠네. 너 밥도 안 하고 맨날 배달 시켜 먹지? 저 결혼하면 그렇게 하면 안돼.


예원: 아니, 요즘 배달이 얼마나 잘 나오는데.


엄마: 그나저나 너 저번에 엄마가 대봉시 보낸 건 먹어 봤어? 넌 왜 받아놓고 말이 없니?


예원: 대..대봉시?


도준: (당황하며) 아, 장모님. 대봉시 잘 먹었어요. 하하하.


예원: 아~ 대봉시. 어, 잘 먹었어. 맛있더라. 하하하.


식사 자리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계속 이어진다.


#4 한식당 앞 주차장


가족 여섯 명이 식당 밖으로 나온다. 주차요원이 와서 차키를 받아가고 다 같이 서서 차를 기다린다.


아빠: 그래, 우리 가족들 모두 다 이렇게 화목하게 잘 지내니까 아빠가 기분이 참 좋다. 내가 요즘 한시를 배우고 있는데, 거기에 이런 말이 있어. 천지지대덕왈생. 천지의 가장 큰 덕은 생, 즉 사는 것이다. 이런 뜻이야. 우리 가족들 다 삶을 즐기면서 잘 살았으면 좋겠다.


종민: 장인어른 생신 축하드립니다.


도준: 생신 축하드립니다.


예리: 아빠, 생일 축하해.


예원: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아빠를 바라본다)


아빠: 그래 우리 가족들 다 별 탈 없이 지내고. 다음 달에 우리 큰 이 서방 이직하면 또 한 번 보자. 축하 겸 식사 한번 해야지.


종민: 예, 장인어른. 그때 뵙겠습니다.


엄마: 그래. 예원이는 엄마아빠한테 연락 좀 하고. 니들은 니들끼리 재밌는지 연락을 너무 안 하드라. 무소식이 희소식이겠지만.


예원: 알겠어. 연락 할게 엄마.


엄마: 그래, 이 서방 밥 잘 챙기고. 너 너무 혼자 싸돌아다니지 말고.


예원: 알겠어.


흰색 소나타가 나와서 도준과 예원이 차에 탄다.


예원: (창문을 내리며) 응, 그럼 우리 이제 그만 가볼게.


도준: 저희 가보겠습니다.


엄마: 그래, 조심히 들어가고.


아빠: 이 서방 운전 조심하게.


#5 차 안


한 동안 둘 다 말이 없다.


예원: 수고했다, 연기하느라.


도준: 아, 대봉시 위험할 뻔 했네.


예원: 와, 큰일날 뻔 했어. 하필이면 대봉시가 뭐야. 나 뭔가 했잖아. 엄마가 보냈었어?


도준: 어, 한 2주 됐나. 근데 장모님이 대봉시 보냈다고 너한테 연락하긴 좀 그래서 그냥 있었지.


예원: 잘 했어. 어떻게 그런 걸 다 연락하냐.


도준: 근데 의외로 라섹은 안 물어보시대.


예원: 우리 가족은 너한테 관심 없다니까.


도준: 야, 근데 평생 안경 쓰다가 처음 안 쓴 건데 못 알아보는 건 너무 한 거 아냐?


예원: 우리 가족 성향 모르냐. 남한테 관심 없다니까.


도준: 괜히 아까 올 때 둘이서 브리핑했네.


예원: 그러게 말이야. 사실 가족들은 별 관심 없어. 우리도 그렇잖아.


도준: 그건 글치.


예원: 근데 언제까지 우리가 이렇게 입 맞출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도준: 그러게.


예원: 우리가 따로 사는 기간이 길면 길어질수록 이게 티가 안 날 리가 없잖아. 우리 엄마는 이미 대봉시에서 뭔가 이상하다고 눈치 챘을 수도 있어.


도준: 근데 뭐 어떡하겠어.


예원: 이놈의 가족모임.


도준: 야, 근데 담달에 엄마 환갑이잖어.


예원: 응.


도준: 외갓집 식구들 전부해서 여행간다. 2박 3일로.


예원: 아 진짜?


도준: 너 갈 수 있겠냐?


예원: 그럼 뭐 어떡해. 가야지.


도준: 그래, 이번엔 니가 나 좀 도와주라.


예원: 그래. 품앗이네.


도준: 또 가족 모임 뭐 있지?


예원: 그 다음달에는 우리 엄마 생신이잖아. 그 담달에는 아버님 생신.


도준: 우린 이제 가족 모임 때마다 만나겠네.


예원: 무슨 하객 알바 같다.


도즌: 이게 하객 알바지. 가족 앞에서 가족인 척 연기하는 거니까.


예원: 참 난 이제 가족이 뭔지 모르겠다.


도준: 나도 그래.


#6 아파트 단지 앞


도준이 단지 앞에 차를 세운다.


도준: 안 데려다 줘도 돼?


예원: 어, 나 사는 데 여기서 안 멀어. 걸어가면 돼.


도준: 그래, 조심히 들어가라.


예원: 그래. 너도 고생했다. 다음 알바 때 보자.


도준: 그래.


예원은 차에서 내린다. 어느 덧 껌껌한 밤이 되었다. 예원은 핸드백을 쥔 채 고개를 숙이고 단지 반대편으로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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