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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Oct 09. 2024

[화두] 마음이 분명하고 사과가 모호하다.

‘차원’과 0의 개념, 드브레와 뷔페

스승이 물었다.

“마음과 사과 중 어느 것이 분명한가?”
“마음은 모호하고, 사과는 분명합니다.”
“네 마음이 모호한 모양이구나. 마음이 분명하며, 사과가 모호하다.”

제자는 다시 선방으로 들어갔다.




지난 화두를 풀 때였다. “몸은 삶의 미분점”이라는 부분을 쓰고 있었다. 차원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우리 몸은 부피를 가진 3차원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이미 과학적으로도 증명 되었듯) 시간과 중력장을 포함하면 적어도 5차원이라는 이야기를 썼다. 그런데 잠시 생각이 멈춰졌다. 과학으로 시간과 중력장이라는 차원이 밝혀졌다고 우리가 5차원의 세상에 살고 있나?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분명 시간은 빠르게도 느리게도 흐른다. 그리고 중력장이 공간에 따라 다르게 적용된다는 것은 이미 현대과학에서 알려진 사실이다. ‘시간과 중력을 차원으로 표현할 수 있나?’라는 의문이 들었다. 차원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축이 고정되어 있어야 한다. '2차원'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는 이유는, X축과 Y축이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3,2)라고 했을 때 X축에서 3칸, Y축에서 2칸을 움직인 지점에 점을 찍는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X축과 Y축이 직선이며, 각각의 칸이 고정값으로 균등하게 나눠져 있기 때문이다. 만일 X축이 파도처럼 구불거리고, Y축의 각 칸이 좁아졌다 멀어졌다가 제 멋대로라면 우리는 2차원이라는 표현을 쓸 수가 없다. 애초에 차원은 왜 만들어졌는가? (3, 2)라고 했을 때 모든 사람이 동일한 지점을 가리키게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구불거리는 X축과 늘어졌다 줄었다 반복하는 Y축이 있다면, (3, 2)를 말한들 찍는 지점이 전부 다를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라는 건 파도처럼 출렁이며 늘어졌다 줄었다 하는 축 아닌가? 시간의 유동성은 철학에서는 베르그손이 개별적으로 체험되는 시간인 '지속' 개념으로, 과학에서는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통해 이미 밝혀낸 사실이다. 축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면 차원은 존재할 수 없다. 그 글을 쓰며, 처음에는 5차원이라고 했다가, 시간 축의 유동성을 떠올리고 4+n차원으로 바꿨다가 다시 n차원으로 바꾼 뒤 비로소 깨달았다. 세상은 n차원이 아니다. ‘차원’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차원이 없는 세상을 차원으로 표현해보려는 시도가 <인터스텔라>의 책장씬 아니었을까.


제논의 역설이 생각났다. 베르그손의 <물질과 기억> 강독 수업에서 내가 가장 빵 터졌던 부분이다. 제논의 역설은 다음과 같다.


화살을 쏘았다. 날아가는 화살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어느 점을 지나게 될 것이다. 한 순간 동안에라도 화살은 어떤 한 점에 머무르게 되고 그 다음 순간에도 어떤 한 점에 머무르게 된다. 화살은 항상 머물러 있으니 결국 움직이지 않은 것이 된다.


