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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Nov 25. 2019

자살에 대하여

죽음이 드러내는 삶의 진실

 자살 충동을 느껴본 적 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습관처럼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했을 때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죽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 속을 맴돌았다. 아무런 맥락도 없이 목욕을 하다가 "죽고 싶다", 밥을 먹다가 "죽고 싶다", 자기 전에 "죽고 싶다." 소심한 나는 옥상에서 뛰어내리거나 수면제를 먹는 것처럼 적극적으로 죽을 용기는 없었다. 극도로 유아적인 생각이지만, 암에 걸렸으면 했다. 그래야 남겨질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평온하게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남겨질 사람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남겨질 사람들의 생각을 했다는 것은 그만큼 죽고 싶은 마음이 절박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살의 문턱을 넘은 이들. 그들은 남겨질 사람들을 배려하지 못한 이기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남겨질 사람들을 생각할 작은 틈조차 없었던 이들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은 그토록 절박한 일이다.


 나의 자살 충동이 심해졌을 때, 샤이니의 종현의 자살 소식이 들려왔다. 학창시절에 좋아한 적 있었던 연예인이었다. 나는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 그의 유서를 읽고 또 읽었다. 한 문장, 한 문장 절절하게 와닿았다. 스위스에 있다는 '안락사 기계'를 검색해봤다. 이 기계에 들어가면 아무런 고통없이 죽을 수 있다고? 잠자는 듯 죽을 수 있다니 멋진 기계구나, 생각했다. 어느날은 아파트 베란다에 앉아서 창 아래를 내려다봤다. 손바닥으로 창에 붙어있는 난간도 지긋이 눌러봤다. 손바닥에 식은 땀이 쭉 나면서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역시 뛰어내리는 건 무섭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죽을 생각은 없었다. 끝도 없이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


 무엇이 젊은 나를 그렇게 몰아세웠던 것일까? 꿈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생각만해도 가슴 설레였던 꿈. 나의 인생은 오직 그 좆같은 꿈을 이루기 위한 여정이었다. 그 꿈만 이루면 궁극의 행복을 거머쥘 수 있을 거라 한치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스라이 보이는 그 꿈을 향해 달리고 또 달리고 또 달렸다. 늘 그랬듯이 열심히 하면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열심히 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죽고 싶었던 그 순간에도, 마음을 다 잡고 쉴새없이 뛰었다. 정성을 보이면 하늘이 감동하지 않을까 싶어, 무작정 일하는 시간을 늘리기도 했다. 그런데도 도저히 그곳에 가닿지 않았다. 어느 날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어떤 날은 심장이 조이고, 어떤 날은 계속해서 구역질이 났다. 꿈을 저 멀리 두고 나는 주저앉았다. 눈은 앞을 보고 있는데 몸은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런 나날이 지속되자 몸과 마음이 망부석처럼 굳어져 갔다. 무엇을 해도 재미도 없고 감흥도 없었다. 사는 이유도, 살아갈 이유도 알 수 없었다. 나는 옴싹달싹할 수 없는 유리방에 갇힌 것 같았다.


사방이 막혀 있는 방.




 그 시절 나는 자살한 연예인들의 기사에 달린 수많은 댓글을 하나씩 읽어 보았다. 그 중 '당신을 사랑하던 사람들을 생각해보지 그랬냐'는 댓글이 있었다. 사람은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나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죽지 않는다. 하지만 팬들의 사랑? 그건 사랑이 아니다. 자신이 미디어를 통해 보여주는 연극적인 모습만 보아온 사람을 어찌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는가? 애초에 그들은 자신이 진짜 모습을 본 적조차 없을텐데. 가족의 사랑? 적어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에게는 가족도 사랑의 대상이 아니었으리라. 자신이 아무리 힘들어도 돈을 계속 벌어오길 은근히 바라는 사람들을 어찌 사랑하는 이들이라 하겠는가. 친구의 사랑? 그것도 자살을 막을 만큼 밀도높은 사랑은 아니었으리라. 사랑은 우리에게 충만한 기쁨을 주고, 충만한 기쁨은 삶의 의욕을 가져다 준다. 다시 말해,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하지 못해서 죽은 게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걸 깨달아서 죽는 것이다.


