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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Jul 18. 2019

9. '강한 남성'이 되지 못한 상처

남성성, 피해의식, 그리고 혐오

 어느 날 남자 친구와 함께 지하철을 타러 가는데 반대쪽에서 오던 남성이 남자 친구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흔히 말하는 '어깨빵'이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아 피차 정신없는 상황이었고 살짝 부딪힌 정도였기 때문에 난 실수겠거니 하고 그냥 가던 길을 가려고 했다. 그런데 남자 친구는 '저 사람은 왜 사과 안 해? 진짜 무개념이다'라고 화를 내며 그 상황을 상당히 불쾌하게 받아들였다. 이후로도 그런 적이 몇 번 있었는데, 그 당시 난 그가 왜 그런 (내가 보기엔) 과민한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몸집이 작았던 나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면 늘 사람들과 부딪혔다. '어깨빵'을 당한 경험으로만 치면 내가 남자 친구보다 몇 배는 많을 것이다. 물론 누군가가 나를 의도적으로 밀치거나, 세게 밀쳐놓고도 사과하지 않는다면 나도 화가 날 것 같다. 하지만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지하철이나 길거리에서 의도치 않게 살짝 '어깨빵'을 당하는 건 나에게는 그렇게 화가 날 일은 아니다. 그래서 남자 친구의 반응이 의아스러웠는데, 알고 보니 생각보다 많은 남성들이 '어깨빵'에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것 아닌가? 그러다 어떤 자리에서 몇몇 남성들과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다가 어깨빵에 과민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남성성'과 관련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들이 말하길 남성들은 (설령 그것이 어깨빵처럼 작은 사건일지라도) 다른 남성들과 신체적으로 대립하는 상황에 맞닥뜨리면 무의식적으로 위협을 느낀다고 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깊게 파고들어가다 보니, 그 위협의 원형은 과거 자기보다 힘센 사람(친구, 불량배, 형 등) 앞에서 맞거나 주눅 들거나 반항하지 못했던 경험이었다. 다른 남성과 시비가 붙을 것 같으면 무의식적으로 그때의 경험이 떠올라 과도하게 긴장하고, 설령 실수라고 해도 사과받지 않으면 무시당하는 기분이 든다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어깨빵을 당해도 별로 기분 나쁘지 않았던 이유는 난 그들과 달리 신체적인 힘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어서라는 걸 알았다. 그건 내가 힘이 세서가 아니라, 여성으로 자랐기에 한 번도 '힘이 셀 것'을 요구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힘이 세다'는 특성은 남성들 사이에서는 사랑받기 위한(권력을 쥐기 위한) 조건이지만, 여성들 사이에서는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반대의 경험도 있다. 어떤 모임에서 오랜만에 본 여성이 나에게 '왜 이렇게 얼굴이 상하셨어요?'라고 말해서 기분이 팍 상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얘기를 남자친구에게 하니, '그건 네가 일을 열심히 해서 피곤해보인다는 말 아니야?'라고 되묻는 게 아닌가. 내가 외모에 관련된 이야기를 듣고 유독 발끈한 이유도 피해의식 때문이다. 사회가 남성들에게 '육체적인 힘'을 요구하듯 여성들에게는 '아름다운 외모'를 요구하기에 외모에 관한 부정적인 말을 마치 '넌 앞으로 사랑받지 못할거야'라는 위협적인 말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처럼 사회 또는 부모가 요구하는 이상향에 부합하지 못해 상처받았던 기억은 피해의식으로 남아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힌다. 피해의식이 있는 사람은 예전처럼 또 상처받을 것을 걱정해 과거와 조금이라도 비슷한 상황에 놓이면 매우 예민하고 방어적인 태도를 보인다. 가난에 피해의식이 있는 사람은 돈이 없으면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학벌에 피해의식이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식이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하면 인생이 끝날 것처럼 생각한다. 남성성, 여성성도 사회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이상향이기 때문에, 거기에 부합하지 못해 상처받았던 경험은 우리에게 피해의식을 남긴다. 물론 사회가 남성, 여성에게 요구하는 특성이 다른 만큼, 남녀는 일반적으로 다른 지점에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남성들은 헬스장에서 몸만들기에 몰두하거나 격투기나 스포츠 관람에 탐닉하는 반면, 여성들은 화장 등 꾸미기에 몰두하고 패션이나 뷰티 관련 컨텐츠를 더 좋아한다. 이는 일반적으로 남성은 '육체적 강인함'에 대한 동경과 피해의식, 여성들은 '아름다운 외모'에 대한 동경과 피해의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남성과 여성. '나'는 어디에 있을까.




