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와 수행의 차이 (1)
오랜만에 스승으로부터 숙제를 받았다. "공부와 수행의 차이"에 대한 글 한편을 써오라는 것이었다. 숙제를 받자마자 주제가 왜 이렇게 어렵냐고 물었다.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길은 그렇게 어려운 겁니다." 스승이 대답했다. 스승과의 대화는 늘 선문답 같다.
사실 주제를 받자마자 머릿속에 떠오른 답은 있었다. "공부는 앎을 얻는 과정이고, 수행은 앎을 삶으로 실천하는 과정입니다." 하지만 이 정도 평이한 답을 듣고자 스승이 굳이 숙제까지 내주진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내가 '수행'이라는 단어를 자주 썼던 기억이 났다. 특히 요즘 자기 소개를 할 때 '수행 중'이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아직 그곳에 가닿지는 못했지만, 더 아름답고 유쾌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중이라는 의미를 담아서. 반면, '공부'는 내 삶의 오래된 테마 중의 하나다. 평생을 공부하는 기계처럼 살아온 나는 '공부'라는 단어에 꽤나 반감이 있다. 어렸을 때부터 억지로 책을 읽었던 기억 때문인지, 나는 지금도 책을 읽기 위해서 많은 인내심이 필요하다. 어쨌거나 '수행'과 '공부', 둘다 나의 무의식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단어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왜 스승이 이 주제에 대해서 글을 쓰라고 했는지는 여전히 아리송하다.
미분화와 분화
일단 공부와 수행의 차이에 대해서 조금 더 써보자.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에 빗대어 설명하자면, 공부는 '미분화(微分化)'이고, 수행은 '분화(分化)'이다. 들뢰즈에 의하면, 세상 만물은 마치 세포처럼 '안팎이 구분되긴 하지만, 끊임없이 안팎이 넘나드는 구조'를 띄고 있는데, 이때 세포 밖의 이질적인 물질이 세포 안으로 들어오는 현상을 '미분화(微分化)', 그 이질적인 물질로 인해 세포가 요동치는 과정을 '개체화', 요동치면서 새로운 변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분화(分化)', 그 변화가 완전히 현실화되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 상황을 '질화'라고 한다. 들뢰즈는 모든 유기체가 작동하는 방식을 이와 같은 '미분화–개체화–분화–질화'의 과정으로 설명하며, 존재란 이 일련의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 다시 말해 '차이 나는 반복' 그 자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의 사유 체계 또한 마찬가지다. 들뢰즈는 '이념'을 '미분적으로 차이 나는 반복적 사유 체계'라고 정의한다. 수학에서 '미분'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함수의 어떤 한 지점에서의 순간변화율(기울기)을 뜻한다. 문과적으로는 '찰나의 순간에 일어나는 변화' 정도로 풀이할 수 있고, 앞의 예에서는 '이질적인 물질이 세포 안으로 들어온 순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변화율'이나 '이질적인 물질'과 같은 단어들이다. 아무리 세포 밖에서 무언가가 들어온다고 해도, 그것이 '나'와 완벽하게 동일한 물질이라면 '변화'는 촉발되지 않는다. 마치 상수함수를 미분하면 '0'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미분화의 조건은 언제나 '차이'이다. 나와 '차이'나는 무언가. 그것만이 우리 안의 변화를 촉발시킬 수 있으며, 앞서 이야기 했듯 그러한 변화의 반복이야말로 생명의 유일한 존재 이유다. 반면 '차이가 나지 않는 반복'은 '기계적 반복'에 지나지 않으며, '기계적 반복'은 생명을 헐벗게 만든다. 여기까지 논의를 진행하면, 우리가 해야하는 '공부'의 모습이 무엇인지 명료해 진다.
공부란 무엇인가?
