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딸 바보와 아빠 바보

by 김혜원

나의 아버지는 꽤 성공한 사업가다. 그는 이십 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사업을 시작해 이듬 해 대박을 터뜨리며 자수성가에 성공했다. 내가 태어나던 해, 고작 서른 몇 살이던 그는 이미 평생 돈 걱정은 안 해도 될 만큼의 부를 축적했다. 사회를 쥐락펴락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고 처자식을 좋은 환경에서 부양하고 부모형제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기에는 차고 넘칠 만큼의 부였다.


남들보다 일찍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서였을까? 아니면 그 또한 부모로부터 받은 결핍을 자식들에게 대물림하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그는 경제적 여유를 바탕으로 누리게 된 정신적, 시간적 여유를 두 딸들에게 아낌없이 쏟았다. 이모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딸들의 기저귀를 손수 가는,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가정적인’ 남자였다. 확실히 내 기억에도 아버지는 ‘좋은 아버지’의 이미지로 남아 있다. 나를 이름이나 ‘둘째 딸’이 아닌,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애칭으로 불러주던 남자. 눈이 오는 날이면 놀이터에 나가 내 키의 두 배는 되는 커다란 눈사람을 만들어주던 남자. 동화책을 읽어주는 대신, 매일 밤 자기가 만들어낸 요상한 수수께끼 문제를 풀어보라고 하던 남자. 방패연과 고무 동력기와 미니카를 끝장나게 만들어 주던 남자. 아직도 나를 어린 아이를 보듯 바라보는 남자. 아버지.



아버지가 ‘딸 바보’였던 만큼, 나는 ‘아빠 바보’로 자랐다. 나는 세상에서 아버지가 제일 좋았다. 유치원 때는 아버지와 결혼하는 게 꿈이었고, 철 들고 나서는 아버지와 닮은 남자와 결혼하는 게 꿈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당시 아버지는 어린 딸이 좋아할 만한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주말마다 딸들과 시간을 보내는 아버지였을 뿐만 아니라, 해외 출장을 다녀올 때마다 신기한 외제 장난감을 가방 한가득씩 사오는 아버지이기도 했으니까. 나는 그 장난감을 일부러 학교에 들고 가서 친구들 앞에서 자랑하고는 했다. 한번은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 새로 도서관이 지어지자 아버지가 도서관에 필요한 책 전부를 기증한 적이 있다. 그 후 도서관 한 구석에는 “김혜원 父 기증”이라는 글자가 새겨졌고, 그 글자를 지나칠 때마다 나는 은밀한 뿌듯함을 느끼곤 했다. 오랜시간 동안 아버지는 나의 사랑이자 자부심이었다.






아버지를 사랑한 딸이 아버지의 사랑을 갈구하게 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나에게 아버지가 '자랑스러운 아버지'였듯, 나도 그에게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였을까. 어린 시절 나의 시선은 늘 아버지를 향해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를 항상 주의 깊게 관찰했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해서 아버지가 기뻐하면 그 행동을 계속 했고, 어떤 행동을 해서 아버지가 싫어하면 더 이상 그 행동을 하지 않았다. 약간의 비극이라면, 그렇게 관찰한 끝에 나는 아버지가 원하는 것이 딸이 아닌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너무 빨리 알아버렸다. 실제로 아버지는 언니가 태어난 뒤 어머니가 나를 임신하자, 이 아이는 반드시 아들일 것이라고 기대를 넘어 확신까지 했다고 했다. 남아선호사상이 팽배했던 시절이고, 아버지 입장에서는 아들이 있어야 사업을 이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버지의 확신을 깨고 딸의 몸으로 세상에 태어났고, 아버지는 두번째 딸을 마주하고 한동안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돌이켜 생각해보건데, '아빠 바보'였던 나는 그 사실을 이미 다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나는 아버지가 아들을 원한다는 걸 알았고, 아버지도 기약 없는 셋째 아들을 기다리기보다 지금 있는 둘째 딸을 아들처럼 기르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였을까. 아버지는 내가 '남성적'인 행동을 하면 유난히 기뻐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내가 신발 주머니를 휘둘러 동네 남자아이들을 때리고 다니면 어머니는 나를 혼냈지만 아버지는 '고녀석 왈가닥이네!'하며 껄껄 웃었다. 반대로 내가 울거나 의기소침해 있으면 세상에 울어서 해결되는 일이 어디 있냐며 화를 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내가 유치원생이었을 때 담력을 기르게 한다며 나를 정글짐 꼭대기에 올려놓고 혼자서 내려오라고 한 적도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어디서도 기죽지 않는 강한 사람이 되길 바랐다. 내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기집애처럼 굴지 말라고, 기집애인 나를 혼냈다.



