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 들뢰즈 A to Z」(질 들뢰즈) 강독 후기
내가 들뢰즈를 처음 만난 건 지금으로부터 2년 전, 2019년 2월경이었다. 첫 번째 수업은 들뢰즈가 그의 제자 끌레르 파르네와 진행한 인터뷰 영상 「질 들뢰즈 A to Z(L’abecedaire de Gilles Deleuze)」 수업이었다. 그 뒤로 매주 목요일마다 그의 저서 「차이와 반복」, 「스피노자의 철학」, 「천 개의 고원」에 대한 원문 수업을 듣고 있지만, 여전히 나는 그를 처음 만났던 「질 들뢰즈 A to Z」 수업에 가장 애착이 간다. 그의 사유를 처음 접해 신선한 충격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항상 글로만 접해왔던 철학자를 생생하게 움직이는 모습으로 볼 수 있었다는 게 큰 매력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들뢰즈의 저서를 읽을 때 가끔씩 보랏빛 스웨터를 입고 백발을 한 들뢰즈가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제자 파르네를 부드럽게 돌려 까는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르곤 한다.
「질 들뢰즈 A to Z」에서 들뢰즈는 제자 파르네가 ‘A’의 동물(Animal)에서 ‘Z’의 지그재그(Zigzag)까지 알파벳의 각 글자로 시작하는 단어를 주제로 던지는 질문에 그의 생각을 말한다. 사실 처음에는 들뢰즈가 하는 말의 대부분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가 말하는 ‘내용’도 생소한데, 그 말을 하는 ‘방식’까지 생소하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의 상식에 거스르는 내용들을 논리나 설명 대신 굉장히 함축적이고 이미지적인 언어를 통해 전달한다. 마치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라는 성철 스님의 말을 처음 들으면, 그 말의 정확한 맥락과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들뢰즈의 사유를 처음 접하면 대부분은 멘붕에 빠진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듯, 들뢰즈의 사유 또한 계속 만나다보면 어느 순간부터 들뢰즈를 이해하는 나만의 희미한 윤곽이 생기기 시작한다. 아마도 그 희미한 윤곽이 들뢰즈의 사유가 내 삶에 들어와 화학작용을 일으켜 만들어낸 ‘나만의 단독적인 지식’일 테다.
들뢰즈의 말과 글이 매력적인 것도 그 때문이다. 들뢰즈의 말과 글은 한 문장, 한 문장 밀도가 높지만, 문장과 문장 사이에 여백이 많다. 그래서 가끔은 시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다. 들뢰즈는 설명충이 아니다.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 있지만, 그것을 논리에 따라 단계적으로 빽빽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아마 그럴 수 없어서 그런 것일 테다. 그는 우리에게 ‘세상’이 무엇인지 보여주고자 하니까.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가르치려 한다고 생각해보자. ‘상대에게 성적으로 이끌려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의 상태’라는 백과사전의 정의를 알려준들, 사랑의 그 모호한 감정을 전달할 수 있을까? 그럴 때는 오히려 어떤 작가가 ‘사랑’에 대해 쓴 소설이나 어떤 화가가 ‘사랑’의 감정에 대해 그린 그림을 보여주는 것이 훨씬 더 ‘사랑’의 많은 부분을 전달할 수 있다. 모호하기에, 더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들뢰즈의 말과 글에는 여백이 많기에, 읽는 이의 삶의 맥락이 들어갈 자리가 생기게 된다. 그래서 들뢰즈의 수업을 들으면 같은 수업을 들었는데도 사람들마다 기억하는 부분이 다 다르다. 나는 기억도 안 나는 문장이 어떤 이에게는 일주일 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정도로 강렬한 문장이 되고, 들뢰즈가 흘리듯이 했던 말이 나에게는 삶을 되짚어보게 할 만큼 의미 있는 문장이 된다. 이는 우리가 일반적인 책을 읽을 때와는 확연하게 다른 점이다. 많은 경우, 저자는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배워가야 할 지식을 미리 정해놓는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책을 읽은 독자들은 모두 비슷한 내용을 습득하게 된다. 같은 책을 읽으면 모두 비슷한 독후감을 쓰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들뢰즈의 글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마다 꽂히는 문장이 다르다. 마치 들뢰즈가 뷔페를 차려놓고, 독자들에게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알아서 찾아 먹으라고 하는 것 같다. 그러면 고기가 땡기는 사람은 고기를 먹고, 야채가 부족했던 사람은 야채를 먹는다. 그렇게 섭취된 고기와 야채는 각자의 몸에 들어와 영양분을 제공하고 궁극적으로는 몸의 일부가 되어 몸의 성질을 조금씩 바꾼다. 들뢰즈를 공부하면서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그때그때 내 상황에 따라 유독 땡기는 문장들이 있었다. 아마 그 당시 내가 고민하거나 갈구하던 부분과 닿아있는 내용들이었을 테다. 그런 문장들은 가슴에 들어와 궁극적으로 내 삶을 조금씩 바꾸었다. 들뢰즈는 삶을 변화시키는 철학자다.
