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혜원 Nov 11. 2019

각자의 꽃을, 서로에겐 주름을.

서로 질투하지 않고 함께 연대하는 공동체를 만드는 방법

 철학흥신소에는 내가 좋아하는 동생이 한 명 있다. 수줍음이 많은 그녀의 성격을 고려해 이 글에서는 그녀를 '주희'라고 칭하겠다.


 나와 주희는 글쓰기 수업에서 처음 만났다. 솔직히 처음에는 주희에게 별다른 인상을 받지 못했다. 더욱이 주희는 그 수업에서 글을 별로 열심히 쓰지 않았다. 첫째 주 과제가 인생의 행복했던 순간 3개와 불행했던 순간 3개를 쓰는 것이었는데, 주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선생님, 저는 불행했던 순간이 없었는데요?"라고 물었던 순간이 기억난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속으로 '웃기고 있네'라고 생각했다. 그 당시 나는 내 고통이 너무 큰 나머지, 다른 사람의 행복을 모조리 부정하고 싶은 마음에 휩싸여 있었다. 그래서 해맑은 표정으로 인생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주희에게 '그럴 리가 없어!'라고 외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구린 사람이었다, 내가.


 3개월의 수업이 끝나고 무언가 부족함을 느꼈던 나는 혼자서 계속 수업 때 글을 썼던 네이버 카페에 글을 써서 올렸다. 수업이 끝났는데 나 혼자 질척거리는 것 같아 민망했지만, 이제 막 인생에 대한 성찰이 시작되었던 터라 멈출 수도 없었다. 내가 글을 올리면 간간히 선생님만 반응해줄 뿐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그렇게 조용한 방에서 나만 시끄럽게 떠드는 나날이 몇개월 지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주희가 글을 올렸다. 회사도 너무 힘들고,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 건지 혼란스럽다는 내용이었다.


 아마 그때 처음 주희와 마주침이 일어났던 것 같다. 그때부터 주희는 자신의 밝은 모습 뒤에 숨겨져 있었던 힘든 기억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글을 보면서 주희가 그간 조용히 내 글을 읽고 있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 당시 나는 '과거의 기억들을 가감 없이 글로 쓰면, 과거와 다른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글쓰기 스승의 말을 맹신하여, 남 눈치는 개나 줘버리고 내 모든 부정적인 기억들을 글로 까발리고 있던 차였다. 오죽했으면 그때 철학흥신소에서 내 별명이 '정신적 노출증자'였다. 그때 나는 그토록 절박했다.


 그런데 내가 잘 살아보려고 혼자서 몸부림쳤던 흔적들이 의도치 않게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자극을 주었던 모양이었다. 주희도 나의 벌거벗은 글들을 보면서 '나도 외투라도 벗어볼까?'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주희는 그 후 띄엄띄엄 글을 올렸다. 글쓰기 수업때와는 다르게 어둡고 혼란스러운 글들이었다. 나는 주희의 그런 글들이 좋았다. 그때는 이미 내 과거 불행들을 어느 정도 정돈한 상태였기 때문에, 더 이상 주희를 보며 '내가 불행하니 너도 행복하면 안돼!'와 같은 나쁜 마음은 들진 않았다. 그보다는 주희도 자신의 숨겨둔 과거를 용기 있게 직면해 한 단계 높은 행복을 맛 보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고작 몇달 차이였지만 먼저 그 길을 가본 사람으로서 나는 주희에게 '선배 노릇'을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후 주희와 나는 느슨하지만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나갔다. 나는 주희가 글을 쓰면 제일 먼저 달려가서 글을 읽고 어줍잖은 지식을 총동원해서 이런저런 댓글을 달았다. 종종 주희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글로 쓰기도 했다. 내가 글을 쓰면 주희는 이것저것 질문이 잔뜩 적힌 카톡을 보내곤 했다. 주희는 '좋은 삶'을 살고 싶다는 욕심이 나만큼이나 큰 아이였다. 주희는 날 만날 때마다 눈을 동그랗게 뜬 특유의 표정을 하고는 "언니, 이 개념은 이런 뜻이에요?" 하면서 쉴 새 없이 질문을 했고, 가끔은 회사에서도 "언니, 제가 이런 마음이 드는 이유는 이렇기 때문이에요?"라며 카톡을 보냈다. 아마 스승에게 하기엔 좀 자잘해보이는 질문들을 나에게 했던 것 같다. 나는 그녀에게 '선배 언니' 위치였을 테니 말이다. 나는 삶에 대해 누구보다 진지하게 고민하는 그녀가 점점 더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렇게 일년 남짓한 시간이 흐르고, 주희는 용기를 내어 글쓰기 수업을 다시 신청했다. 본인 말로는 벼랑 끝에 선 심정으로 재수강을 하는 거라고 했다. 그런 절박함 때문인지 주희는 이전과 다르게 엄청나게 밀도 높은 글들을 쏟아냈다. 글의 밀도만큼이나 주희의 사유도 현기증이 날 정도로 빠르게 변화했다. 주희는 거의 매 주 다른 사람으로 재탄생하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그런 변화를 지켜보며 주희가 드디어 자신의 알을 깨고 나오는 것 같아 흐뭇했다. 하지만 몇 개월이 지나자 내 안에서 묘한 감정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건 질투심도 무시도 아닌, '위축'의 감정이었다.


