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와 수행의 차이 (2)
지난 글에 이어 오늘은 "수행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글을 쓰고자 한다. 일단은 지난 글에서 설명이 조금 미흡했던 것 같아, 들뢰즈가 말하는 '미분화–개체화–분화–질화'의 과정을 다시 한번 정리하고 가겠다. 사실 나는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을 스승의 도움을 받아 이제 겨우 맛만 본 상태라, 내가 저 개념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지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들뢰즈의 사유는 나에게 매우 큰 마주침으로 다가왔기에 오독에 대한 걱정을 무릅쓰고 그의 개념들을 내 언어로 소화해보고 싶다.
'-되기'의 4단계
미분화–개체화–분화–질화
들뢰즈는 세상 만물을 '–됨(Being)'이 아닌, '-되기(Becoming)'로 본다. 우리는 어떤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계속 무언가가 되어 가고 있는 '상태(State)' 그 자체라는 말이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이 '-되기(Becoming)'의 과정을 '미분화–개체화–분화–질화'로 세분화하여 설명한다.
(여기서부터는 순전히 나의 해석임을 미리 밝힌다) 예를 들면, 한 점(점1)에서 다른 점(점2)이 '되는' 과정을 생각해보자.
'점1'과 '점2' 사이를 잇고 있는 화살표 선이 바로 '-되기(Becoming)'다. 이 화살표 선을 조금 더 쪼개서 생각해보자. 처음에는 고정된 상태의 '점1'이 있다. 이 '점1'에 어떤 차이가 가해졌을 때 순간적으로 '점2'를 향하는 운동 에너지가 발생한다. 이 구간이 '미분화(微分化)'다. 위의 그림에서는 어쩔 수 없이 일정 정도 값을 가진 구간으로 표현했지만, 사실 수학에서 미분이 그렇듯 미분화의 구간은 0을 향해 수렴한다. 즉, 미분화는 변화의 움직임이 시작되는 찰나의 순간이다. 굳이 그림으로 표현하자면 '점1에서 화살표선이 돋아나는 바로 그 순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미분화'를 통해 운동에너지가 발생하면 그 다음 '개체화(個體化)'가 시작된다. 여기서 눈여겨 볼 점은 '개체화' 구간에서는 움직임은 느낄 수 있지만 방향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그림을 잘 살펴보면 '개체화' 구간에서는 '점2'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개체화'는 어디론가 가고는 있는데 어디를 향하는지 알 수 없는, 가장 불안하고도 요동치는 구간이다. 다행히 이 길고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오면 비로소 '분화(分化)'의 시간이 시작된다. '분화'의 구간에서는 '점2'가 보인다. '분화'는 방향을 뜻하는 화살표를 포함하고 있다. 즉, '분화'는 어디로 나아가는지 아는 상태로 목표지점을 향해 힘차게 걸어나가는 구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들뢰즈는 '분화'를 '현실화' 과정이라고도 한다. 마지막으로 '미분화–개체화–분화'를 거쳐 비로소 '점2'에 도착했을 때, '점1'은 '점2'로 '질화(質化)'된다. 질적(質的)으로 완벽히 다른 점으로 거듭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존재가 '점2'에 고정되는 것은 아니다. 존재는 '점2'에 도착하자마자 또 미분화를 일으켜 '점3'을 향한 움직임을 시작한다. 그래서 들뢰즈는 존재를 '점(=Being)'이 아닌, '선(Becoming)'이라 말한다.
예를 들어, 더듬이가 있는 모습으로 진화하기 전 상태의 달팽이를 생각해보자. 엄밀히 말하자면 이 생명체는 아직 더듬이가 없는 상태이므로 '달팽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니 여기서는 편의상 그를 '원시달팽이'라고 칭하겠다. 이 '원시달팽이'는 눈도 더듬이도 없다. 그래서 툭하면 장애물에 부딪치기 일쑤다. 원시달팽이에게 장애물은 예측불가능한, 이질적인 존재다. 그래서 장애물이라는 '차이'를 마주쳤을 때 원시달팽이에게는 어떤 욕망이 촉발된다. 장애물에 부딪치고 싶지 않다는 욕망, 아니면 장애물을 유연하게 넘고 싶다는 욕망. 어떤 욕망이든 상관 없다. 중요한 건 욕망이 생겼다는 사실 그 자체다. 장애물은 원시달팽이로 하여금 어떤 다른 상태로 변화하고 싶다는 에너지를 일으켰다. 이것이 '미분화'다.
