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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Nov 19. 2019

나의 아이돌, 이세돌

이세돌의 은퇴 소식을 접하고

 예전에 써놓은 글인데, 이세돌 9단의 은퇴 소식을 듣고 생각나서 브런치에 옮겨 놓습니다.  



 바둑을 좋아한다. 해설 없으면 잘 이해하지 못하는 초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바둑이 좋다. 어렸을때 아빠랑 알까기를 하며 놀았던 행복한 추억 때문일까? 아니면 신체적으로 힘이 약한 사람이 피 튀기게 싸울 수 있는 유일한 스포츠여서일까? 흰돌의 매끈한 감촉, 검은돌의 사각사각한 느낌, 바둑판에 돌을 놓을 때의 '탁'하는 경쾌한 소리, 바둑기사들이 돌을 쥐는 손가락의 모양, 그들이 장고할때의 괴로운 듯한 표정. 그 모든 것이 매력적이다. 


 바둑의 가장 큰 매력은 '배치'에 있다. 바둑만큼 들뢰즈의 아장스망(배치)을 잘 표현하는 스포츠도 없다. 체스의 말은 종류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정해져 있지만, 바둑돌은 어느 위치에나 놓일 수 있다. 즉, 바둑에서 '배치'는 무한히 가능하다. 그래서 바둑에서는 한 수, 한 수가 큰 의미를 지닌다. 방금 놓인 한 수 때문에 지금까지 놓은 모든 수가 의미가 없어질 수도 있고, 반대로 모든 수가 의미 있어질 수도 있다. 바둑의 묘미는 한 수, 한 수의 배치가 만들어내는 예측불가능한 '생성'이다. 

 들뢰즈의 '스타일'에 대한 개념을 공부하며 서봉수9단과 조훈현9단이 떠올랐다. 그 두 바둑기사가 활약하던 시기에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아빠가 워낙 바둑 골수팬이어서 그 둘의 이야기는 잘 알고 있다. 조훈현은 우리나라 최초의 바둑 엘리트다. 어린 시절에 일본에 유학을 가서, 일본의 전설적인 바둑기사 세고에 켄사쿠의 제자로 수학했다. 그 뒤 한국에 와서 일본, 중국의 쟁쟁한 기사들을 모두 꺾고 세계 챔피언에 등극. 제자 이창호에게 왕좌를 빼앗길 때까지 한번도 위기를 겪지 않은 천재기사다. 조훈현의 바둑 스타일은 귀족적이다. 들뢰즈의 말을 인용하자면, "이미 있는 스타일을 엄청난 역량으로 가지고 있는 비창조자"다. 


 서봉수9단은 조훈현에 비해서는 유명하지 않지만, 매력점수로만 치면 만화 주인공급이다. 서봉수는 '프롤레타리아' 바둑기사다. 서봉수는 조훈현과 정반대의 삶을 살았다. 바둑 유학은 커녕 집이 가난해서 제대로된 바둑 교육을 받은 적도 없이, 기원에서 생활비(!)를 벌기 위해 내기바둑을 두다가 최정상 기사 자리까지 올라간 사람이다. 그당시 서민들이 서봉수의 등장을 환영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서봉수 vs 조훈현. 난 서봉수 편!


 조훈현이 엘리트 바둑을 둔다면 서봉수는 서민의 바둑을 둔다. 서봉수의 기풍은 '처절하고 독하다.' 내기바둑으로 바둑을 배웠기에 승부근성이 뛰어나고 끊임없이 싸움을 거는 힘바둑을 둔다. 어떤 팬은 서봉수의 바둑을 '수없이 상처가 나도 피를 철철 흘리며 끊임없이 덤벼들어 끝끝내 상대의 목을 베는 느낌'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안타깝게 서봉수는(물론 조훈현도 마찬가지로) 바둑의 신 이창호의 등장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그후 이창호가 거의 15년 동안 세계 바둑을 씹어 먹는다. 


 전성기의 이창호는 아무도 막을 사람이 없었다. 그런 이창호의 독주에 처음으로 제동을 건 사람이 이세돌이다. 사실 이창호와 이세돌 중 누가 더 강하냐고 묻는다면 열이면 열 이창호라고 답할 것이다. 나도 인정한다. 이창호야말로 "이미 있는 스타일을 엄청난 역량으로 가지고 있는" 기사다. 이창호는 미친듯한 계산력으로 모든 수의 가능성을 계산한 뒤 가장 안전하게 이길 수 있는 바둑을 둔다. 그래서 이창호는 항상 반집차이로 이기는 걸로 유명하다. 큰 위험부담을 지고 크게 이기는 길보다 작은 위험부담을 지고 작게 이기는 길을 택하기 때문이다. 


