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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Apr 27. 2024

'믿어준다'는 것

“그런 말 하지마. 넌 네 몫을 다 했어. 이제 내 몫이야. 걸음마 걷는 애 넘어질까봐 저 멀리서 뛰어오는 엄마처럼 이제 하지 않아도 된다고. 날 믿어주지 않는 건 너야.”

“알아. 미안해. 내가 그게 너한테 참 안됐었어."


이 말을 다른 사람에게서 들을 줄 몰랐다. 이건 내가 평생 아버지에게 가지고 있었던 마음 아니던가. “아빠, 이제 나도 잘 살 수 있어.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날 믿어주지 않는 건 아빠라고.” 이제 조금은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을까? 누군가를 걱정하는 마음을. 누군가를 ‘믿어준다’는 것의 의미를.





‘믿어준다’는 것은 무엇인가? 몇 년 동안 나를 끈질기게 따라붙었던 화두다. 몇 년 동안 고민하고 몇 개의 글을 썼지만 늘 잡을 듯 말 듯 잡히지 않는 화두였다. 이제야 왜 이 화두가 나를 끈질기게 따라붙었는지, 그리고 왜 그토록 오랜 시간 이 화두를 풀 수 없었는지 알았다. 누군가가 나를 ‘믿어주고’ 있었지만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고, 나 또한 누군가를 ‘믿어주고’ 싶었지만 어찌할 바를 몰랐기 때문이다. ‘믿는다’와 ‘믿어준다’ 사이에서 계속 갈팡질팡 했다. 이제야 그 모든 결을 칠 수 있게 되었다.


‘믿는다’는 사랑의 마음이 아니다. 누군가 나에게 사랑의 바로미터가 무엇인지 물어본다면, 나는 ‘그 사람이 얼마나 걱정되는가’라고 대답할 테다. 사랑은 ‘너’를 걱정하는 마음이다. 우리의 관계가 흔들릴까봐 깨질까봐(그래서 ‘내‘가 혼자가 될까봐) 안절부절하는 마음이 아니라, (내가 네 곁에 있든 없든) 네가 혹여라도 아플까봐 상처받을까봐 불행해질까봐 걱정하는 마음이다. 그게 사랑의 바로미터다.


‘믿는다’는 ‘너’를 걱정하는 마음이 아니다. 그래서 ‘믿는다’는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난 널 믿는다.” “난 네가 잘 해낼 거라 믿는다.” “난 네가 그런 사람이 아닐 거라 믿는다.” 이런 말들은 ‘너’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이런 말들의 속뜻은 대부분 “난 네가 나에게 상처나 불편을 주지 않을 거라고 기대하니 그 기대에 부응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말들을 들으면 누가 나를 믿어주고 있다는 자긍심이나 충만감보다는 왠지 모를 압박감과 답답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정말 ‘너’를 믿고 있다면 “난 널 믿는다”는 말은 애초에 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믿는다”는 말은 ‘너’가 아닌 ‘나’를 걱정하는 말이다. 쉽게 말해, 너 내가 아플 짓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반면 ‘믿어준다’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난 널 믿는다”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난 널 믿어준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는 문법조차 맞지 않는 말이다. ‘믿어주는’ 것은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여기서도 한 번 더 결을 칠 수 있다. ‘내’가 걱정되어서 ‘믿어주는’ 것과 ‘너’가 걱정되어도 ‘믿어주는’ 것. 전자는 연인이 바람을 피는 것 같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이의 마음 상태와 비슷하다. “난 네가 바람을 피지 않을 사람이라 믿는다.” 연인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은 사랑-없음이다. 이렇게 말하면 내 마음은 편해지고 연인의 마음은 불편해질 테니까.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연인이 바람을 피지 않을 거라고 그저 믿어주는 것이 조금은 더 나은 마음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도 ‘너’를 생각하는 마음은 아니다. 연인이 바람을 피지 않을 거라고 믿어주는 것은 결국 나중에 상처받을 ‘나’를 걱정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어떤 일이 있어도 ‘나’가 아니라 ‘너’를 먼저 걱정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내’가 걱정되어 ‘너’를 믿어주는 마음도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다.