 또, 너보다 못한 사람들도 열심히 살아가는데 왜 죽었냐는 댓글도 많았다. 그런 댓글을 쓴 이들은 타인의 죽음에서 자신의 결핍밖에 보지 못하는 이들일 테다. 그들은 돈이 많고 얼굴이 예쁜 사람은 행복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왜? 자신이 불행한 이유가 '돈이 없고 얼굴도 못생겨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이 돈이 많고 얼굴이 잘생기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생을 너무나도 단편적으로 보는 관점일 테다. 나는 오히려 그들에게 묻고 싶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가 왜 그런 선택을 내렸을지, 정말로 그의 삶의 맥락에 감정이입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냐고.


 마지막으로 "죽을 용기로 살지 그랬냐." 자살을 '나약함'으로 치환하는 것은 잔인할 뿐더러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생각이다. 자기 스스로 목을 메는 행위, 방안에 차오르는 유독가스를 보며 기다리는 행위는 어마어마한 용기를 요하는 일이다. 나처럼 오랜 시간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사람도 상상에만 그쳤던 이유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러한 근원적인 두려움마저 넘어 목숨을 끊었다. 왜 그랬을까? 죽는 게 사는 것보다 나았기 때문이다. 어떤 이에게 죽음은 구원이었으리라. 그는 죽을 용기로 살지 못한 것이 아니라, 죽음의 두려움을 넘어설 정도로 사는 것이 슬펐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살한 이들의 "죽음"이 아니라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닐까? 죽음의 공포마저 뛰어넘을 정도로 슬픔으로 가득했던 그들의 삶 말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자살'은 금기이기에, 우리는 누군가의 자살 소식을 듣고 죽을 용기로 살아보라는 둥, 사랑하는 이들이 얼마나 슬퍼할지 생각해보라는 둥, '무조건 죽지 않아야 된다'는 전제를 하고 같은 말을 되풀이할 뿐이다. 마치 그가 '죽지만 않으면' 만사가 행복했던 사람인 냥 말이다. 자살은 주변 사람들에게 한 사람의 삶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준다. 그 동안 외면하고 회피하고 숨겨져 있던 삶의 진실이 한 순간에 까발려지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의 고통스러웠던 삶을 진지하게 되짚어보기보단, 그저 '죽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하며 공허한 말만 늘어놓다가 이내 그를 잊어버리고 살아간다. 그렇게 한 사람의 죽음은 아무런 차이를 남기지 못한 채 허망하게 공중분해되어 사라져 버린다. 정말로 비겁한 것은 우리다. 목숨을 끊은 자의 삶을 제대로 헤아려볼 용기조차 없는 우리.

 



 무엇이 그들을 목숨을 끊을 정도로 슬프게 만들 것인가? 사람에 따라 직접적인 원인은 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자살을 택하는 사람들은 현재의 삶에서 아무런 해결책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다. 삶에서 솓아날 구멍을 찾을 수 없었기에 마지막 방법인 죽음을 택한 것이다. 어떤 이는 자살 충동에 시달렸던 나에게 "그 꿈말고 다른 꿈을 찾아보면 되잖아"라고 말했다. 실제로 어떤 꿈에 실패한 뒤 또 다른 꿈을 찾은 사람들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그 꿈 말고는 아무 의미가 없었기에 그건 해결책이 되지 않았다. 또, 폭력적인 남편과 살면서 죽음 충동에 시달리는 이를 알고 있다. 그녀에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혼하면 되잖아"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에게 '이혼'은 인생에서 한번도 존재한 적이 없던 선택지였다. 꿈을 버리지 못하는데 이루지도 못하는 상황, 이혼할 수는 없는데 하지 않으면 죽어가는 상황. 그렇게 나도 그녀도 스스로를 어디로도 움직일 수 없는 유리방 안에 가두었다. 자살이란 인생에서 선택지가 모조리 사라졌을 때 남는 마지막 선택지다.


