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횡성산골의 공부벌레

by 김혜원

내가 중학생 때 대치동에서는 조기 유학 붐이 거세게 불었다. 중 3때는 반마다 유학간 친구들이 전체의 삼분의 일에 달할 지경이었다. 유학을 가는 목표도 다양했다. 공부 좀 잘하는 친구들은 제 2의 홍정욱을 꿈꾸며, 공부에 관심 없는 친구들은 외국어 하나라도 마스터해 놓으면 나중에 쓸모가 있을 거라는 말에, 사고를 치던 친구들은 새로운 환경에서 새 출발을 해보라는 부모의 권유로 유학길에 올랐다. 상황에 따라 목표는 달랐지만, 모두들 '한국보다 더 나은 무엇'을 바라며 유학길에 오른 건 동일했다.


나 또한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미국 고등학교 진학을 꿈꾸며 조기 유학을 준비했다. 학교 공부랑 병행해서 2년 동안 학원에서 미국 중학교 커리큘럼에 맞춰 공부를 했고, 미국 고등학교 입시 시험인 SSAT와 토플 시험도 따로 준비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일이년 뒤, 대치동 학부모들 사이에서 조기 유학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나보다 먼저 유학을 떠났던 친구들 중 상당수가 유학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심하게 방황했고 몇몇은 우울증이나 공황장애 같은 정신질환마저 얻었기 때문이었다. 고작 열 네다섯살 먹은 아이들에게 가족 한 명 없는 타지에서 인종 차별을 견디며 백인들과 동일한 조건으로 경쟁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그러던 중 한국의 몇몇 특목고에서 유학반을 개설하여 학생들에게 미국 수능인 SAT를 가르쳐 해외 명문대학에 진학시킨 사례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민족사관학교(민사고) 유학반은 미디어에서도 자주 다룰 정도로 아주 유명했다. 나는 2년 동안 조기 유학을 준비하다가 중학교 3학년 때 민사고 유학반 학생들이 쓴 책을 읽고 민사고로 목표를 바꿨다. 친구들의 소식을 듣고 조기 유학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기도 했고, 당시에는 책에 적혀 있던 민사고의 모든 것(예를 들면 한복을 교복으로 입는 것, 체육시간에 골프를 치거나 국궁을 하는 것, 모든 수업을 영어로 하는 것 등)이 너무나도 특별해 보였기 때문이다. '글로벌 리더'라는 꿈을 이루기에 이보다 더 적합한 곳은 없어보였다. 다행히 조기 유학 준비와 민사고 입시는 겹치는 부분이 많았기에, 나는 몇 개월 간 민사고 입시 준비를 더 해서 중학교 3학년 2학기에 민사고 유학반에 합격했다.





민사고에 합격한 뒤, 나는 스스로가 자랑스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내가 민사고 학생이라는 사실은 단순히 중학교 때 공부 좀 잘해서 선생님한테 칭찬 받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자부심을 안겨 주었다. 당시 민사고는 매년 전국에서 100명 남짓한 학생들만 선발했고, 강원도에 있는 기숙 학교라는 신비한(?) 이미지까지 더해져 특목고 사이에서도 특목고 대우를 받았다. 덕분에 어딜가나 내가 민사고에 다닌다는 사실만 밝히면 또래뿐만 아니라 어른들 사이에서도 즉각적으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내가 민사고에 합격하자 우리 중학교에는 내 이름이 커다랗게 적힌 현수막이 걸렸고, 우리 집에는 자식 교육 노하우를 묻는 동네 엄마들의 전화가 쏟아졌다. 민사고 재학 중에 우연찮게 <횡성산골의 공부벌레들>이라는 KBS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적이 있는데, 그 방송이 나간 뒤로는 한 동안 동네에서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모두들 나를 신기해하고 대견해 했다.