 한번 사유가 열린 주희는 미친듯이 치고 나갔다. 그녀는 나와 달리 엄청나게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다. 감성이 무딘 나는 철학적 사유들을 오로지 지성의 힘으로 이해해왔다. A라는 개념과 B라는 개념을 이리저리 비교하고 분석하고 반론하고 재반론해보면서, 어떤 것이 더 삶의 진실에 가까운지 따져보는 식이다. 하지만 감수성이 뛰어난 주희는 철학적 사유들을 한방에 느낌으로 받아들이곤 했다. 마치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나는 '이건 이러저러해서 맛있구나!'라고 생각을 해야 한다면, 주희는 맛있음을 그냥 혀로 느껴버리는 식이었다. 글도 마찬가지다. 나는 글도 분석적으로 쓴다. 내 글은 내가 무언가를 느낀 순간을 철학적 사유와 접목해서 계속 가지를 쳐 나가는 구조를 띄고 있다. 전형적으로 근대적인 글쓰기다. 하지만 주희의 글은 구조가 없다. 주희의 글은 시나 이미지에 가깝다. 주희는 뛰어난 감수성으로 감각 기관이 느끼는 대로 자신을 표현한다. 주희는 나에게는 부족한 예술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다.


 내가 자본주의적 삶을 지향한다면 내 근대적인 사고 체계가 빛을 발하겠지만, 나는 이제 인문적, 철학적, 예술적인 삶을 지향한다. 그런 상황에서 나의 무딘 감성은 꽤나 큰 단점처럼 느껴졌다. 현대 철학자들은 하나 같이 감각과 감성에 따라 삶을 살라고 하는데, 나는 그놈의 감각과 감성이 거의 메마른 상태이니 말이다. 그래서 감성과 감각이 폭발하는 주희의 글들을 보면서 남몰래 위축되는 감정을 느꼈다. 그녀의 사유를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감각으로 느껴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주희는 보기 드물 정도로 따뜻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실제로 주희는 타인에게 나쁜 마음을 먹어본 적이 거의 없어 보였다. 그 당시 주희는 회사 팀장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 팀장은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팀원들을 도구처럼 사용하는, 어찌 보면 흔한 야심가 유형의 사람이었다. 한번은 주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언니, 팀장은 왜 우리를 그렇게 대하는 걸까요?"라고 진지하게 묻는데 말문이 턱 막혔다. 그녀는 한 번도 그런 욕망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 그 욕망이 어떤 것인지 정말로 모르는 것이었다. 나는 약간은 민망해하면서 "주희야, 몇년 전만 해도 내가 그 팀장같은 사람이었어."라고 대답했다. 주희는 "진짜요?"하면서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후에도 종종 그런 적이 있었다. 주희가 글에서 시골 할머니들이나 유기견들처럼 '자신이 아닌 존재들'을 향한 따뜻한 마음을 표현하면, 타인을 오직 짓밟고 올라가거나 이용해야 하는 대상으로만 생각했던 내 과거가 떠올라 씁쓸해졌다. 어려서부터 극심한 경쟁에 시달려온 나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내가 죽거나 다른 사람들을 다 죽여버리고 싶다는 감정에 휩싸이곤 했다. 글쓰기와 철학으로 많이 극복했어도, 아직도 내 안에는 그런 분노와 우울, 증오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래서 따사로운 시골 마을 같은 주희의 내면을 볼 때마다 내 안에 살고 있는 괴물 같은 감정들이 떠올라 조금은 슬퍼졌다. 주희를 보면 내가 아름다운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재확인 받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다행이 나는 그 위축된 마음을 질투나 시기 같은 부정적인 감정으로 해소하지 않았다. 나는 그냥 내 자리에서 계속 나의 결핍과 컴플렉스, 부정적인 감정들을 들여다보고 부지런히 글로 끄집어냈다. 또 주희의 글이 올라오면 누구보다 빨리 뛰어가서 열심히 읽었다. 주희가 내가 가지지 않은 걸 가졌다고 해서, 주희를 좋아하는 마음이 변한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위축되는 건 내 문제지, 주희의 잘못이 아니니 말이다. 그렇게 나는 주희가 점점 더 아름답고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가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진심으로 따뜻하고 기쁜 감정을 느꼈다. 그렇게 한두달의 시간이 지나자 주희에게 위축되었던 감정도 서서히 사라졌다.




