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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Jul 15. 2019

8. 국가의 착취가 만들어낸 '남성성'의 신화

 싸움 못하는 남자. 능력 없는 남자 친구. 돈 못 버는 아버지.
 싸움 못하는 여자. 능력 없는 여자 친구. 돈 못 버는 어머니.


 분명 같은 수식어인데, 명사가 남자냐 여자냐에 따라서 위의 두 줄은 다른 느낌으로 읽힌다. '싸움 못하는 여자, 능력 없는 여자 친구, 돈 못 버는 어머니'는 상대적으로 무덤덤하게 느껴지는 반면, '싸움 못하는 남자, 능력 없는 남자 친구, 돈 못 버는 아버지'는 왠지 모르게 위축된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물론 '뚱뚱한 남자'와 '뚱뚱한 여자'가 불러일으키는 느낌이 다른 것처럼, 여성에게 붙었을 때 훨씬 부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느 수식어들도 많다. 이처럼 남자와 여자에 붙였을 때 느낌이 달라지는 수식어들을 잘 살펴보면, 우리 사회가 남성, 여성에게 각각 어떤 이미지를 요구하고 있는지 쉽게 눈치챌 수 있다.


 '싸움 못하는 남자, 능력 없는 남자 친구, 돈 못 버는 아버지'가 유독 부정적이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남성들에게 신체적으로 강하고, 능력 있고, 돈도 잘 벌길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는 '신체적으로 강하고 능력 있고 돈도 잘 버는 남성'은 사랑 받을 확률이 높은 반면, '신체적으로 약하고 능력 없고 돈 못 버는 남성'은 사랑 받지 못할 확률이 높다. '싸움 못하는 남자, 능력 없는 남자 친구, 돈 못 버는 아버지'라는 문장이 부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도 바로 이 사회에서 사랑받을 수 없을 것이라는 존재적인 위협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능력이 없고 돈을 못 번다'는 것은 남녀 구분없이 사랑받지 못할 조건이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글 첫부분에 쓴 두 문장은 분명 다른 심상을 불러일으킨다. 돈 못버는 아버지 혹은 남편을 떠올리면 고개숙인 가장의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돈 못버는 어머니 혹은 아내를 떠올리면 그 정도로 뚜렷한 이미지는 떠오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뚱뚱한 남자'도 분명 부정적인 이미지이지만, '뚱뚱한 여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만큼 우울하고 어두운 느낌은 들진 않는다. 돈 못버는 남자, 뚱뚱한 여자가 나쁘다고 가치판단을 하는 게 아니라, 현재 우리 사회가 남성, 여성에게 바라는 이상향이 그렇다는 것이다.


고개 숙인 남성

 

 여성과 남성의 성을 생물학적으로 결정하는 것을 섹스(Sex), 사회적으로 결정하는 것을 젠더(Gender)라고 한다. 예를 들어 여성의 성기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주변 사람들이 완전히 남자라고 착각하여 길러진 사람은 섹스는 여성이지만 젠더는 남성이라고 할 수 있다(실제로 잠복 고환을 가지고 태어나 남성 호르몬 수치는 일반 남성에 가깝지만 여성으로 착각되어 길러져 본인을 여성으로 규정하는 사람도 있다). 좀더 간단하게 말하자면 섹스는 '남성/여성', 젠더는 '남성성/여성성'이다. 그런데 이 남성성/여성성이라는 말은 참 고약하다. 남성성(男性性)과 여성성(女性性)의 정의를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남성의 성질/여성의 성질'이다. 그런데 남성과 여성의 고유한 성질이라는 게 과연 있을까? 그렇다면 그 성질에 부합하지 않는 남성/여성은 남성 또는 여성이 아닌 것인가? 물론 남성성/여성성을 생물학이나 진화심리학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도 있다. 그런 시도는 사회학적으로 결정되는 남성성/여성성의 영역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에겐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는 '영원한 남성성, 영원한 여성성'의 영역도 있다는 주장으로 귀결되곤 한다. 나는 그런 주장에도 반대하는 바이지만, 이 연재에서는 일단 사회적으로 결정되는 젠더의 영역에 한해서 다룰 예정이다.




