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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Oct 22. 2019

당신을 오해할 용기

'오해하고 이해하는' 반복이 만들어내는 '너와 나'만의 관계

"철학도, 한 사람도, 여러분 자신도 오해하거나 오독할 것을 두려하지 마세요. 두려워해야 할 것은 그 오해와 오독을 멈추는 일이에요. 그렇게 ‘반복을 만드는 차이’를 긍정하고 ‘차이 나는 반복’을 멈추지 마세요." - 황진규



 나는 스승과 벗들과 철학흥신소라는 작은 공동체를 운영 중이다. 그곳에는 이런저런 사연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드나든다.


 나는 철학흥신소의 공식 '나대는 애'이다. 어려서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것을 좋아했던 기질은 어른이 되어서도 어딜 가지 않는다. 다행히 이곳에서는 남을 깔아뭉개는 방식으로 내가 돋보이고 싶은 마음은 거의 없다. 나는 이곳 사람들이 너무 좋으니까. 하지만 아직도 '나댐'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탓에, 나도 모르게 선을 넘어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때도 많다.


 이곳에 들어온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한 여자애에게 의도치 않은 상처를 주었다. 그녀는 부모를 일찍 여읜 불우한 환경 속에서 보기 드물 정도로 반듯하게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녀의 삶은 온실 속의 화초로 살아온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고, 성숙하지 못했던 나는 그녀를 '대단한 사람'이라고 멋대로 규정하고는 평소에 버릇대로 그런 내 생각을 마구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지금까지 '반듯한 사람'으로 살아오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는지도 헤아리지 못한 채 말이다. 심지어 그 당시 나는 강압적이었던 부모님에 대한 원망이 하늘을 찌를 때라, 부모가 없는 탓에 빡세지만 한편으로는 자유롭고 주체적으로 살아온 그녀의 삶이 부럽다는 생각마저 했다. 내 결핍이 너무 커서 그녀의 아픔을 보지도 못한 것이다. 눈치가 없었던 나는 그런 내 마음마저 그녀에게 표현하고 말았다. 후에 그녀가 나를 무례하고 불편한 사람이라 생각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몇달의 시간이 흐르고 나는 내가 얼마나 그녀에게 무례했는지 깨달았다.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따로 인간적인 교류를 하지는 않았지만, 공동체 안에서 인생의 깊은 이야기들을 각자 글로 써서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녀가 나에게 직접 해준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녀의 글만 봐도 그녀가 얼마나 많은 아픔을 겪고 살아왔는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글을 보면서 많이 울었다. 그리고 가슴 깊이 미안했다. 그녀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던 주제에 내 멋대로 이런저런 말을 해서.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그 마음을 묻어놓지는 않았다. 나는 한 술자리에서 그녀에게 '내가 그 당시에 네 삶을 오독해서 미안했다'고 진심으로 사과했다. 쿨한 그녀는 내 사과를 흔쾌히 받아주었고, 살아온 삶도, 성격도 다른 우리는 이제 좋은 친구가 되었다.


 후에도 그런 적은 많다. 나는 도대체가 나댐을 주체하지를 못한다. 한때는 어떤 여자아이가 눈에 밟혀 감당도 못할 거면서 주제넘게 도움을 준 적도 있다. 한참 동안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는 사실에 취해 내가 무슨 잘못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아이는 오히려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 혼자 사는 법을 깨우쳐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나는 이 아이는 혼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거라 오해해서 계속 그 아이의 손을 꼭 붙들고 있었다. 또 한번 타인을 오독한 것이다. 꽤 긴 시간 동안 나는 과도한 책임감을 지고 그 아이의 엄마 노릇을 자처했다.


 하지만 한참 시간이 흐른 뒤, 나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 아이의 손을 놨다. 그간 해주던 물질적, 정신적 지원을 단호하게 끊어버렸다. 물론 끊으면서도 무서웠다. 내 생각처럼 그 아이가 나락으로 빠져버릴까봐. 하지만 그 아이는 오히려 내가 손을 놓자 진짜 자기 인생을 살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 아이가 그렇게 꿋꿋하게 살아갈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그간 연민과 우월감이라는 렌즈로 그 아이를 마음대로 오해했기 때문이다. 그 사건을 겪으면서도 많이 반성했다. 내가 그 아이를 오독한 탓에, 우리 둘다 불필요하게 힘든 시간을 겪어야 했으니 말이다.





