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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Sep 14. 2024

[화두] '주체'는 경험하는가, 경험되어지는가?

몸과 움직임에 대한 이야기

“행복한 적이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한다면 지금 불행 속에 있는 것이라고 했다. 부지불식 간에 한 장면이 떠올랐다. 난 지금 불행 속에 있다는 걸 알았고, 전혀 생각치도 못했던 장면이 떠올라서 놀랐다. 몇 년 전, 어떤 영화에 필 받아서 갑자기 스승의 복싱장에 찾아간 적이 있었다. 복싱의 ‘복’도 모르는 나를 붙잡고 스승이 접대 스파링을 해주었다. 그 장면이었다. “행복한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그 장면 딱 하나가 떠올랐다. 그게 지금 내가 생각하는 행복의 이미지라는 것을 알았다. 행복은 온몸에 각인된 순간의 기억이라는 사실도.




지혜로운 자의 삶이 잔잔한 물결과 같다면, 지혜롭지 못한 자의 삶은 롤러코스터와 같다. 지혜로운 자의 주된 감정이 ‘자기만족’이라면, 지혜롭지 못한 자의 주된 감정은 ‘오만’과 ‘위축’이다. ‘오만’과 ‘위축’을 잇는 축은 ‘자기기만’이다. 당연하다. ‘자기만족’이 무엇인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볼 때 느껴지는 기쁨이다. 지혜롭지 못한 자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볼 수 없다.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나’를 본다(이게 바로 ‘자기기만’의 정의다). ‘자기만족’은 지혜이고, ‘자기기만’은 미성숙이다.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기쁨-슬픔’의 문제다.


‘자기기만’의 삶은 슬프다. ‘자기기만’이 잘 보존(?)되고 있을 때는 ‘오만’하다. 오만할 때는 조증에 가까운 기쁨을 느끼는데, 그건 알고보면 참 불안한 기쁨이다. 아니 불안함을 숨기기 위해 뻥튀기 된 기쁨이라고 해야 할까. ‘자기기만’은 영원할 수 없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 세상을 보는 상태가 아니니까. 나 혼자 사는 세상이 있다면 자기기만이 계속 유지될 수 있을지 몰라도, 나 혼자 사는 세상은 당연히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모든 건 시간의 문제일 뿐, 있는 그대로의 '나'가 드러나는 순간은 반드시 찾아온다. 그때 자기기만은 깨지고, 지혜롭지 못한 자는 추락한다. 추락하며 극심한 동요와 혼란에 빠지게 되고,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것이 자신의 자기기만에서 비롯된 일이라는 걸 알게 되면 그 다음에는 ‘위축’의 시기가 찾아온다. 나는 얼마나 더 ‘오만’과 ‘위축’의 롤러코스터를 타야 잔잔해질 수 있을까?


자기기만이 깨지는 사건이 있었다. 극심한 동요와 혼란에 빠졌다. 꼬박 밤을 새고 두세 시간 눈을 붙이고 일어났다. 정말 뜬금없게도 갑자기 “베어워크를 하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베어워크는 체육관에서 웜업으로 자주 했던 운동이다. 곰이 땅을 기어가듯, 네 발로 체육관 매트를 앞뒤로, 원으로, 팔자를 그리며 기어다니는 운동이다. 난 단 한번도 베어워크를 하면서 그걸 기쁨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내 몸은 그렇지 않았나 보다. 가끔 빡센 체력운동을 할 때 몸은 힘들어 죽겠는데 체육관 벽에 붙은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힐끗 보면 웃고 있을 때가 있다. 그것처럼 내 정신은 의식하지 못했지만 내 몸은 베어워크를 하고 있을 때 웃고 있었나 보다. 불행이든 절망이든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기만이 깨진다는 것은 삶에 거품이 쪽 빠진다는 것이다. 거품이 다 빠지고 난 자리에는 ‘진짜’만 남는다. 나에게 그 ‘진짜’는 무엇이었을까? 행복의 이미지를 떠올렸을 때 ‘스승과 복싱 스파링 장면’이 생각난 것, 그리고 불행을 느꼈을 때 ‘베어워크를 해야겠다’는 충동이 든 것이다. 그 두 가지는 내가 온몸으로 체험한 진짜 기쁨의 경험이다. 그래서 불행의 순간에 ‘실제적 기쁨’으로서 떠오른 것이다. 딱 그 만큼이 내가 진짜 변화한 부분이라는 걸 알았다. 체육관에 갔다.