 스승이 예측한대로, 주희는 언젠가 정말 멋진 예술가가 될 것이다. 그때 내가 그녀를 질투하게 되면 어쩌나, 고민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몇달동안 그녀에게 위축되는 감정을 느끼고 또 그 감정에서 벗어나는 경험을 하며, 나는 앞으로 좋아하는 동생이 나보다 더 멋진 사람이 되는 것을 진심으로 응원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위축된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나는 두 가지가 주효했다고 본다. 첫번째는 위축되는 마음에 굴하지 않고 나도 내 자리에서 아름다워지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게 나는 계속해서 내면을 들여다보고 성찰하며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나의 결핍, 나의 어두움, 나의 괴물같은 내면이 사실은 나의 아름다움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물론 내가 계속 남을 짓밟고 이용하고 싶다는 마음을 유지한다면, 나는 영원히 괴물 같은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러가지 결핍들을 끌어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걸음씩 아름다워지려고 노력해왔다. 그 노력의 시간이 짧긴 하지만, 중요한 건 시간이 아니라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다. 그 반복의 시간 위에서 나의 결핍은 나만의 아름다움으로 변모했고, 앞으로도 변모해갈 테다. 예를 들면, 나는 탐욕적인 시간을 보냈기에, 앞으로 게걸스러운 욕망을 가진 사람들을 안아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남에게 해악을 가하고 싶은 마음을 가져봤기에, 앞으로 뒤틀린 욕망을 가진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여자로서의 피해의식이 깊은 만큼, 누구보다 펄떡이는 페미니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내 결핍들에게 고마워해야할지도 모르겠다.


 감성의 영역도 마찬가지다. 내가 감성이 메마른 건 내 잘못이 아니다. 나는 예술따윈 세상 사는 데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그런 나에게 예민한 감성이 있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그 시간 동안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는 누구보다 충실히 근대교육을 수료했다. 그래서 무언가를 이해하고 언어로 설명하는데는 일가견이 있다. 또 근대적인 사고체계는 생각보다 철학을 공부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된다. 예를 들면, 나는 무언가를 이해할 때 세세하게 결을 친 뒤 그 결마다 나만의 반론을 제시하며 빈틈을 제거해가는데, 그렇게 꼼꼼하게 따져보는 버릇 덕에 기존 사유의 빈틈이나 새로운 관점을 꽤 잘 발견하는 편이다. 그건 분명 감성으로만은 메울 수 없는 어떤 영역이다. 게다가 세상에 나처럼 무언가를 감성보다는 지성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는가? 나는 그런 이들을 탈근대의 세상으로 안내하는 유능한 가이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건 또 얼마나 멋진 일이겠는가?


 이처럼 계속 아름다워지려는 노력을 반복하다 보면 질투나 시기 같은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그것 하나만으로는 부족하다. 생각해보면 내가 주희에게 위축된 감정을 느끼면서도 크게 의미부여하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주희를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주희가 왜 좋았을까? 지난 일년동안 적지 않은 마주침을 통해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기 때문이다. 들뢰즈 식으로 말하면, 나는 주희에게, 주희는 나에게 크고작은 주름을 새겨넣어온 것이다.


 정말 그렇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나의 벌거벗은 글들은 주희의 용기를 자극했다. 그 여파로 주희는 자신의 어두운 면에 대한 글을 쓰게 되었고, 또 그 글들은 내 마음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나는 주희가 조금 더 용기를 내도록 주희에게 보내는 편지같은 글을 계속 썼고, 또 주희는 그 글들에 반응하며 나에게 크고작은 기쁨들을 주었다. 반대로 주희는 두번째 글쓰기 수업에서 폭발적인 글들을 쏟아내며, 나를 다시 한번 성찰하게 해 주었다. 물론 주희에게 가장 많은 주름을 새겨넣은 사람은 스승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작더라도 주희에게 내가 새겨넣은 주름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서로에게 새겨놓은 주름들. 그것이 주희와 나를 연결하는 끈이 되어주었다. 그녀에게 나의 흔적이 있었기에 그녀의 기쁨은 곧 나의 기쁨이 될 수 있었다. 반대로 나에게도 그녀의 흔적이 있기에 나의 기쁨도 곧 그녀의 기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왜 내 스승이 종종 나에게 "혜원씨가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어서 기쁘다"라고 말했는지 알겠다. 나에게도 그가 새겨넣은 주름이 깊게 패여있기 때문이겠지.


 서로 질투하지 않고 함께 연대하는 공동체를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각자의 단독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아름다워지려는 반복을 멈추지 않는 것. 두 번째는 서로에게 끊임없이 주름을 새겨넣는 것. 첫번째만 있다면 너무 느슨한 공동체고, 두번째만 있다면 너무 끈적한 공동체다. 각자의 꽃을 피우는 동시에 뿌리는 단단하게 얽혀 있는, 느슨하고도 가깝고, 가깝고도 느슨한 공동체는 아마도 그렇게 만들어 나가는 것일 테다.

작가의 이전글 아름다움-되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