하지만 욕망이 생겼다해도 원시달팽이는 여전히 혼란스럽기만 하다. 지금과 다른 무언가가 되기를 꿈꾸지만 구체적으로 그것이 어떤 상태인지는 불명확하다. 장애물을 만나기 전 원시달팽이의 삶은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장애물과의 마주침으로 인해 현재 그의 삶은 통채로 흔들리고 있다. 그는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무엇을 원한다. 그 혼란의 시간이 '개체화'다. 그 혼란한 시간 속에서도 원시달팽이는 계속해서 장애물에 부딪친다. 그러던 도중 그의 머리에는 더듬이 비스무리한 것이 조금씩 돋아나기 시작한다. 그는 장애물을 피하기 위해 곤충처럼 '눈'이 생길 수도, 개처럼 '후각'이 발달할 수도, 박쥐처럼 '초음파'를 쏠 수도 있었지만, 그가 과거에 마주친 장애물들의 기억과 현재 처한 환경을 종합해봤을 때 그에게는 '더듬이'가 최적이었으리라. 처음에는 머리에 작은 점이 생겼다가 혹처럼 튀어나왔다가 점점 길어져 더듬이의 모양으로 진화된다. '장애물'이라는 '차이'가 촉발시킨 그의 욕망이 '더듬이'라는 구체적인 무엇으로 '현실화'되는 과정. 이것이 '분화'다. 그리고 더듬이가 완전히 자라 하나의 기관으로 자리잡았을 때, 그는 '원시달팽이'에서 '달팽이'로 '질화'한다.
수행은 '분화'인가?
지난 글에서도 썼듯이, 공부는 '미분화'이고, 수행은 '분화'다. '공부'는 이질적인 무언가를 만나 내 사유체계에 변화가 일어나는 순간이다. 어떤 앎을 제대로 마주치면 사유체계가 흔들리는 느낌이 든다. 가끔은 그 '강도'가 너무 세서 다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 전부 다 모르는 내용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나의 사유 체계가 변하고는 있는데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는 혼란의 시기. 나는 이제 그 시기가 오면 가만히 기다린다. 글도 그 주제 말고 다른 주제에 대해서만 쓴다. 그렇게 묻어두고 기다리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어느덧 '더듬이'처럼 구체적인 무언가가 돋아나기 시작한다. 드디어 내가 어디로 가야하는지 방향이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분화의 시간, 현실화의 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부지런히 '더듬이'를 키우는 것밖에 없다. 머리 맡에 흔적처럼 생긴 무언가를 부풀리고, 키우고, 다듬고, 수정하고, 자르고, 다시 키우며, '더듬이'라는 하나의 어엿한 기관으로 만들어나가는 것. 나는 '수행'이 이러한 '분화' 과정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예를 하나 들어보자. 나는 현재 몸에 대한 컴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한 수행을 하고 있다. 나는 오래도록 몸을 경시하는 환경에서 자랐다. 그래서 대부분의 시간을 그저 책상앞에 앉아 공부하거나 일을 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우연한 기회로 철학을 배우며 몸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몸을 움직이는 기쁨을 아는 사람들과 처음으로 깊게 교류하면서 그 기쁨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물론 처음부터 이렇게 몸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달은 것은 아니었다. '몸이 정신보다 중요하다'는 관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내 지난 '책상머리 인생'은 통채로 부정되는 셈이었으니. 그렇게 미친듯이 마음이 요동치는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 날 '춤을 추어야겠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드디어 나에게 '더듬이'가 돋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춤을 춰야겠다는 생각을 한 뒤에도 한참을 머뭇거렸다. 이제 머리에 작은 흔적 하나 생겼는데, 어느 세월에 이걸 더듬이로 만들어나갈지 막막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던 중에도 계속 나는 장애물에 부딪쳤다. 몸에 대한 컴플렉스 때문에 불필요한 감정에 휩싸이거나 현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일들이 반복된 것이다. 장애물에 부딪치는 것이 지긋지긋해 견딜 수 없었던 나는 결국 '춤'이라는 산에 한 걸음을 내딛었다. 오래도록 묵혀뒀던 꿈을 현실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내가 원해서 배우는 것인데도 나는 '춤'이 즐겁게 느껴지지 않는다. 주 6일 운동과 춤을 반복하며 몸으로 갈 수 있는 어떤 경지를 가고자 노력하고 있지만, 그 과정이 기쁨으로 가득하지가 않다. 나에게 '춤'을 비롯한 운동은 '수행'의 느낌에 가깝다. 내가 욕망하는 '점2'로 가기 위한 지난한 현실화의 과정. 어떻게 달팽이가 처음부터 그럴싸한 더듬이를 만들 수 있었겠는가? 제대로 작동하는 '더듬이'를 완성시키기까지 달팽이는 또 수없이 장애물에 부딪치며 시행착오를 겪었야 했을 것이다. 이제 막 시작한 단계라 거창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나에게 춤을 비롯한 '몸'에 관련된 수행은 온통 그런 느낌이다. 내가 욕망하는 그곳에 가기 위해 즐겁진 않지만 해야만 하는 것.