 지난 글에서 이야기했다시피, 국가(권력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국민들로 하여금 개인의 고유한 특성을 억누르고 국가가 원하는 동질성에 끼워 맞추길 요구한다. 시대에 따라 세부적인 내용은 바뀌어 왔지만, 그 중 '남성성'은 국가가 가장 오랜 시간 동안 남성들에게 강요해온 동질성이었을 것이다. 국가는 자신이 제시한 이상적인 남성상에 부합하는 남성에게는 사랑과 권력을 주고 그렇지 못한 남성은 배척하는 식으로 우리를 길들여왔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나 어렸을 적만 해도 남자 어린아이가 울면 '고추 떼버려라'라고 윽박지르는 일이 많았다. 학창시절 때에도 감수성이 섬세하거나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 남자아이에겐 '너 기지배냐?'라는 조롱이 쏟아지곤 했다. 이 말들이 함의 하는 바는 사회가 규정한 남성적인 행동에서 벗어나면 넌 우리편(고추가 있는 머스마)이 아니라는 뜻이다(두 조롱이 여성혐오적 발언이라는 건 잠시 덮어두고 가자). 이처럼 우리는 내 편에서 쫒겨나지 않기 위해, 더 나아가 그 안에서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해, 내 편이 규정한 동질성에 낑낑대며 영혼을 구겨넣는다. 그리고 그 영혼을 구겨넣는 과정에서 크고작은 상처와 피해의식이 생긴다.


 동질성에 부합하지 못한 사람은 내 편으로부터 멸시와 조롱을 받기 때문에 당연히 상처가 생긴다. 어렸을 때 힘센 친구의 빵셔틀을 했던 남성은 당연히 '힘'에 대한 상처와 그에 따른 피해의식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면 동질성에 잘 부합해온 사람은 피해의식이 없을까? 그렇지도 않다. 어렸을 때부터 공부를 잘했던 사람은 학벌에 대한 컴플렉스는 없을 수 있어도, 공부를 못하는 것에 대해 큰 두려움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다. 그 사람이 힘든 공부를 이겨낼 수 있었던 동력은 바로 그 두려움이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학벌이 좋은 부모 중에 자식이 공부 못하는 꼴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다시 말하면, 동질성에 부합하지 못한 사람은 과거에 멸시당한 경험을 기억하고, 동질성에 잘 부합해온 사람은 미래에 멸시당할 수 있다고 상상한다는 차이만 있을 뿐, 둘 다 내 편에서 쫒겨나는 것이 두려워 동질성에 집착해왔다는 점에서 같다.


 동질성은 쉽게 말하면 '넌 이래야 해'라는 명령과도 같다. '넌 이래야 해'라는 압박을 받아온 인간은 필연적으로 크고작은 피해의식이 생길 수밖에 없다. 나아가 그런 피해의식을 지닌 사람은 자신이 받아온 압박을 내면화해 다른 사람에게 투사한다. 군대에서 선임에게 괴롭힘을 많이 당한 군인일수록 후임을 괴롭힐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 그 예다. 자신은 선임한테 이렇게 많이 당했는데 후임이 꿀빨고 있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는 것이다. 또 부모님에게 성공에 대한 압박을 많이 받은 사람일 수록 삶을 자유롭게 사는 사람들을 꼴 보기 싫어한다. 의사와 법조인 같은 전문직 사람들과 대화해보면 공부를 열심히 안 한 사람들을 멸시하는 발언을 심심찮게 듣는다. 이런 혐오의 기저에는 피해의식이 짙게 깔려 있다. 즉, 나도 동질성에 맞추기 위해 꾹 참고 살았으니 너도 그렇게 하라는, 그렇지 않을 거면 내가 상처받았던 것처럼 너도 상처 받으라는 심리다.