수업 중에 스승이 이 문제를 풀어보라고 했는데 멈칫 했다. 어? 이거 분명히 역설인데 왜 증명이 안 되지? 생각의 과부하로 머리에 뇌정지가 왔다. 스승이 답을 말해주었다. 제논의 역설은 전형적으로 ‘점’을 이어붙이면 ‘선’이 된다는 생각을 전제로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애니메이션처럼 멈춰 있는 이미지를 이어붙여서 움직임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본다면, 시간을 멈췄을 때 멈춰진 이미지가 대응될 수 있다. 그런데 아무리 시간을 쪼개도 화살은 정지해 있을 수 없다. 현실 세계에서는 아무리 짧은 시간으로 한정한다 해도 아주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t1-t0)을 극한으로 때리면 0이 맞잖아?' 스승의 답에 반론이 떠올려졌다. 그러다가 갑자기 제논한테 당했다는 자각이 들었다. 이 세상에 극한값 0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수학에서만 존재하는 개념이다. 마치 '차원'이 과학에서만 존재하는 개념인 것처럼.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서 (t1-t0)를 0으로 때릴 수는 없다. 그것은 시간을 멈출 수 있다는 말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의 오만과 그 뒤에 숨은 소심함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때를 기점으로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세계관이 바뀌었다. <물질과 기억> 수업을 들을 때 초반에는 억울했고 후반에는 피식댔다. 그것은 과학자들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이 변했기 때문이다. 초반에는 왜 억울했을까? 내가 바로 과학자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베르그손이, 그리고 스승이 과학자들을 깔 때마다 왠지 모르게 그들을 변호해주고 싶었다. '아니, 그 사람들도 세상을 알고 싶어서 열심히 탐구하는 사람들이잖아요. 너무 모지리 취급하지 말라구요.' 이건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런데 제논의 역설을 기점으로 마음이 바뀌었다. 제논의 역설에서 과학자들(정확히는 과학적 사고에 매몰된 사람들)의 집착, 그리고 그 집착 뒤에 숨어 있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 혹은 욕심 같은 것이 읽혔다. 세상에는 t도, 무한도, 차원도, 점도, 0도 존재하지 않는데 굳이 그런 개념을 만들어서 어떻게든 세상을 통제된 틀 속에서 이해해보려는 시도가 너무 이해가 가면서도 안쓰러웠다. 그것이 세상을 알고 싶은 욕망은 강렬한데 유동성과 모호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이 필연적으로 다다르는 종착지 아닌가. 이건 내 삶과도 맞닿아 있다.


https://youtu.be/poeSmXwA2ys?si=JNUpGf-8Xx1h27yp

'0'의 개념이 탄생한 곳은 인도다. '없음'은 없는데 0은 왜 탄생했을까? 의사소통의 효율성 때문이다. 즉 ‘0'은 '구체적 수'보다는 '관념적 언어'에 가까운 셈이다.


경영대에 들어가고 한 2학년 쯤 되었을 때 알았다. 아, 나는 컨설턴트형 인간이지 사업가형 인간이 아니구나. 경영대에서는 분석을 가르친다. 경영과 경제의 기본 원리부터 각종 케이스스터디를 통해 ‘사업 성공’의 단면을 가르친다. 그런데 실제로 컨설턴트가 사업을 잘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컨설턴트들조차 짬이 차면 자기 일은 사업가가 하고 싶은 일을 투자자나 직원들이 반대할 때 그들을 속일 만한 그럴싸한 논리를 만들어주는 것이라는 말을 자조적으로 하곤 한다). 사업 성공’을 구성하는 ‘점’들을 많이 안다고 해서 ‘사업 성공’을 이뤄내는 것은 아니다. 컨설턴트는 이미 지나간 화살의 궤적을 보고 이 지점에서는 이 바람이 불어서 방향이 틀어졌고, 이 지점에서는 화살깃이 떨어져서 속도가 안 났다는 ‘점’을 발견해줄 수는 있다. 하지만 컨설턴트는 화살을 좋은 궤적으로 쏘지 못한다. 점을 이어붙인다고 선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점’을 이어붙이는 행위는 애초에 불가능하다. 세상에는 ’점’이 없기 때문이다.


얼마나 잘 살고 싶었나. 공부를 열심히 했던 것도 사업을 열심히 했던 것도 철학을 열심히 공부했던 것도 다 잘 살고 싶어서였다. 잘 살고 싶어서 나는 ‘잘 사는 법’을 주워모으기 시작했다. 그 점들을 다 모으면 잘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잘 살지 못하고 있다. 아니 그 ‘점’을 모으려는 시도가 오히려 나를 더 혼란하게 만들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제논의 역설에 걸려든 이유도 내가 수학적인 사고에 익숙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의 세상에서 (t1-t0)를 극한으로 때리는 일은 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제논의 역설에 더 잘 걸려든 것이다. 사과는 모호한데 사과를 자꾸 분명하게 보려고 하니 사과가 더 안 보이는 것이다. 모호한 것은 모호하게 보는 것이 분명하게 보는 것이다. 나는 모호한 것을 분명하게 보려고 했기 때문에 더 모호해졌다.