그렇다면 나는 왜 춤 추는 게 즐겁지 않을까? 왜 꿈을 현실화 하는 과정은, 분화는, 수행은 고달픈 면이 많은 것일까? 그건 내가 춤에 대한 욕망이 없어서가 아니라, 춤을 잘 추지 못하는 내 자신을 긍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춤을 추다가 거울을 보면, 선생님과 분명 같은 동작을 하고 있는데 너무나도 이상한 몸짓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을 본다. 하긴, 그렇게라도 따라하면 다행이다. 대부분의 동작들은 따라하는 것조차 어렵다. 그런 순간이 쌓이면, 나는 춤을 추는 게 괴로워진다. 아마 원시달팽이도 이제 막 흔적만 생겼을 뿐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하는 더듬이를 가지고 장애물을 피하려다보면 자괴감이 쩔었을 것 같다. 어느 세월에 이 먼지만한 흔적을 더듬이로 키워낼지 막막했겠지.
물론 막막하고 자괴감이 든다고 해도 수행을 멈출 수는 없다. 그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미분화'가 시작된 순간 모든 건 정해져 버렸다. 즉, 원시달팽이가 장애물에 최초로 부딪힌 순간, 이미 '더듬이'라는 구체적인 기관은 그 안에 '잠재성'의 형태로 실재하게 된다. 나의 춤도 마찬가지다. 내가 '몸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철학과 마주친 순간, 이미 '춤추는 나'는 내 안에 심어져 버렸다. 들뢰즈는 '미분화'를 '잠재성', '분화'를 '현실성'과 동일시한다. 즉, '점1'에서 다른곳으로 튀어나가는 에너지가 발생한 순간, '점1' 안에는 다른 무언가로 변화할 '잠재성'이 생기고, 그 '점1'의 움직임이 '점2'에 도달했을 때 그 '잠재성'은 '현실성'으로 탈바꿈된다는 뜻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의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씨앗 안에는 이미 꽃이 있다. 그 잠재된 꽃을 현실화시키는 것은 씨앗의 의지가 아니다. 씨앗은 알맞은 토양과 물, 햇빛이란 배치에 들어가면, 저절로 꽃을 틔운다. 그런 의미에서 씨앗은 곧 꽃, 잠재성은 곧 현실성, 미분화는 곧 분화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삶은 수행인가?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서 많은 산을 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산을 넘는 과정이 녹록치 않아 보였기에 답답하고 막막했던 것도 사실이다. 스님이 해탈에 이르기 위해 고행을 하는 것처럼 삶은 수행의 연속인건가, 의문이 든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외면하고 있었다. 분화의 과정은 고달프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틀렸다. '분화'와 '수행'은 동의어가 아니다. '고달픈 분화'만이 '수행'이다. 세상에는 순수한 기쁨으로만 가득찬 '분화'도 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이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의 반복'에 더 어울리는 개념일지도 모른다. '차이와 반복'은 생명의 존재 이유이자 순수한 기쁨 그 자체이니까. 마치 어린아이가 매일 같은 블록을 가지고 놀아도 매번 최고로 즐거운 것처럼 말이다. 잠재성을 현실화하는 과정인 '분화'가 괴롭게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아직 '차이의 반복'을 완벽하게 긍정하지 못해서일 수도 있다. 씨앗은 꽃이 될 때까지 그저 시원한 물을 빨아들이고 따스한 햇빛을 쬐며 하루하루 즐거움을 만끽하면 되는데, 괜히 '내가 정말 꽃이 될 수 있을까? 안되면 어떡하지?' 하며 걱정하거나, 씨앗 상태인 자신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분화'의 과정이 괴로워지는 것이다. 물론 그런 괴로운 시간 속에서도 하루하루 열심히 물을 빨아들이고 햇빛을 쬐면 언젠가 꽃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조금 더 성숙한 씨앗은 그 분화의 시간마저 순수한 기쁨으로 가득 채울 것이다. 그는 꽃을 틔울 것을 한치도 의심하지 않는 동시에, 꽃을 품고 있는 지금의 상태를 꽃을 피운 상태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니까. 이것이 들뢰즈가 말한, 진정으로 긍정적인 삶의 모습이다.