철 없던 나는 나에게 쏟아지는 관심이 너무나도 달콤했다. 그리고 그러한 관심이 달콤했던 만큼, 민사고에 대한 나의 자부심은 부풀어 올랐다. 그건 비단 나만 느끼는 기분은 아니었으리라. 민사고 입학식 날, 강당을 가득 메우던 그 들뜬 공기가 생각난다. 한복에 두루마기까지 갖춰 입고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친구들. 그 못지 않게 상기된 표정으로 자식의 모습을 연신 카메라에 담던 부모님들. '자랑스러운 아들딸'이 되었음을 자화자찬하는 각종 엄숙한 의식들을 치르며 우리들은 마치 대단한 무언가를 이룬 듯한 기분에 빠졌고, 학교 측은 우리가 성취를 통해 거머쥔 보상이 생각보다 훨씬 더 값지고 귀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홍보했다. 입학식이 끝나고 선생님들의 안내를 따라 골프장, 국궁장, 마라톤 트랙 등 휘황찬란한 학교 시설을 둘러보며, 민사고 출신들이 미래에 노벨상을 받을 것을 고려하여 동상 좌대 수십 개를 학교 곳곳에 미리 설치해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여기저기서 작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러한 환희의 기쁨은 입학식이 끝난지 며칠이 채 되지 않아 급속도로 사그러들었다. 민사고에 합격했다는 자부심을 즐기기도 잠시,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다음 목표를 향한 경쟁도 시작되었다. 민사고에서의 생활은 군대에 비견될 정도로 매우 힘들고 괴로웠다. 아침 6시에 기상해서 운동을 하고 9시부터 6시까지 수업을 듣고 7시부터 12시까지 자율학습을 하는 일과가 매일 반복되었다. 자율학습도 말만 '자율' 학습일 뿐, 학생들이 방에서 공부하는 걸 사감 선생님이 CCTV로 감시했기에 사실상 '강제' 학습이나 다름 없었다. 일주일 중 휴일은 일요일 하루, 집에는 한달에 한번 갈 수 있었고, 방학은 여름 2주, 겨울 2주로 일 년에 한 달 밖에 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민사고는 학생들을 통제하는 교칙도 매우 다양하고 폭력적이었다. 당시에는 매주 금요일마다 강당에 모여 한 주동안 교칙을 위반한 학생들을 줄 세워 무릎 꿇게 해놓고 한명씩 단상 위로 불러내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벌을 주는 '학생 법정'이라는 제도가 있었는데, 종아리에 피가 나고 시커먼 멍이 들 정도로 회초리를 맞아야 하는 이유가 고작해야 수업 시간에 졸거나 방 청소를 소홀히 하거나 선생님에게 '건방진 태도(Insolent attitude)'를 보였다는 사소한 교칙 위반 때문이었다. 또한 '모든 대화를 영어로 해야 한다'는 영어상용화 정책(English Only Policy) 때문에 수업은 물론 친구들과 수다를 떨 때도 영어를 써야했는데, 만일 한국어로 대화를 하다가 적발되면 그 역시도 법정에서 회초리를 맞는 대상이 되었다. 이 영어상용화 정책 때문에 원어민 선생님을 제외하고는 선생님들조차 밥을 먹을 때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국어나 국사 수업도 영어로 하는 기묘한 상황마저 발생했다.