몸은 얼마나 정직한가. 몸을 쓰다보면 다른 어떤 것을 할 때보다 나에 대해 더 잘 알게 된다. 체육관에서 기본 스텝을 가르쳐 주었다. 어떤 운동이든 스탠스가 중요하다. 다리를 너무 좁게 벌려서도 너무 넓게 벌려서도 안 된다. 기동성이 있으면서도 균형을 잘 잡을 수 있는 적당한 거리를 항상 유지해야 한다. 그런데 나는 움직이다 보면 자꾸 스탠스가 벌어진다. 조금만 집중을 안하면 어김없이 다리가 벌려지고 움직임은 둔해진다. 왜 그런가 봤더니 발목에 힘이 없어서 그렇다. 힘이 없으니까 균형을 못 잡고 균형을 못 잡다보니 다리를 벌려서 편하게 균형을 잡을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곱게 자란 애들은 운동도 편하게 할려고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내가 그렇다. 스파링을 할 때도 고질적으로 나오는 문제 중 하나다. 내 몸은 무의식적으로 자꾸 편한 자세나 움직임을 택하려고 한다. 나도 모르게 나오는 행동이라 옆에서 지적하지 않는 한 내가 그런 행동을 하는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깊숙이 앉아야 하는 상황에서 허리만 굽힌다든지, 몸통 전체를 돌려야 하는 상황에서 상체만 돌린다든지 하는 식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지금 제가 어느 쪽에 무게를 싣고 있는지 느껴져요?”


레슬링에서 기술 드릴을 하고 있을 때다. 코치와 맞잡고 연습 중이었는데 코치가 갑자기 나한테 이렇게 말했다. 분명 내가 뒷다리로 지탱을 해야할 정도로 코치가 꽤 힘을 줘서 밀고 있었는데도 갑자기 그 질문에 뇌정지가 왔다. "어느 쪽에 무게를 싣고 있냐고요?" 답을 하려고 하자 갑자기 의식이 정신에서 몸으로, 안에서 밖으로 전환되는 느낌이 들었다. 코치의 무게가 내 몸의 어느 쪽에 실렸는지 느끼려고 ‘노력’을 했다. “오른쪽이요?” “맞아요.” “상대방이 어느 쪽으로 움직이는지 느끼는 게 먼저에요.” 그때 알았다. 내가 감응을 못하는 이유. 난 항상 머릿속에 ‘내 할 일’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 내가 코치의 무게를 느끼지 못했던 이유도 그거였다. 온통 ‘이 기술을 오른손부터 했던가 왼손부터 했던가’ 하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 생각을 하느라 코치의 움직임을 느끼지 못했을뿐더러 느껴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한번도 그 생각을 안 했기에 무게를 느껴보라고 하자 바로 답을 못하고 느끼려는 노력을 해야했던 것이다. 이건 스파링에서도 맨날 일어나는 일이다. 난 항상 스파링에서도 내 할 일만 하려고 한다. 내가 하려던 걸 하고 안 되면 벙찐다. 스파링에서도 자주 머리가 하얘진다. 이건 내 삶의 고질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자꾸 편한 선택을 하려는 것. 온통 ‘내 할 일’밖에 생각하지 못해서 상대방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관심도 없고 보지도 못하는 것. ‘내 할 일’을 했는데 내가 예상한 반응이 나오지 않으면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지며 당황밖에 못하는 것(실제로 나는 삶에 큰 변수가 일어나면 머릿 속의 퓨즈가 끊어진다). 이건 전부 다 내 삶의 태도 아닌가.


거울을 보며 기술 연습을 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몸이 내 삶의 미분점이구나.” 미분점은 어느 그래프의 한 점으로, 위치의 관점으로 보면 고정되어 있지만 방향의 관점으로 보면 고정되어 있지 않은 점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미분점은 ‘현재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라는 위치(고정) 정보와 ‘앞으로 어디를 향할 것인가?’라는 방향(유동) 정보를 둘 다 함의하고 있는, 움직이는 고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거울에 비친 나의 몸이 딱 그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지금 나의 몸은 내가 지나온 삶의 응축이다. 미분점은 2차원의 점이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적어도 4차원(공간+시간) 실은 5차원(공간+시간+빛과 중력장)이라고 알려져 있다(몸은 과거의 기억을 지층처럼 쌓아놓고 있기에 4차원임은 당연하고, 베르그손의 주장처럼 물질과 관념의 일원론을 받아들인다면 5차원이라고 표현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4+n차원이 맞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나의 몸은 그 4+n차원에서 움직여온 어떤 흐름이 지금 이 순간에 응축되어 형태로서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지금 내 몸은 내가 마주쳐온 ‘구조(들뢰즈)=아비투스(부르디외)=필연성(스피노자)=연기(불교)’의 순간적 현실화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철학 개념을 써서 이야기하지 않아도 내 몸과 삶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내 몸이 편한 움직임을, 또 내 삶이 편한 선택을 행하는 것은, 오랜 시간 유복하게 살아온 흐름에서 만들어진 행(성향) 때문이다. 반면 내 몸이 운동의 기쁨을, 내 삶이 수행의 기쁨을 (온전히는 아니라도 부분적으로) 알고 있는 것은, 지난 7년 동안 철학을 공부하며 나름대로 만들어온 행(성향) 때문이다. 전자는 '기쁜 슬픔'의 행이고 후자는 '슬픈 기쁨'의 행이다. 삶은 정말 얄짤 없다. 나는 '기쁜 슬픔'의 행만큼 나를 부정하고, '슬픈 기쁨'의 행만큼 나를 긍정한다. 그렇게 힘든 걸 하기 싫어서 어떻게든 피하려고 했는데 결국 남은 건 '수행'뿐이구나 싶다.