‘너’가 걱정되지만, ‘너’를 믿어주는 마음. 아니, 믿어주고 싶은 마음. 그것이 사랑이다. ‘믿어준다’를 말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믿어주고 싶다‘, 즉 욕망이기 때문이다. 욕망은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욕망은 오직 행동이나 움직임 혹은 침묵이나 기다림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다. 누군가를 걱정하는 마음은 힘들다. 네가 아프면 나도 아프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를 걱정하고 있는 사람은 늘 조바심이 날 수밖에 없다. 발을 동동 구르는 엄마처럼 조바심이 날 수밖에 없다. 그 조바심을 꾹 누르고 네가 넘어지고 다치더라도 뒤에서 조용히 지켜봐주고 싶은 마음. 그것이 ‘너’를 믿어준다는 것이다.




“난 널 신뢰할 수 없다.”


아버지에게 이혼을 처음으로 얘기한 말, 아버지가 한 말이다. 이 말을 듣고 난 눈 앞이 하얘져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내가 가장 약해진 순간에 내가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을 한 아버지가 야속했다. 그 얼마나 철없는 마음이었나. 이제야 그날 아버지가 나에게 한 말의 속뜻을 조금은 헤아릴 수 있다.


아버지는 내가 걱정되었던 것이다. 나이는 먹을 만큼 먹고 아직 철은 들지 않은 딸이 이혼을 한다니까 앞으로 혹시라도 내가 상처받고 불행해질까봐 너무나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걱정하는 사람은 불안하고 조급할 수밖에 없다. 내가 네 곁에 오래 있어줄 수 없을 것 같으면 더욱 불안하고 조급할 수밖에 없다. 그날 아버지는 나를 걱정하는 마음이 너무 커져서 모진 말이 터져나와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난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채 아버지를 실망시키는 것이 너무나도 무서웠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 공포와 불안과 섭섭함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내가 아플까봐 걱정되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그저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했던 그 어린 시절의 마음에 휩싸여버린 것이다. 이제 왜 스승이 그날의 나를 보며 “어른은 울 시간이 없다”고 했는지 알겠다. ‘너’를 걱정하는 사람은 울 시간이 없다. ‘너’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질까 걱정하느라 울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그날 울음을 터뜨린 나를 보고 아버지가 말했다. “오늘 네 눈에서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게 하려고 했는데 미안하다.” 나는 아버지가 날 걱정하는 마음도, 그 마음이 터져버려 혹시라도 나에게 상처주었을까봐 한 번 더 걱정했던 마음도 헤아리지 못했다. 그날 내가 했어야 하는 말은 이것이다.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 그리고 했어야 하는 행동은 이것이다. 더 이상 걱정하지 않도록 내가 잘할게.



사랑은 누군가를 걱정하는 마음이다. 누군가 나를 걱정하고 있다면, 그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애를 써야 한다. 그것이 나를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을 돌려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나는 별거 중인 딸이 혼자 사는 집 앞까지 찾아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서성이다 돌아간 아버지의 마음을 모른다. 아버지는 내가 걱정되어 미칠 것 같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길을 택했다. 아버지는 나를 ‘믿어주는’ 길을 택했다. 아마도 다시는 내 눈에서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게 하겠다는 그 마음 때문이었으리라. “네가 결정하면 네가 책임지면 된다. 자식이 부모보다 오래 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게 맞다.“ 며칠 전 아버지가 지나가며 한 말이다. 누구보다 책임감이 강하고 가부장적인 아버지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기까지, 아버지가 얼마나 많은 밤을 뒤척이고 잠 못 이루었을지 나는 헤아릴 수 없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편히 가실 수 있도록 너 부지런히 어른이 돼라.” 그날 아이처럼 울던 나에게 스승이 했던 말을 잊지 않고 있다. 사랑은 ‘너’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것이다. 사랑은 ‘너'의 마음의 짐을 나눠 지는 것이다. 아직 아이라면 일단 너에게 마음의 짐을 지우지 않는 것부터 차근차근 해 나가야 한다. 나도 이제 좀 어른이 되어야겠다. 나를 걱정하는 이의 마음은 덜어주고, 내가 사랑하는 이는 묵묵히 믿어줄 수 있는 그런 어른이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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