 우선은 남성성에 대해서 알아 보자. 지금까지의 역사가 남성 중심의 역사였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여성성은 남성성을 떼어놓고는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남성성이라는 단어를 보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강하고 용맹하며 독립적이고 리더십 있는' 이미지를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살펴 보면 남성성의 이미지는 사회의 변화에 따라 계속해서 변해왔다. 그 남성성의 역사를 살펴보면 남성성은 사회적으로 구축된 이미지일 뿐, 남성이 태어날 때부터 타고나는 성질이 아니라는 사실이 와닿을 것이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와 지금의 자본주의 시대에서 이상적으로 생각되는 남성의 모습은 전혀 다르다. 글의 초입에서도 이야기했듯,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능력 있고 돈을 잘 버는 남성'이 이상적인 남성으로 여겨진다. 그런 사회적인 압박이 있기 때문에 능력 없고 돈을 못 버는 남성은 상대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돈을 잘 버는 상인이나 육체적으로 강인한 무인은 지금처럼 높은 위상을 차지하지 못했다. 조선시대의 이상적인 남성상이 무엇이었겠나? 바로 세속의 일에는 무관심한 채 학업에만 열중하는 '선비'다. 지금과 다르게 조선시대에는 남성이 육체를 단련하거나 생계 활동에 열중하는 것을 천박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요즘 같은 사회에서 조선시대 선비처럼 청렴한 생활을 유지하며 골방에서 책만 보는 성인 남성은 그다지 환영받지 못한다.


 남성성은 시대 뿐만 아니라 지역에 따라서도 다른 양상을 띈다. 자본주의에 의해서 경계가 모호해지긴 했지만, 서양에서의 남성성과 동양에서의 남성성은 여전히 약간 결이 다르다. 또한 동시대라고 할지라도 아프리카의 원시 부족이 생각하는 남성성과 우리가 생각하는 남성성은 다를 것이다. 꼭 국가 단위가 아니라 우리가 삶을 살면서 소속되는 작은 사회들만 봐도 남성성은 계속 변화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근에 몇몇 남성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많은 남성들이 학창시절에 힘이 센 아이에게 맞거나 위축되었던 경험을 상처로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는 분명 여성들 사이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상처로, 학창시절 남성들 사이에서는 '육체적인 힘'이 꽤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하지만 사회생활이 시작되면 육체적인 힘보다는 돈을 잘 버는 능력이 훨씬 중시된다. 자본주의 사회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이상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가끔 동창회를 가면 남자 동기들 사이에서 미묘한 권력 변화를 느낀다. 중학교 때 일진이었던 친구가 지금 의사가 된 친구의 눈치를 본다던지, 반대로 그때는 찐따였지만 지금은 부자가 된 친구가 예전에 자기를 괴롭히던 일진을 알게모르게 멸시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남성성은 그가 속한 사회의 맥락에 따라서 달라진다. 그래서 젠더 연구로 유명한 호주의 사회학자 R. W. 코넬은 남성성은 하나의 본질적인 속성이 아니며 다수의 상황적 속성을 갖는다는 의미로 '남성성(Masculinity)'이 아닌, '남성성들(Masculinities)'이라는 개념을 주장하기도 했다.


남성성은 본래적이고 고정적인 성질이 아니다.

  


 

 남성성이 사회에 따라 달라져 왔다는 사실은 이 세상에 '진짜 사나이'는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더 던져봐야 한다. 대체 누가 그 남성성은 변화 시켜왔는가? 젠더가 사회에 의해 결정된다면, 그 사회란 무엇인가?


 글의 초반부에서 '신체적으로 약하고 능력 없고 돈 못 버는 남성'이라는 구절이 부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그것이 사회에서 사랑받지 못하는 조건들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바꿔 말하면 이 사회는 '신체적으로 강하고 능력 있고 돈 잘 버는 남성'일 수록 불특정 다수에게 사랑받기 유리하다는 것이다. 어떤 사회에서든 많은 대중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권력에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1명밖에 없는 사람과 1만명을 거느린 사람이 어떻게 영향력이 같을 수 있겠는가? '사랑'이라는 단어가 와닿지 않는다면, '존경'이나 '인정' 같은 단어로 대체해보자. 온 국민의 존경을 받는 왕은 막강한 권력을 지닐 수밖에 없다.