후회라는 감정에 대해 생각해본다. 후회는 왜 무지한 감정인가? 후회는 어떤 사건을 고정된 점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어떤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삶이 슬픔에 빠질 수 있다. 그때 우리는 그 선택을 후회한다. 하지만 후회는 삶을 흐름이 아닌 점으로 보는 것이다. ‘선택’을 점으로 보기 때문에 그 점을 도려낸다면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삶은 그렇지 않다. 양자역학을 공부할 때 마음에 강렬하게 남은 이미지가 있었다. 아직 입자인지 파동인지 결정(확증)되지 않은 전자가 벽을 부딪쳤을 때 비로소 입자 혹은 파동으로 결정(확증)되는 이미지. 삶도 마찬가지다. 내 삶의 선택을 내가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오만이다. 어떤 순간의 선택이란, 내가 그때까지 살아온 삶(흐름)이 어떤 타자(벽)에 부딪쳤을 때 응결되어 드러나는 무늬(입자 혹은 파동) 같은 것이다. 그러니 그 무늬를 바꾸고 싶다면, 그 무늬 자체를 문제 삼을 게 아니라 그 무늬가 그 무늬가 되게 만들었던 흐름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 흐름을 바꾸려면 다른 행을 쌓아야 한다. 몸에 한 겹씩 꾸준히 쌓아야 한다. 몸에 쌓인 감각의 기억, 그 감각의 기억으로 인한 호불호, 그 호불호로 인한 움직임, 그 움직임으로 인한 경향성이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온 거대한 흐름이 바로 ‘삶’이기 때문이다.





전자는 경험하는가? 경험되어지는가? 전자는 경험되어진다. 지층은 경험하는가? 경험되어지는가? 지층은 경험되어진다. 몸은 경험하는가? 경험되어지는가? 몸은 경험되어진다. 나(주체)는 경험하는가? 경험되어지는가? 나(주체)는 경험되어진다. 내가 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물이 나를 보는 것이다. 나는 물에게 보여진다. 전자는 벽에게 보여진다.


화두를 받고 생각난 글이 있었다. 오랜 전 스승이 복싱의 아름다움에 대해 쓴 글이다. 복서 둘이 치고받고 싸울 때 만들어지는 선이 아름답다고 했다. 나는 복싱을 해보지도 심지어 운동을 제대로 해보지도 않았으면서 이상하게 그 글이 마음에 남았다. 화두를 받고 갑자기 그 글이 생각났다. 복서 둘이 그 선을 경험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 선이 복서로 인해 경험되는 것일 테다. 나는 그런 선을 만들어본 경험도, 그 선의 아름다움을 느낄 안목조차 없는데, 왠지 그 선은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되어지는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예전의 나는 복서 둘이서 그 선을 만들어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그런데 아름다움은 만들어나가는 게 아니다. 경험되어지는 거다. 아름다움은 이미 실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이 떠올랐다. 하루키는 작가 생활을 시작한 이래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달리기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루키가 달리기에 대해 쓴 글 중 100Km 울트라 마라톤을 한 이야기가 마음에 남았다.


“이상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마지막 단계에는 육체적인 고통뿐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런 것조차 머릿속에서 대부분 사라져버렸다. (...) 그 상태에서는 달린다는 행위가 거의 형이상적인 영역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행위가 먼저 거기에 있고, 그 행위에 딸린 것 같은 존재로서 내가 있다. 나는 달린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나는 달린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움직인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행’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항상 “나는 존재한다”를 첫 문장으로 두었기에, 다음 문장을 이을 수 없었나 보나. “나는 존재한다” 뒤에는 어떤 문장도 올 수 없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행’이 존재한다. 나는 ‘행’으로서만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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