공부는 앎을 얻는 과정이다. 하지만 나의 기존 사유체계에서 그다지 동떨어지지 않은 앎을 얻는 것은 '기계적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앎의 축적은 결코 내 안의 '미분화'를 일으킬 수 없다. 앞서 이야기했듯, 미분화는 '이질적인 것'을 접할 때에만 촉발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공부란 나의 사유 체계 밖의 무언가를 만날 때만 가능하다. 또한 아무리 이질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내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미분화는 일어날 수 없다. 들뢰즈가 그토록 '마주침'이란 개념을 강조하는 이유다. 정리하자면, '진정한 공부'는 '마주침(미분화)'이며, '마주침'은 그 대상이 1) 내가 관심이 있는 것일 때, 2) 나의 현재 사유 체계를 뒤흔들만큼 이질적일 때에만 일어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두 조건에 비추어 보면, 지금까지 내 삶에서 학문으로서의 '진정한 공부'는 '철학'밖에 없었다. 내가 그 많은 시간을 투자해 얻었던 앎은 대부분 '마주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중 대부분은 관심도 없는데 단지 수험에 필요하기 때문에 마구 쑤셔넣은 앎들이었다. 세포 안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든 앎이 아니라, 사회가 세포 안으로 주사기를 찔러넣어 억지스럽게 주입한 앎들. 그러한 앎을 얻는 과정은 매우 고통스러웠을 뿐더러, 억지로 얻은 거라서 그런지 내 안에 오래 남지도 않았다. 허무하게도, 수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얻은 앎 중에 내 안에 남아 있는 것은 별로 없다. 마치 시험이 끝나면 그간 외웠던 모든 것이 백지 상태가 되는 것처럼.
반면, 내가 관심을 가지고 한 공부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공부들은 또 두 번째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다. 스타트업을 하던 시절, 나의 신경은 온통 경영이나 자기계발 콘텐츠에 꽂혀 있었다. 학창시절 때와 달리, 나는 지대한 관심을 갖고 그러한 앎들을 능동적으로 흡수했다. 하지만 경제경영이나 자기계발 업계에서 이야기하는 내용 중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고 자란 나의 사유 체계에 벗어나는 내용은 전무했다. 기껏해야 작은 노하우나 스킬을 얻을 수 있었을 뿐, 진정으로 나를 '변화(그 업계에서는 '성장'이란 단어를 더 좋아한다)'시키는 앎은 없었다. 이것이 자기계발과 경제경영 공부에 탐닉하면 할수록 공허함만 쌓였던 이유다. 욕망에는 부합했지만 결코 이질적인 앎을 얻는 과정은 아니었기에, 그 공부 또한 그저 '기계적 반복'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나의 공부, 철학과 사람
내가 학문으로서 접한 '진정한 공부'는 '철학'이 유일하다. 우연한 기회로 만나게 된 '철학'은 나의 사유 체계를 뒤흔들어 놓았다. 지금도 철학은 나의 사유 체계를 자주 뒤흔든다. 내가 굳게 믿었던 무언가가 뿌리부터 흔들리고, 내가 세상을 봐오던 렌즈가 산산조각 나 버리는 느낌.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혼란스럽고, 그 무엇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홀로 처박힌 듯한 느낌. 내 의지와 상관 없이 이질적인 무언가가 내 세포막 안으로 스며들어 내 모든 세상을 헤집어 놓는 느낌. 마치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 여성이 극심한 입덧을 겪듯, 내 안에 이질적인 것이 들어오는 과정은 대부분 불편하고 메스꺼운 느낌을 동반했다.
특히 나는 책보다 스승을 통해 철학을 공부하고 있기에 더욱 그랬다. 나의 철학 스승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람이다. 내가 '고정된 나'에 집착하여 '미분화'를 거부하면, 스승은 어김없이 농담이나 잔소리를 가장한 죽비를 내리친다. 가끔 스승의 죽비를 맞으면 정신이 얼얼할 정도로 아프다. 특히 내가 숨기고 싶었던 모습을 까발리거나, 내가 무의식적으로 피하고 있던 욕망을 코 앞에 끄집어 내면 어디 발가벗겨져서 광장에 내던져진 기분마저 든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짜증나고 부끄러운 순간이 바로 순간변화율이 발생하는 '미분화'의 순간이라는 걸. 실제로 그렇게 '미분화'가 촉발된 뒤, 요동치는 '개체화'와 '분화'의 시간을 지나, 또 다른 나로 '질화'된 경험을 몇번이나 되풀이했다. 그래서 이제는 '미분화'가 일어날 때 느껴지는 그 불편한 감정을 조금 더 긍정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진정한 공부'가 '마주침'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공부는 꼭 학문이 아니어도 된다. 나에게 마주침(미분화)을 일으키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공부가 될 수 있다. 영화가 될 수도 있고, 시가 될 수도 있고,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내 안에 순간변화율을 발생시키는 것은 모두 다 '공부'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나의 가장 큰 '공부'의 대상은 '철학'이기 전에 '내 철학 스승'이다. 그는 나의 살아있는 공부 대상이다. 그의 사유는 매력적이고 이질적이니까. 나는 뻔뻔하리만치 그의 사유를 훔친다. 나는 그의 한 마디 한 마디를 정말 집중해서 듣는데, 그러다보면 이상하게 하루 종일 뇌리에 남는 몇몇 문장들이 생긴다. 그런 문장들이 내가 그를 통해 '마주치는' 사유들이다. 그 문장들은 대부분 내가 처음 생각해봤거나 잘 모르겠거나 아니면 동의하지 않는 내용들인데, 나는 왠만하면 그 내용들을 스승에게 다시 묻지 않고 혼자서 곰곰히 계속 생각해본다. 지금 몇달째 고민 중인데도 아직도 잘 이해가 되지 않거나 동의할 수 없는 내용들도 있다. 하지만 난 그걸 김장독 묻듯 머리 어딘가에 그냥 묻어놓는다. 그렇게 묻어놓고 있다 보면 어느덧 이해가 될 때도 있고, 이해되지 않더라도 그로부터 많은 '질문'들이 파생되어 나오곤 한다. 그런 질문들이 나로 하여금 또 철학적 사유를 가능하게 한다. 때로는 답보다 질문이 더 중요할 때도 있는 것 같다.