사과가 모호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한 친구가 도슨트를 하고 있는 ‘올리비에 드브레’ 전시를 봤다. 드브레가 루아르강을 그린 그림을 보고 놀랐다. 와, 어떻게 색채만 그었을 뿐인데 이게 강인지 바로 느껴지지? 그 뿐만이 아니었다. 어찌보면 파란색, 녹색, 흰색을 가로로 세로로 그어놓기만 한 그림들에서 루아르강의 계절감이 느껴졌다. 아니 계절감이라는 표현보다는 그 강의 냄새나 온도, 습도, 질감 같은 게 느껴졌다고 하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그 그림 앞에 서 있으면 공간이 달라지는 느낌이었다고 해야 하나. 분명 루아르강을 찍은 사진을 봐도 그게 강인지 당연히 알 수 있을 것이고 계절감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진은 결코 습도와 온도, 냄새,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공간'에 있는 느낌을 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올리비에 드브레의 ‘모호’한 그림과 강을 찍은 ‘분명’한 사진 중에 무엇이 더 루아르강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까? 드브레의 그림이다. 사과는 모호하고 루아르강도 모호하다. 계절, 빛, 온도, 물결, 드브레의 마음 상태, 물감, 시점, 그 모든 것이 단 한번의 ‘멈춤’도 없이 계속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이란 그 모든 우발성이 만들어낸 ‘무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은 ‘순간’이고 그림은 ‘응축(응결)’이라는 걸 알았다. 사진은 ‘점’이고 그림은 ‘미분점’이다.



그렇다면 마음은 왜 분명한가? 베르나르 뷔페전을 본 적이 있다. 그의 광대 그림 앞에 서자마자 육성으로 튀어나왔다. “씨발, 이거 나잖아.” 그 그림 앞에 오래 서 있었다. 그 광대의 슬픈 눈빛, 웃는 듯 울고 있는 표정, 덕지덕지 분을 발라 하얗게 된 얼굴, 화려한 장신구, 깊이 패인 주름과 빨간 피가 묻은 것 같은 입술, 지쳐버린 표정과 두려움과 증오가 서려 있는 눈. 무엇보다 온통 칼자국을 낸 듯한 검고 붉은 직선들. '나네, 나야.‘ 내 얼굴이, 아니 내 마음이 저렇게 생겼겠지 했다. 그림 옆에 뷔페의 말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어떤 사람들이 나의 그림 속 인물이 괴물 같다고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들이 나에게는 더 괴물처럼 보였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마음은 분명하다. 마음을 모호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마음을 분명하게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사과를 분명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과를 모호하게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인 것처럼. 모호한 것을 모호하게 보지 않는 것은, 모호하게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을 분명하게 보고 싶지 않는 것은, 분명하게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적인 이들이 세상을 분명하게 보는(보려고 하는) 것은 세상의 모호함(연기법)을 견딜 수 없어서다. 기만적인 이들이 마음을 모호하게 보는(보려고 하는) 것은 삶의 진실의 분명함(연기법)을 견딜 수 없어서다. 나는 세상은 과학적인 시선으로, 마음은 기만적인 시선으로 보아오지 않았나? 모호한 것을 모호하게 보지 못하고, 분명한 것을 분명하게 보지 못했기 때문에 늘 혼란 속에서 살아온 것 아닌가? 사과를 분명하게 보려고 할수록 사과에서 멀어진다. 마음을 모호하게 보려고 할수록 마음에서 멀어진다. 이제 제대로 보고 싶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넌 고민해야 하는 것을 고민하지 않는다”는 스승의 말이 이제 와닿는다. 나의 고민은 늘 거꾸로 되어 있었다. 그게 내 삶이 늘 반대로 돌아가는 길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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