물론 또래 아이들과 함께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즐거웠던 추억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감 선생님 몰래 장농에 숨겨둔 햇반과 고추참치로 야식을 먹기도 하고, 밤에 CCTV를 피해 학교를 빠져나와 도보 30분 거리의 휴게소에서 우동을 먹는 즐거움도 있었다. 일요일에 부모님이 면회(?)를 오시면 횡성 시내에 나가 소고기를 먹고 베스킨라빈스를 사와 룸메이트들과 나눠 먹었고, 가끔 학생식당 아주머니들이 선생님들 몰래 라면을 끓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소소한 추억들과는 별개로 또래 아이들과 함께 살며 경쟁 때문에 힘든 점이 많았다. 어렸을 때부터 항상 1등만 하던 아이들을 한 기숙사에 몰아 넣고 같은 목표를 향해 달리게 했으니 경쟁이 치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말에 친구들끼리 수다를 떨다가도 한 친구가 자리를 뜨면 다 같이 일어나 공부를 하러 갔고, 12시에 기숙사 방에 소등이 되어도 한 친구가 비상 렌턴을 켜고 복도에 나와 공부를 하면 줄줄이 따라 나왔다. 많은 친구들이 다른 친구가 혹시라도 나보다 공부를 더 많이 할까봐 늘 경계하고 불안해 했다. 시험이 끝나자마자 다음 시험을 준비하는 친구들도 있었고, 세수하는 시간을 아끼려고 단어장을 세면대 옆에 두고 세수를 하는 친구도 있었다. 경쟁이 과열되어 공부 잘하는 친구의 필기 노트가 갈갈이 찢겨 화장실 변기에 처박힌 채 발견되는 사건도 심심찮게 일어났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몇몇 아이들은 우울증에 걸리거나 위궤양, 피부병, 탈모 등의 질환에 시달렸고 견디다 못해 결국 유급하거나 전학을 가는 친구들도 있었다.


더욱이 내가 있던 유학반에서는 ‘외부 활동(Extracurricular Activities)’에 대한 집착 때문에 그야말로 ‘웃픈’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미국 명문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시험 성적뿐만 아니라 학교 안팎에서 논문, 실험, 운동, 예술 등 다양한 활동들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 대학들은 공부만 잘하는 모범생보다는 공부, 리더십, 봉사활동, 운동 등 다양한 분야의 능력치가 골고루 균형잡힌(Well-rounded) 인재를 훨씬 선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생 공부만 해온 아이들이 어떻게 갑자기 '외부 활동'에서 좋은 성과를 낼 수 있겠는가. 그래서 각종 꼼수들이 난무했다. 학교와 학부모들은 합심해서 희귀 스포츠들을 찾아냈다. 수영 대회에 나가면 입상할 수 없으니 아무도 모르는 '핀 수영(오리발을 차고 하는 수영)' 대회에 나가자는 식이었다. 1학년 때는 학교에서 전국 줄다리기 대회 여성 부문에 네 팀밖에 출전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입수해 여학생들을 두달 동안 연습시켜 동메달을 따게 했다(물론 나도 대학원서 외부활동란에 그 수상기록을 잘 써먹었다). 어떤 친구가 방학 동안 교수 부모님을 따라 실험이나 논문 성과를 만들어오면 다들 어떤 주제라도 잡아서 논문을 썼고, 누가 영어 동화책을 써서 출판했다고 하면 줄줄이 책을 출판했다. 심지어 누가 봉사활동으로 헌혈을 했다고 하자, 어떤 부모님이 헌혈차를 학교에 불러서 다같이 피를 뽑기도 했다(하필이면 시험 끝난 당일이라서 헌혈을 하다가 실신한 친구도 있었다). 미국 대학 입시에는 자기소개서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우리 선배 중에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주제로 글을 써서 예일대학에 합격한 사례가 나오자, 우리 학년 아이들이 내 인생에는 왜 그런 흥미로운 소재가 없냐며 한탄할 정도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기괴하고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지만, 당시에는 학생들도 학부모들도 원서에 돋보이는 한 줄을 넣기 위해서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공부 뿐만 아니라, 외부 활동, 아니, 삶 전체를 대학 원서에 맞춰 만들어냈다. 가끔 이게 뭐하는 짓인가 현타가 올 때도 있었지만, 대학입시라는 일생일대의 경주에서 '낙오자'가 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음 입학식에는 초대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 그 불안이 모두를 추동했다. 나 또한 다시 한번 자랑스러운 입학식의 일원이 되기 위해 밤새 공부하고 피를 뽑고 관심 없는 외부 활동들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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