 그래서 나는 정신과 의사나 상담사들의 말들이 공허하다고 생각한다. 자살 충동이 일렁일 때 정신과에 가서 상담을 받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내노라 하는 유명한 의사였다. 하지만 그의 처방은 약을 주는 것밖에 없었다. 약을 먹는다고 우울증이 낫는다면 이 세상에 우울증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겠지. 하지만 약은 우울증을 억누르는 것일 뿐 근원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상담도 마찬가지다. 상담사는 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공감하고 위로만 할 뿐 결정적인 해결책을 주진 않았다. 되돌아 생각해보건데, 그때 내가 자살 충동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던 유일한 해결책은 스스로 자신을 가둔 그 유리방 안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그토록 집착했던 꿈이 사실은 허망한 것이었다고, 나의 과거의 관념을 산산조각낼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내가 유리방에서 나와 새로운 삶을 살 의욕이 생겼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어떤 상담사도 나에게 그 역할을 해주지 못했다. 그들은 그저 나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심지어 어떤 상담사는 성취로 가득한 내 과거를 부러워하기까지 했다. 정작 나는 그놈의 성취 때문에 자살 충동에 시달린 것인데 말이다. 나를 적극적으로 유리방에서 끄집어낼 용기가 있는 이가 아니라면 어떤 상담도 크게 효과는 없다. 위로는 어느 정도 필요하긴 해도,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나는 철학을 배우고 나서야 비로소 그 유리방에서 나올 수 있었다. 철학은 내가 집착했던 그 꿈을 철저히 부숴주었다. 내 꿈이 진짜로 내가 원했던 것인지, 성취하고 유명해지고 돈을 많이 벌면 정말로 행복해질 수 있는지, 지금까지 내 삶을 지탱해주던 진리들을 처음으로 하나하나 의심해본 순간이었다. 스스로에 대해서 글을 쓰며 내가 왜 그 꿈을 가지게 되었는지, 왜 성취에 집착하게 되었는지 되짚어보고, 또 내가 행복했다고 생각한 순간들이 진짜로 행복했었는지, 아니었다면 내가 진짜 행복했던 순간들이 언제였는지 따져보았다. 그랬더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나를 꼭 옥죄고 있던 그 유리방이 사실은 뒷 벽이 뚫려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나는 늘 꿈을 향해 앞만 보고 있었기에 내가 그곳에 갈 수 없을 거란 생각만 했다. 하지만 시야를 돌리자 뒷 벽은 뚫려있었고, 나는 용기를 내서 그 뚫린 벽을 향해 한 걸음늘 내딛었다. 그렇게 나는 집착했던 꿈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새로운 삶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솓아날 구멍이 없다고 생각했던 삶에 솓아날 구멍이 생기자, 자살 충동도 사라졌다. 자살 충동이 사라진 자리에는, 앞으로의 삶에 대한 자유가 들어섰다. 한번 유리방에서 나와본 나는 이제 안다. 유리방에 갇혔다고 생각했을 때는, 앞이 아니라 뒤를 봐야한다는 것. 내가 집착하고 있는 어떤 것에서 시선을 돌리는 순간, 우리 뒤에서 자유와 그에 따른 삶의 의욕은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



 

나는 현재 잇따라 일어나고 있는 연예인들의 자살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자살 소식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연예계처럼 자본주의의 야수가 날뛰는 곳이 또 어디 있겠는가. 어려서부터 '성공한 연예인'이 되는 것만이 유일한 꿈이었을 이들. 그 유일한 꿈을 위해 현재의 행복들을 모조리 희생했을 이들. 회사의 '상품'으로서 모든 것이 실적화되어 자신의 가치를 하나하나 돈으로 평가받았을 이들. 투자한 만큼 뽑아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끊임없이 시달렸을 이들. 회사의 매출에 해가 되지 않도록 모든 삶을 감시당하며, '모든 이에게 사랑받는 사람'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들. 한 번의 실수에, 한 번의 실패에 너무 쉽게 다른 '상품'에 대체당하는, 언제라도 대체 당할 수 있다는 불안에 사로잡힌 이들. 연예계를 떠나고 싶어도 지금까지 이 길만 걸어온 탓에 다른 삶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들. 이러한 자본주의적 압박을 초등학교, 중학교부터 견뎌온 이들. 가족조차 자신을 '돈 버는 기계'로 보기에 그 험한 정글에서 벗어날 곳이 없는 이들. 모든 연예인의 삶이 그렇진 않겠지만, 적어도 극심한 경쟁에 시달리는 아이돌들의 삶은 이렇지 않을까.