“열 아들 안 부러운 딸.”


그래서였을까? 아버지는 나를 칭찬할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를 사랑했던 나는 저 말이 아버지가 나에게 원하는 바로 그것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나의 인생 목표는 '열 남자에게 꿀리지 않는 여자'가 되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힐러리 클린턴, 마가렛 대처 등 한 사회를 주름 잡았던 여성들의 위인전을 섭렵했고, 중고등학교 때는 휴렛패커드의 CEO 칼리 피오리나, 미국의 국무장관 콘돌리자 라이스, 한국 MCM 김성주 대표 등 현존하는 정재계 여성 리더들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조금 더 ‘구체적인’ 꿈을 키워나갔다. 남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아니 남자들을 발 밑에 두는 세계적인 여성 리더. 철 들고 나서부터 나의 꿈은 오직 그것 하나였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이 흔들린 적이 없기에, 그가 원하는 모습이 되고자 했던 마음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목표와 꿈이 확고했고, 아버지의 바람처럼 지는 것이 죽기보다 싫은 아이로 컸다. 학창시절 나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려고 공부든 교우관계든 모든 것을 기를 쓰고 잘 해냈다. 나는 교육열로 악명 높은 대치동에서 ‘공부 잘 하면서 잘 노는 애’로 유명했다. 전교 1등, 반장, 학생 회장 등 부러움의 대상이 될 만한 것은 모조리 수집하듯 모았다. 나를 맡은 담임 선생님들마다 혜원이처럼 장래가 기대되는 학생은 처음이라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친구 엄마들은 친구들을 혼낼 때 "너도 혜원이처럼 좀 해 봐."라며 나를 비교 대상으로 삼곤 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칭찬의 목소리가 커질 수록, 나는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까봐 미친듯이 불안해졌다. 중고등학교 때 시험을 보기 전 날이면, 나는 모든 공부를 끝내놓고 혼자 방에서 삼백 배 절을 하며, 믿지도 않는 신에게 "제 수명을 줄이셔도 되니까 제발 이번 시험에서 하나도 안 틀리게 해주세요."라고 빌었다. 시험지를 받으면 잘 해야한다는 생각에 손과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 전국에서 공부 좀 한다는 애들이 상경하듯 전학오는 대치동에서 한두문제를 틀린다는 것은 실수가 아니라 실력이었으니. 게다가 좋은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내신은 물론이고, 그 외에 경시대회나 토플, 토익도 잘해야했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경시대회 학원에서 고등학교 수학과 과학을 선행학습했다. 학원에서는 매일 시험을 보고 틀린 갯수만큼 야구 빠따로 등을 후려치거나 커트라인 점수를 통과하지 못하면 저녁 밥을 못 먹게 했다. 나도 공부를 꽤나 잘 하는 편이었지만, 그런 학원에 가면 초등학교 고학년에 대학 수학을 끝마치거나 중학교 때 미국 수능 만점을 받는 괴물 같은 아이들이 있었기에 항상 불안했다. 충분히 잘 하고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더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항상 숨이 턱 막힐 때까지 뛰고 있는 기분이었다. 학창 시절 내내 나는 소화장애와 빈혈, 약간의 공황장애에 시달렸다. 그리고 그렇게 전력질주한 끝에 중학생들의 꿈의 학교인 민족사관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곳이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딸'이 되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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