사실 최근까지 나는 스승의 사유를 훔치는 것을 완전하게 긍정하지 못했다. 물론 긍정하지는 못해도 멈출 수도 없었던 탓에 계속해서 스승을 매개로 앎을 마주쳐 왔지만, 한편으로는 내 스스로 공부를 하지 못한다는 자격지심도 있었다. 이상하게 혼자서는 철학 책을 읽고 싶지가 않다. 심지어 내가 가장 관심있는 분야인 페미니즘에 대한 책도 읽어지지가 않는다. 읽다보면 재미가 있긴 한데, 또 완전 빠져들는 건 아니라 도중에 그만 읽기 일쑤다. 이건 그냥 내가 유튜브적인 단기 자극에 길들여진 탓에, 긴 텍스트를 읽는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일까? 아니면 잘 모른 내용을 그냥 넘기지 못하는 강박증적 성향 때문에 어려운 내용이 많은 철학책을 읽을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일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왜 나는 자꾸 공부하고 싶어하는 것일까?
나는 왜 공부하고 싶은가?
공부가 마주침이라면 나는 현재 공부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게 맞다. 스승을 통해 계속해서 새로운 사유를 만나고, 평생 읽지 않았던 시를 읽고, 나와 꽤나 이질적인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그 안에서 여러가지 '마주침'을 겪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것으로는 무언가 자꾸만 부족함이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공부를 하고 있음에도, 스스로 공부하고 있지 않다는 자격지심에 빠져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진짜 공부하고 싶은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세상에 나가고 싶다. 세상에 나가고 싶은 욕망에는 나의 두가지 야망이 중첩되어 있다. 하나는 사람들에게 관심받고 인정받고 싶은 관종 욕구, 하나는 더 많은 타자들과 부딪치는 과정을 통해 더 단단하고 유연한 사람이 되고 싶은 성장 욕구다. 둘 다 나에게는 너무 중추적인, 우회할 수 없는 욕망들이라고 생각한다.
난 어느 순간 깨달았다. 방구석에 처박혀서는 멋진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나와 '차이'나는 무언가를 계속해서 마주쳐야만 지금과 다른 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물론 지금도 나는 '이질적인' 것들을 마주치고 있긴 하지만, 지금은 따스한 온실 속에서 엄선된 '차이'들만 만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내가 공동체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나와 이질적이긴 해도 나에게 친절한 이들이다. 예를 들면 나는 지금 서로 아는 사람들끼리 가볍게 주고 받는 '메서드 스파링'만 하고 있는 상태 같다. 물론 그것이 혼자서 샌드백을 치는 것보다는 훨씬 낫겠지만, 그건 진짜 '스파링'이나 '경기'는 아니지 않는가. 나는 어느 시점부터 '메서드 스파링'만 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한 듯 하다. 서로 모르는 예측불가능한 상대와 치고받는 것만이 진정한 '차이의 마주침'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공부는 기본기 같은 것이다. 지금까지 나의 기본기는 스승이 다져 주었다. 그것을 토대로 나는 이질적이만 친근한 사람들을 만나며 가벼운 메서드 스파링을 반복해왔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 내 기본기가 그다지 탄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진짜 경기에 나갈 용기가 없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내가 공부를 무의식적으로 회피했던 이유는 경기에 나가는 것이 두려워서일 수도 있겠다. 경기가 두려우니까 아예 샌드백도 치지 않고, 줄넘기도 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것 아닐까?
이것은 '수행'과도 관련있는 내용일 테다. 오늘 하루종일 이 글을 쓰느라 '수행'에 대해 글을 더 쓸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다. 내일 연결해서 계속 써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