 이처럼 우리는 대중에게 사랑받기 위해, 또 권력에 가까워지기 위해 사회가 만들어놓은 하나의 이상향에 근접하려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다. 그 하나의 이상향을 남성의 경우 남성성, 여성의 경우 여성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전 글에서도 밝혔듯이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질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연기를 하지 않는 이상 동일한 존재가 될 수는 없다. 그래서 사회의 기준에 부합하기 위해서 애를 쓰면 쓸 수록 우리의 영혼은 지치고 상처받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엄청난 압력으로 우리를 동질성의 늪으로 몰아넣는다. 왜? 그것이 사회가 다른 사회에 대해 권력을 유지하는 동력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선비'를 이상적인 남성상으로 규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당시 중국이 동아시아 정치의 패권을 쥠에 따라 유교적 사상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지금 시대에 '돈 잘 버는 능력'이 중요한 덕목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자본주의가 세상을 휩쓸면서 국제적 패권이 자본의 규모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전쟁의 양상이 자본이나 과학이 아닌, 물리적인 힘의 대결로 이루어졌던 고대 시대에는 '육체적 강인함'이나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함' 따위가 더 온전한 남성성으로 여겨졌다. 다시 말해 남성성은 국가가 '부국강병'을 위해 남성 국민들에게 요구했던 자질에 지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다른 국가와의 대립 또는 정치적 필요에 따라 국민들에게 다양한 남성상을 요구해온 주체는 바로 '국가'다. 여기서 잠시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보자. 국가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한국은 한국, 일본은 일본이라는 테두리, 즉 한국은 '내 편'이며 다른 국가들은 '네 편'이라는 구분이 있지 않는 한, 국가는 존재할 수 없다. '내 편'과 '네 편' 구분, 즉 적과 동지의 구분이 국가의 필요 조건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앞서 살펴봤듯이, 본래적으로 이질적인 인간 존재 사이에서 '내 편'이라는 허상의 테두리를 긋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 편'들 사이에서 공유할 수 있는 동질성(그것이 허구일지라도)이 필요하다. '내 편'에 속한 사람들을 하나의 동질성으로 묶지 못하면 언제라도 '네 편'으로 떠나가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들 사이에 동질성이라는 잣대를 들이미는 순간 필연적으로 권력 구조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내 편'이 추구하는 동질성에 가까울수록 더 이상적인 사람으로 간주되고, 그럴 수록 '내 편' 안에서 더 많은 사랑과 인정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정리해서 말하자면 국가의 필수 조건은 1) '내 편'과 '네 편'의 구분 2) 하나의 동질성을 중심으로 한 권력 체계라고 할 수 있다.  


국가는 과연 아름다운가?


정치적인 행동이나 동기의 원인으로 여겨지는 특정한 정치적 구별이란
적과 동지의 구별이다. - 칼 슈미트


 헌법학자였던 칼 슈미트의 말처럼 적과 동지가 구분되는 순간 정치는 시작된다. 정치란 무엇인가? 정치는 한정된 자원을 둘러싼 경쟁이다. 예전에는 이 경쟁을 총, 칼 들고 했다면, 요즘은 외교라는 '총성없는 전쟁'을 통해 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 기본적으로 정치는 적과 동지 간의 싸움이다. 적과 동지가 구분되는 순간, 적을 치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그런 절체절명의 순간에 국가는 당연히 '부국강병'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우리 편을 더 강하고 더 부유하게 만들어야 우리가 살고 적이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적과의 전쟁을 앞둔 권력자는 당연히 전쟁에서 이길 확률이 높은 병력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게 물리적인 전쟁이라면 자기 목숨을 버릴 기세로 적을 공격하는 살인 무기같은 전사들을, 그게 자본주의적인 전쟁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본을 불려나갈 능력이 출중한 인재를 양성할 것이다. 이처럼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의 조건은 '진정한 남성'이라는 그럴싸한 이미지로 포장되어 사회 곳곳에서 권장된다. 그래서 R. W. 코넬은 '남성성은 본질적으로 정치학적 영역'이라는 말을 하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남성성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군대다. 군대는 존재 이유자체가 '적과의 싸움'인, 그야말로 철저히 정치적인 조직이다. 그래서 군대는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군인 개개인의 단독성을 깡그리 말살한 채 모두를 '우수한 전사'라는 하나의 동질성에 쑤셔넣는다. 군대에서 가장 중요시 하는 것은 '복종'이다. 어떤 남성으로부터 훈련소에 처음 들어가자마자 '복종'이라고 외치며 경례를 하는 것부터 배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잇다. 복종이 함의하는 바가 무엇인가? 복종이란 나의 단독성을 버리고 권력자가 요구하는 동질성에 맞추겠다는 의지다. 하지만 전 글에서도 이야기했듯, 아무리 '복종'을 한다고 해도 내 본연의 단독성을 말끔히 지우고 완벽하게 동질성에 부합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처럼 군대는 나의 단독성과 동질성에 대한 억압이 가장 극렬하게 충돌하는 곳이다. 그래서 남성들 중에서 군대에 관련된 크고 작은 트라우마가 없는 사람은 드물다. 군대는 아마도 한국에서 가장 정치적이고 남성적인(남성성에 대한 강압이 센), 그래서 야만적인 공간일 것이다.