 우울증에 걸린 연예인들도 아마 유리방에 갇힌 기분이었을 테다. 연예인의 삶은 견딜 수 없이 힘든데, 그렇다고 연예계를 떠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비단 연예인 뿐만 아니라, 지긋지긋한 회사 생활에 영혼이 썩어가고 있는 이들도 마찬가지일 테다. '죽고 싶다'는 생각은 현재의 삶을 지속하지도, 현재의 삶에서 벗어나지도 못할 때 비로소 고개를 든다. 그리고 그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거나, 아니면 삶의 압박이 견딜 수 없이 거세질 때 사람은 끝내 죽음을 택한다.


 그렇게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딱 한 가지다. 앞을 향해 있던 시선을 뒤로 돌리는 것. 앞에 아스라이 보이는 꿈, 인기, 명성, 돈, 안정, 가족의 안위 등의 가치에 한번은 철저하게 의문을 품어봐야 한다. 나는 왜 그것들에 집착하게 되었는지, 그것을 얻었을 때 진짜로 행복했는지, 아니라면 언제 행복했는지 제로베이스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물론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어려서부터 쫒아온 꿈이 아닌가? 그리고 모르긴 몰라도 연예계만큼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개인이 자유롭고 싶어도 자유로울 수 없는 곳도 없으리라.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설령 연예인의 삶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심정으로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연예인이라서 정말로 행복했는가? 만일 당신이 회사원, 사업가, 변호사, 주부, 어떤 직업이든 불행하다면 물어야 한다. 나는 이런 삶을 살아서 정말로 행복했는가?


 하지만 이 말은 약간 공허한 측면이 있다. 사람이 아무런 외부 자극없이 혼자서 생각을 바꾸기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저 약을 처방하고 위로의 말을 건네는 도움말고, 사랑하는 사람을 유리방에서 끄집어낼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용기가 뒷받침된 도움. 정말로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이가 괴로워할 때 함께 울며 이야기해주어야 한다. 네 영혼을 썩게 하는 그 곳에서 이제 그만 나오라고. 나와서 외롭고 불안하다면 내가 너의 곁에서 함께 하겠노라고. 그 정도로 밀도 높은 마음은 한 사람의 시선을 그가 집착하는 것에서 곁에서 도움을 주는 그 사람으로 돌리게 해줄 것이다. 사랑하는 이가 우울증을 겪고 있다면, 꼭 그렇게 말해주길 바란다. 그가 죽는 것을 막으려고 전전긍긍하기 전에, 죽을 만큼 힘든 그의 삶을 함께 들여다보고 아파해주길 바란다.


 자살은 사회적 문제다. 그토록 많은 이들이 자살이란 선택지에 몰리는 이유는, '나약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죽고 싶을 정도로 극단으로 몰아가는 사회 구조 때문이다. 아는 사람의, 혹은 공인의 자살 소식이 들려올 때 그를 추억하는 것도 좋지만, 누군가는 그의 삶을, 그의 삶을 그렇게 만들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마지막으로 그의 삶을 제대로 추도하는 방법일 테니 말이다. 부디 어떤 이가 죽음을 통해 내뱉은 처절한 삶의 비명을 불편하다는 이유로 외면하지는 말기를.


신화 김동완 씨의 글. 그처럼 죽음으로 드러난 삶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알리는 이들이 많아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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