 이세돌은 이창호의 완전 반대지점에 있다. 이세돌은 싸움을 걸고 리스크를 쫒고 꼼수가 난무하는 바둑을 둔다. 그래서 크게 지기도 하지만, 말도 안되게 크게 이기기도 한다. 이세돌의 바둑은 재기넘치고 기발하며 보는 이들을 매료한다. 이세돌은 분명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내는 창조자"다. 아, 이세돌. 이 매력적인 남자. 창조자는 졸라 섹시한 법이다. 심지어 이세돌은 바둑뿐만 아니라 삶에서도 창조자적인 면모를 보인다. 이세돌은 꼭 자기 바둑같은 삶을 산다. 


이것이 정녕 바둑기사의 눈빛이란 말인가!


 승단대회가 비효율적이고 소모적이라며 승단대회를 거부해 프로3단이 챔피온 타이틀을 따는 진풍경을 만들어냈다(이세돌의 이런 반항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승단대회가 폐지된다). 한국 프로기사회가 기사들의 상금을 세금처럼 일괄적으로 떼어가는 것이 불합리하다며 프로기사회를 탈퇴해버리기도 했다. 또 한국기원의 부조리를 폭로하다가 맨날 징계 먹는다. 이세돌의 이런 저항정신 넘치는 삶, 재기 넘치는 바둑, 솔직하고 당당한 어록, 상대 기사를 야려보는 눈빛(이세돌 전에는 바둑기사들이 눈빛으로 기싸움을 하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바둑돌을 쥐는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 고뇌에 빠졌을 때 괴로워하는 표정. 그 모든 게 섹시하다. 이세돌은 예나 지금이나 나의 아이돌이다. 


 그래서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이 끝나고 몇주 동안 졸라 우울했다. 알파고라는 기계가 나의 아이돌을 짓밟는 것을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물론 아무도 알파고와 대결하려고 하지 않는 상황에서, "구글 정도 대기업이 대전료가 10억이 뭐냐"며 일침 한방 놓고 호쾌하게 대결을 받아들인 이세돌은 간지폭발이었지만, 표정도 실체도 없는 알파고와 수싸움을 하며 괴로워하는 그의 표정을 볼때 내 마음 속에서 무언가가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바둑의 무언가가 무너지는 기분, 나아가 인간의 무언가가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장고하는 이세돌. 긴 손가락 보소.


 스포츠는 스타일의 싸움이다. 스타일, 문체, 초상, 예술, 영토의 싸움이다. 누군가의 영토와 누군가의 영토가 부딪칠 때, 아름다움의 스파크가 튄다. 그 스파크 속에서 새로운 생성이 일어나기도 한다. 하지만 알파고에게는 스타일, 문체, 초상, 예술이 없다. 알파고는 이세돌이 되었다가 이창호가 되었다가 조훈현이 될 수 있으니까. 이제 알파고는 겨룰 상대가 없어서 알파고 자기자신과 대전을 하면서 자가증식하고 있다고 한다. 다시말해 알파고에게 이제 외부원인은 필요가 없다. 알파고에겐 영토가 없다. 알파고는 무한하다. 알파고는 신이다. 

 바둑의 영토를 초토화시켜버린 파괴자. 알파고는 이제 정말 바둑의 신처럼 모셔져서, 모든 기사들이 알파고의 수를 성경처럼 연구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건 바둑계에만 국한될 문제가 아니다. 애초에 구글은 범용적 인공지능을 만들기 위해 바둑을 이용한 것일 뿐이었으니까. 벌써 구글은 '알파고'에서 '고(Go, 영어로 바둑)'를 뗀, 범용적 인공지능 '알파'의 개발에 착수했다. 바둑의 신이 이제 세계의 신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인공지능은 생각보다 심오한 문제다. 우리가 바둑에서 알파고의 수를 이해하지 못하듯, 앞으로 인공지능이 다양한 사회적 문제에 우리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해법을 제시할지도 모른다. 만일 알파고가 '우리가 살기 위해서 지구를 버려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하면 어떻게 할 건가? 그리고 알파고가 제시한 근거를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면? 그럴때 우리는 알파고의 답을 따라야 할까? 그렇다면 알파고야말로 현존하는 '신'이 되는 것 아닐까? 

 아, 기독교적 신이건, 기술적 신이건, 신은 전지전능해도 멋대가리는 없다. 신이 등장하는 순간, 인간의 아름다움은 모조리 증발해버린다. 인간을 공격하는 인공지능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지능을 가진 인공지능을 두려워해야 한다. 신이 되고 싶은 과학자들 덕분에, 또다시 세상에 중세시대가 찾아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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