군대. 가장 정치적이고 가장 야만적인 공간.


 군대만큼은 아니라도, 국가가 존재하는 이상 사회 전반에서 남성성에 대한 요구는 끊임없이 되풀이된다. 여성성에 대한 요구 또한 물론 거세지만, 여성성은 국가의 강압 이외에도 남성집단의 강압이라는 항을 하나 더 추가해서 설명해야 하므로 따로 다루도록 하겠다. 또한 국가가 아니라도, 국가를 모델로 하는 집단, 즉 적과 동지의 구분이 있고, 권력자 중심의 동질성을 추구하는 집단에서는 어디에서라도 남성성에 대한 요구를 찾아볼 수 있다. 가족 내에서, 학교의 또래집단에서, 회사 내에서 남성에게 요구하는 특정 자질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군대에서와 마찬가지도 사회에서도 이러한 남성성의 기준에 부합하는 사람은 극히 소수다. 세상에는 몸이 약하게 태어난 남성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버는 능력이 탁월하지 않은 남성도 당연히 많다. 하지만 군대에서 많은 남성들이 트라우마를 겪듯, 사회가 요구하는 남성성에 부합하지 못하는 남성들은 많은 상처와 그에 따른 피해의식을 입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피해의식은 자신보다 약한 남성, 또는 여성과 소수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로 이어진다. 남성들의 피해의식과 혐오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자세하게 다루도록 하겠다.




 국가가 존재하는 한, 남성들을 옭아매는 남성성의 신화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국가 사회에서 살고 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된단 말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쉽지 않다. 하지만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원주민 공동체에 대한 피에르 클라스트르의 연구를 살펴보면 작은 실마리를 얻을 수는 있을 것이다.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에 따르면 남미에 분포하는 원주민 부족들 사이에서도 남성성에 대한 요구는 있었다. 국가가 존재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남성은 사냥, 여성은 수렵채집, 육아를 담당하는 등 성역할의 구분은 있었고, 사냥을 잘하기 위해서 남성들에겐 강인하고 용맹한 자질 등이 기대되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와는 달리, 원주민 공동체에서는 사냥을 잘 하지 못하는 약한 남성들(심지어 동성연애를 하는 남성들도)이 소외당하거나 무시받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즉, 남성성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회에서 사랑받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결정적 차이는 어디서 발생했을까? 원주민 부족은 사냥을 잘하는 남성이 사냥감을 많이 잡았다고 해서 독점하는 사회가 아니었다. 오히려 자기가 잡은 사냥감은 자기가 먹지 못한다는 규칙이 있었기 때문에 사냥을 많이 했다고 별다른 이득을 볼수가 없었다. 또한 원주민 부족은 다양한 의식을 통해 힘이 강한 자가 권력을 휘두르지 못하도록 제약을 뒀다. 즉, 동질성에 부합하더라도 권력을 쥐지 못하는 사회 구조를 만든 것이다. 이로써 원주민 부족은 동질성과 권력을 떼어놓을 수 있었다.

 

 국가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1) 내 편과 네 편의 구분 2) 하나의 동질성을 중심으로 한 권력 체계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는 거꾸로 내 편과 네 편을 구분하지 않고, 동질성을 권력과 떼어 놓으면 국가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앞선 글에서 내 편과 네 편의 구분은 허상이라는 주장을 했다. 이질성을 기준으로 편가르기를 하지 않고, 내 편이 요구하는 이상향에 부합한다고 사랑과 권위를 쥐어주지 않는다면, 동질성에 대한 압박은 자연스럽게 사라질 수밖에 없다. 아마도 남성성이라는 일그러진 신화는 그제서 막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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