들뢰즈 첫 수업인 「질 들뢰즈 A to Z」에는 유독 기억에 남는 문장들이 많았다. 영상이라서 들뢰즈의 말이 숨소리, 목소리, 분위기 등과 어우러져 하나의 장면으로 구성되어 그렇기도 하고, 아무래도 ‘말’이라서 ‘글’보다는 밀도가 낮았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제자 파르네에게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동화책 읽어주듯 조곤조곤 이야기해준 많은 철학적 사유 중에 유독 나에게만 강렬하게 인상에 남았던 부분이 있다.
파르네 : "당신은 유명하지만 숨어 다니는 것을 좋아하시는 편이잖아요."
들뢰즈 : "난 내가 유명하다고 느끼지 않는다네. 은밀히 다닌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사실 내가 원하는 것은 아예 인지되지 않는 것이야. (...) 지각되지 않는 것은 정말 멋질 거야. 이것은 개인적이 문제지. 사람들이 나를 방해하지 않는 것이고 사람들이 나의 시간을 빼앗지 않는 것이라네. 하지만 그러는 동시에 사람들을 보게 되지. 왜냐하면 나는 그래야 하니까. 나도 다른 사람들과 같다네. 나는 사람들을 좋아한다네. 결국 나는 어떠한 소수의 사람들을 좋아하고 그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네. 하지만 내가 그들을 만날 때, 그것이 어떠한 문제도 일으키지 않길 바란다네. 인지되지 않는 사람들과 인지되지 않는 관계를 가지는 것. 그게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이지. 우리는 모두 아주 작은 구성요소들이잖아. 구조의 소립자들이지."
「질 들뢰즈 A to Z」, Resistance(저항)
이 부분을 가르치며 스승은 “자신이 우주의 소립자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권력 의지가 의미 없음을 안다."고 덧붙였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우주의 소립자’, ‘권력 의지’라는 단어에 꽂혔다. 그리고 서양 철학의 끝판왕이라고 불리는 들뢰즈가 자신이 인지되지 않길 바란다고 하는 것도, 인지되지 않는 사람들과 인지되지 않는 관계를 갖고 싶다고 하는 것도, 자신이 아주 작은 구성요소라고 하는 것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실제로 들뢰즈는 당대의 유명한 다른 철학자들과는 다르게 방송 출연을 하지 않고, 적극적인 정치 활동도 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이름을 딴 학파를 만들지도 않았다. 박사 논문인 「차이와 반복」을 내자마자 일약 스타가 되지만, 평생을 몇몇 대학에서 강의를 가르치고 책을 쓰며 조용히 삶을 보냈다. 나는 그런 들뢰즈의 삶이 이질적이면서도 굉장히 멋있게 느껴졌다. 나라면 박사 논문으로 스타 대접을 받는 순간부터 내 자신에 흠뻑 취해 각종 관종 짓은 다 하고 다녔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또 들뢰즈가 자신을 ‘아주 작은 구성요소’라고 일컫는 부분에서, 천하의 들뢰즈도 자기를 ‘소립자’라고 하는데 내가 어떻게 스스로를 ‘특별한 사람’이라 생각할 수 있나, 부끄러워졌다. 무엇보다 스승의 말이 걸렸다. 나는 권력 의지가 강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도, 너도, 인간도, 동물도, 그저 '우주의 알갱이'라는 것을 알면 권력 의지는 절대로 생길 수 없다. 권력 의지는 ‘나는 너보다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라는 인식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특별하고 싶었다. ‘졸라’ 특별하고 싶었다. 그게 지금까지 내 인생의 유일한 동력이었다.
나는 굴곡진 삶을 살지 않았다. 집안은 부유했고, 가족 관계도 큰 문제는 없었다. 학창시절에 공부도 잘했고, 친구들과의 관계도 원만했고, 딱히 큰 상처가 될 만한 사건도 겪지 않았다. 내가 만일 ‘돈’에 대한 결핍이 컸다면 ‘부’를 욕망했을 테고, 가족에 대한 상처가 있었다면 ‘화목한 가정’을 욕망했을 테다. 하지만 나에게는 구체적인 결핍이 없었다. 그래서 구체적인 욕망도 없었다. 대신 막연하게 사람들의 관심과 인정을 욕망했다. 내가 ‘특별함’이라는 모호한 이미지를 욕망했던 건 그 때문이다.