 지금도 나는 주변 사람들을 오해하고 오독한다. 어떤 사람의 성향을 잘못 판단해서 헛소리를 했다가 나중에 그의 삶 이야기를 듣고 쥐구멍에 숨고 싶었던 적도 있고, 어떤 이가 나에게 호의로 한 말을 나 혼자 잘못 해석해서 버럭 화를 낸 적도 있다. 그렇게 오해하고 오독하는 일이 쌓여갈 수록 잘 모르는 주제에 설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누군가에게 아무런 개입을 하지 않으면 오해와 오독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으니까. '그래서 성숙한 사람들은 입을 닫고 사는 건가' 하며 방정맞은 내 입을 부끄러워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더 지나고 나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인간관계에서 오해와 오독이 없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다른, 단독적인 사람들이고, 언어는 완벽한 소통 수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오해와 오독은 상대방과 우리 자신에게 상처를 남긴다. 그렇기에 상대를 잘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태도는 너무나도 중요하다. 하지만 오해와 오독이 상처를 초래한다고 하여 입을 닫아버려서는 안 된다. 상대에게 아무말도 하지 않겠다는 건 타인에게 무관심하겠다는 말과도 같기 때문이다.


 상대를 오해하고 오독하는 데까지는 반드시 두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1)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관심을 갖고 이해하려 노력해야 하고 2) 내가 이해한 것을 바탕으로 상대에게 나의 생각을 표현해야 한다. 우선, 상대를 오해하지 않기 위해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거두는 것은 타인에 대해 '무관심'하겠다는 것이고, 타인에게 무관심한 사람은 당연히 극심한 외로움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두번째로 타인을 읽긴 했지만 오해했을까봐 표현하지 않는 것은,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방법이긴 해도 영원히 '오해'를 오해로 남기게 될 수 있다. 오해였을지언정 그때 내가 그 여자애에게 '네 삶이 부럽다'고 표현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그녀에게 이상한 동경을 품고 있었을 테고, 그 여자애는 그런 나를 무의식적으로 불편해했겠지만 내가 표현하지 않았으니 그 불편함을 침묵으로 묻어뒀을 가능성이 크다. 그랬으면 절대 그 여자애와 지금처럼 친구가 되지는 못했을 테다. 내가 연민했던 여자아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나는 분명 그 아이를 '누구에게 의지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못하는 아이'라고 오해해서 그 아이에게 혼자서 살아볼 기회를 주지 않았다. 아직도 그 사실이 미안하다. 하지만 잘못된 방식이었다거 해도 그때 내가 그 아이의 삶에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그 아이가 변하는 데까지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하지 않은 것보다는 늘 뭐라도 하는 게 낫다. 뭐라도 하면, 뭐라도 '차이'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오해와 오독은 상처를 낳는다. 하지만 그 상처가 영원한 것은 아니다. 내가 누군가를 오해해서 상처를 주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그때 가서 진심으로 사과하면 된다. 물론 오해를 마주하고 풀어가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다. 그 과정 속에서 더 큰 마찰을 일어날 수도 있고, 영원히 오해를 해결하지 못하고 관계가 끝나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걸어볼만 하다. 오해를 풀 가능성은 오해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을 때에만 열리기 때문이다. 설령 오해를 풀지 못하고 끝이 나버린다고 해도, 그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부채감을 안고 앞으로 그와 비슷한 사람들을 더 세심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된다. 이처럼 오해하고 상처주고 사과하고 풀어나가는 과정을 통해 점점 더 타인을 세심하게 이해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언제라도 누군가를 오해할 수 있다는 걸 인정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눈과 귀를 막은 채 상대방에 대한 오해를 쏟아내는 사람은 '차이 없는 반복'만을 되풀이할 테니 말이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나댈 생각이다. 누군가에게 관심이 생기면 그의 삶을 읽어보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개입하려고 감히 노력할 것이다. 지금처럼 오해와 오독이 난무할지도 모르고, 그 오해와 오독이 또 상대방에게  불필요한 상처를 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상처주는 것이 두려워 가만히 있는 삶보다는, 일단 오해하고 오독한 뒤 내가 초래한 상처를 감당해나가는 삶이 낫다고 생각한다.


 나는 또 당신을 오해할 수 있다. 미리 사과하겠다. 다만 나에게 조금만 시간을 달라. 당신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내가 당신을 오해했다는 것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뜻이다. 나의 오해로 인해 내가 지금 당신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부러워하든 경멸해하든, 적어도 당신에게 무관심하진 않겠다. 그리고 당신이 나를 오해하는 것 또한 감당하겠다. 이제는 나에 대한 오해를 견디지 못해서 까칠하게 반박하지 않겠다. 당신이 나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 또한 온전히 기다리겠다. 부디 당신 또한 나를 오해하는 것이 두려워 관심을 거두지만 말아 달라.


 우리 무관심의 빙판을 활주하는 대신 차라리 오해의 바다에 풍덩 빠져버리자. 그렇게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깊고 어두운 바다 속에서 둘이서 지지고 볶으며 헤엄쳐 나와 보자. 고된 헤엄 끝에 우리는 서로를 깊게 이해하는 친구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친구가 되어서도 또 오해를 반복하겠지만, 난 그렇게 오해와 이해를 반복하며 당신과 세상에서 하나뿐인 관계를 만들어가고 싶다. 우리 부디 오해의 끈을 놓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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