오직 마주침만 중요하다.
오늘 스승에게 질문 하나를 했다. 나의 스승은 오랫동안 컴플렉스였던 '실전 공포증'을 극복하기 위해 마흔이 다된 나이에 프로복서에 도전한 경험이 있다. 스승에게 물었다. 프로복싱 데뷔를 준비하는 기간이 '수행'처럼 느껴졌었냐고. 스승은 그렇다고 했다. 다시 물었다. 그럼 지금은 복싱이 '수행'처럼 느껴지냐고. 아니라고 했다. 현재 스승에게 복싱은 '순수한 기쁨' 그 자체다. 스승이 덧붙였다. 프로 데뷔를 준비하던 기간 복싱이 수행처럼 느껴졌던 건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아마 그 당시 스승도 '복싱을 잘 못하는 나', '실전 앞에 몸이 굳어버리는 나'를 긍정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복싱을 하면서 그 부정적인 자신의 모습들을 마주하는 것이 두렵고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다행히 스승은 오랜 '수행'을 거쳐 끝끝내 부정적인 자신의 모습들을 날려버렸다. 그 과정에서 스승은 깨달았던 것 같다. 부정적인 모습을 부정할 필요가 없다는 걸. 왜냐하면 어떤 부정적인 모습이라 할지라도 무언가와 마주치면 '잠재성'이 될 수 있고, '잠재성'이 된 순간 '현실성'은 결정된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내 스승이 무슨 신이겠는가. 당연히 그에게도 부정적인 모습들이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부정적인 모습을 긍정한다. 긍정하는 척 하는게 아니고, 진짜 긍정한다. 그게 그와 대부분의 사람들의 차이다.
그는 꽃을 피우지 않은 씨앗 상태를 긍정한다. 왜냐하면 그는 씨앗 상태에서 끈질지게 수행한 끝에 꽃을 피워본 경험이 몇번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번 씨앗에서 꽃이 된 반복을 한 그는 더 이상 씨앗 상태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씨앗이 곧 꽃이고, 잠재성이 곧 현실성이며, 미분화가 곧 분화라는 삶의 진실을 몇번이나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가벼워보인다. 속사정이야 모르지만, 그는 이제 '고달픈 수행'에서 대부분 벗어난 것 같다. 그의 삶에는 '순수한 기쁨'의 비중이 꽤나 커보인다. 그는 니체가 말한 '낙타-사자-아이'의 '아이'의 삶을 산다. 아, 나는 아직도 갈길이 참 멀구나.
나는 아직 '수행'을 해야 한다. 나는 아직 씨앗에서 꽃이 되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씨앗에서 꽃이 되어본 사람만이 씨앗 상태를 온전히 긍정할 수 있다. 나는 몸에 대한 컴플렉스도 깨야 하고, 관종욕구도 해소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춤이라는 영역과 페미니즘(아니면 철학)이라는 영역에서 나의 꽃을 피워봐야 한다. 그 꽃을 피우기까지 많은 '수행'의 시간이 필요할 테다. 그 '수행'의 시간이 참 빡셀 것 같다. 벌써부터 막 하기 싫고 두렵다. 하지만 난 '수행'을 넘어 아이처럼 '순수한 기쁨'만이 가득한, 진정한 의미의 '차이의 반복'을 하고 싶다. 그 삶에서는 오직 '마주침'만이 중요할 테다. 마주치면 반드시 현실화가 되고, 미분화와 질화 사이의 시간 또한 오직 기쁨의 반복으로 가득 메워질 테니까. 이제 왜 들뢰즈가 '마주침'만을 강조했는지 알겠다. '수행'은 근대의 망령에 찌든 우리같은 찐따들이나 어쩔 수 없이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다. 들뢰즈 같은 천재는 '마주침'만 한다. 선과 선 사이를 잇는 Z 모양의 마주침. 그 번개처럼 번쩍이는 순간. 차이가 차이를 낳는 순간. 세상은 오직 '차이'로 우글거리고, '차이'는 마주침과 반복을 통해 또다른 '차이'를 낳으며, 세상은 차이가 차이를 낳는 과정을 계속 되풀이할 뿐이다. 그게 들뢰즈가 본 세상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