동질성에 대한 압박의 뒷면은 내 편에서 쫒겨날 것이라는 두려움이다


 남성성에 대한 피해의식도 마찬가지다. 남성성은 기본적으로 '힘'에 대한 압박이라 할 수 있다. 그게 육체적 힘이든 자본주의적 힘(돈 또는 권력)이든, 힘에 대한 피해의식이 많은 사람일 수록 힘이 센 사람을 동경하고 힘이 약한 사람을 멸시한다. 예를 들어 사회가 규정한 남성성에 부합하고 싶었던 남성에게 학창시절 힘이 약한 무리에 속했던 경험은 상처일 것이다. 그러한 상처는 그의 무의식에 힘 센 사람에 대한 공포와 힘이 약한 사람에 대한 멸시를 새겨 넣는다. 남성 무리에서 유독 서열 문화가 뚜렷하게 나타나는 이유도 이와 같이 많은 남성들이 힘에 대한 피해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남성성에 피해의식이 있는 사람은 과거의 상처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강자 앞에서는 고분고분하다. 하지만 약자 앞에 서면 그 동안 억눌렸던 자신의 남성성을 폭발시키고 싶어한다. 어찌됐든 그는 사회가 규정한 남성상에 부합하고 싶은 욕망이 끓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사 앞에서는 찍 소리도 못하는 가장이 집에 와서 아이를 패거나, 친구들 사이에선 얌전한 남성이 자기 여자친구에게는 지배적이고 강압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부모님에게 자주 혼나는 아이가 자기 집 강아지를 학대하는 것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강한 남자'가 되고 싶은 욕구를 강자에게 풀 순 없으니 약자에게 풀자는 심리다. 도덕적 잘잘못을 떠나, 이는 남성성에 대한 압박이 남성을 통해 다른 약자들에 대한 압박으로 번져나가는 메커니즘을 보여준다.


 앞서 이야기 한것처럼 '넌 이래야 돼'라는 압박을 많이 받은 사람은 남에게도 같은 잣대를 들이밀기 쉽다. '남자는 이래야 돼'라는 압박을 많이 받은 남성일수록 여성에게 '여성은 이래야 돼'라는 요구를 하는 경우가 많다. 즉, '여성은 이래'라는 무지의 선입견을 넘어, '여성은 이래야 돼'라는 당위의 선입견을 갖고 있는 사람은, 남성성에 대한 피해의식이 많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선입견이 당위가 되는 메커니즘 또는 이질성이 혐오가 되는 메커니즘은 1) 내 편과 네 편의 구분 2) 동질성에 대한 피해의식 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동질성에 대한 피해의식은 어떻게 줄일 수 있단 말인가? 가장 좋은 것은 동질성에 대한 사회의 압박을 줄이는 것이다. 하지만 지난 글에서 알아봤듯, 국가라는 권력 체계가 있는 이상, 동질성에 대한 압박은 절대 완벽히 없앨 수는 없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사회의 이상향에 부합하기 위해 애쓰다가 크고작은 상처를 입어버렸다. 특히 동질성에 대한 압박이 심한 한국 같은 사회에서, 이에 대한 피해의식이 없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면 우리는 이 피해의식을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남성성에 대한 피해의식을 자기 나름대로 극복한 남성을 한명 알고 있다. 남성성에 대한 압박이 특히 심한 시골에서 자란 그는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하고 왜소해서 '힘'에 대한 컴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특히 학창시절에 불량배에게 돈을 뜯겼는데 제대로 항거하지 못했던 경험은 그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성인이 된 후에도 길거리에서 다른 남성과 시비가 붙을 것 같은 상황이 되면 과도하게 그를 위축시켰다. 그런 컴플렉스를 극복하고자 헬스를 열심히 해서 몸을 만들기도 했지만, 자기보다 힘 세 보이는 남성 앞에서 주눅드는 기질은 잘 바뀌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는 복싱을 하기로 결심한다. 자기가 가장 두려워하는 상황, 즉 다른 남성과 신체적으로 대립하는 상황에 스스로 직면하기로 한 것이다. 물론 신체적인 조건이나 운동 신경 때문에 몇년 동안 맞기만 하고 제대로된 시합을 하지도 못했지만, 결국 그는 실력이 좋아져 생활체육대회에서 몇번 우승을 거뒀다. 언제가 터닝포인트냐고 물었더니 그는 우승과 상관 없이, 어느 날 계속 맞다가 때리는 상대도 자기만큼이나 쫄아있다는 게 보였는데, 그 순간 '힘 세 보이는 사람도 사실 별 거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의 남성성에 대한 피해의식은 많이 해소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실제로 그는 더 이상 강자 앞에서 그다지 위축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여성과의 관계에서도 '강한 남성'이어야 한다는 강박을 많이 내려놓았다. 동질성에 대한 압박에서 벗어난 그는 훨씬 더 훌륭한 남성이 되었다.

 

강한 남자가 되고 싶다면 강자 앞에 서 봐야 한다.




 요즘 페미니즘이 부상함에 따라 남성들도 페미니즘을 지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나도 페미니스트로서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남성이 있다면 환영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섣불리 남성들에게 페미니즘을 지지하라고 권하고 싶지 않다. 다른 사람의 상처를 볼 수 있는 건 자기 상처가 다 치유된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이니까. 나는 남성들에게 본인의 상처를 먼저 되돌아보길 권하고 싶다. 남성성에 대한 피해의식 때문에 강한 자에게는 위축되고 약한 자에게는 고압적으로 구는 사람은, 도덕적 판단을 떠나 영원히 자괴감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남성성의 상처는 '강한 남자가 되지 못함'에서 비롯되는데, 약자 앞에서 강자 코스프레를 한다고 진짜 강한 남자가 되는 건 아니니 말이다. 오히려 남성성에 대한 피해의식을 극복하려면 내 지인이 용감하게 복싱에 도전했듯 자신을 위축되게 만들었던 강자 앞에 서 봐야 한다. 강자 앞에서 위축되지 않는 남자가 진짜 '강한 남성'이니 말이다.


 물론 서열이 공고한 남자 무리에서 '강자'에 맞서 싸우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아이를 때리지 전에 상사에게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고, 여자친구를 통제하기 전에 남자들 무리에서 할 말은 하고, 강아지를 괴롭히기 전에 부모님에게 반항을 하면, 남성성에 대한 상처는 서서히 아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아가 남성성이라는 동질성에 본인을 끼워맞추길 바라는 사회에 저항하고, 이 세상에 '내 편'과 '네 편'의 구분은 없다고 국가에 주장할 수 있다면 난 그보다 '강한 남성'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현재 페미니즘은 '네 편'인 남성들과 싸우고 있지만, 남성이 남성성에 대한 저항한다는 건 '내 편' 안에서 싸워야 함을 의미한다. 원래 내부총질이 더 어려운 법이니, 남성이 남성성에 저항하는 싸움은 한층 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우리를 동질성에 쑤셔넣는 권력에 저항하는 전선에서 함께 만날 수 있길 바란다. 여성들은 여성들을 위한 싸움, 남성은 남성들을 위한 싸움을 하다보면 언젠간 우리의 적은 같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으리라. 그때 우린 진짜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싸움이 곧 너의 싸움이자 우리의 싸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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