특별하고 싶었다. 특별하면 사람들의 관심과 인정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 인생의 모든 굵직굵직한 선택들은 ‘특별해지고 싶어서’ 내린 결론이었다. 남들보다 특별한 학창시절을 보내고 싶었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민족사관고’를 갔다. 남들보다 특별한 대학생활을 보내고 싶었다. 그래서 미국으로 대학 유학을 갔다. 남들보다 특별한 진로를 택하고 싶었다. 그래서 졸업 후에 취직을 하지 않고 스타트업을 창업했다. 나의 욕망은 ‘남들과 다른 삶’이었다. 남들과 달라야 차별화가 되고, 차별화가 되어야 특별해지고, 특별해져야 눈에 띄고, 눈에 띄어야 인정과 칭찬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들과 다른 삶.’ 얼핏 들으면 멋있어 보일 수도 있지만, 이보다 더 뜬구름 잡는 욕망도 없다. 대체 ‘남들과 다른 삶’이 무엇이란 말인가? 모든 이들의 삶은 이미 ‘남들과 다르다.’ 세상에 같은 삶은 단 하나도 없다. 심지어 짐승의 삶도 개체별로 다르다. 어떤 동물은 일찍 죽고 어떤 동물은 늦게 죽는다. 이미 삶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남들과 다른데, ‘남들과 다른 삶’을 대체 어떻게 쫒는 말인가. 들뢰즈는 항상 욕망은 구체적이라고 했다. 하지만 ‘남들과 다른 삶’은 절대 구체적일 수 없는 욕망이다. 첫 번째는, 모든 삶은 이미 남들과 다르다는 점에서 그렇고, 두 번째는 상황에 따라 그 ‘남’은 계속해서 달라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예를 들면 '유학'이라는 진로는 한국 고등학생일 때야 특별하지만 유학을 가는 순간 평범해져 버린다. 모두가 유학생인 무리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는 또 그 무리 안에서 특별해지기 위해 다른 무언가를 해야 했다. 유학생 무리에서 '유학생'으로는 관심과 칭찬을 받을 수 없었으니까.
그게 내 삶이 모호한 이유였다. ‘특별함’은 구체적인 욕망이 아니니까.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지 못했던 이유도 다 특별해지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 특별해지고 싶은 욕망의 본질은 불특정 다수의 관심과 칭찬을 받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좋아하는 일을 찾는다고 해도 그 일이 불특정 다수의 관심과 칭찬을 받을 수 없을 일이라면, 시작도 하기 전에 거세해버렸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일을 하며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지 못하고, ‘어떻게 하면 대중의 박수를 받을까’ 맨날 공상만 하는 뜬구름 잡는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런데 나는 대체 왜 특별해지고 싶었던 것일까? 시간이 지난 지금, 그것이 극단적인 자본주의적 욕망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자본주의에서 가장 가치가 높은 상품은 무엇일까? 바로 ‘애플’이나 ‘샤넬’처럼 대체불가능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브랜드다. 이런 브랜드의 가치는 좋은 기능이나 재질이 아니다. 이런 브랜드의 가치는 ‘특별함’이다. 사람들은 이런 제품에 대체할 수 없는 ‘특별함’이 있다고 믿기에, 이런 제품들에 많은 돈을 지불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희소성은 가치다. ‘이 제품만 특별하고 소중하다’라고 홍보해야 제품의 가치가 올라간다.
이런 자본주의적 마케팅이 삶에까지 침투하면 ‘퍼스널 브랜딩’ 같은 끔찍한 개념이 생기는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나의 ‘특별해지고 싶은 욕망’이 바로 ‘퍼스널 브랜딩’의 욕망이았으니까. 나는 내 삶을 ‘상품화’하고 싶었던 것이다. 남들이 손에 넣기 힘든 특별한 아이템들을 덕지덕지 몸에 붙이고(학벌), 나만의 특별한 삶의 스토리를 덧붙여서(창업) '희소성 높은 상품’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렇게 자기 삶을 상품으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수많은 멘토들과 자기개발 강사들은 물론, 자본주의의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는 ‘스티브 잡스’ 또한 자기 삶을 애플의 브랜딩에 써먹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자신의 삶을 상품화하는 것만큼 끔찍한 일도 없다. 그런 생각은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자본주의적 가치에 따라 줄세울 뿐만 아니라, 내 삶이 마치 희소한 물건처럼 ‘특별하고 소중해야 한다'는 허황된 자의식마저 심어버리기 때문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세상에는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모두 구조일 뿐이다. 내가 지금의 나인 이유는, 내가 잘나서도 못나서도 아니고, 그저 내가 과거에 그런 상황을 마주쳤기 때문이다. 내가 남들보다 좋은 학교를 나온 이유는 내가 머리가 좋고 공부를 열심히 해서가 아니라, 내가 대치동이라는 동네에서 자랐고 나의 부모가 경제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남들보다 자기표현을 잘하는 이유는 내가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성격이라서가 아니라, 자기주장을 확실히 하는 것을 칭찬하는 부모님 밑에서 자라 그런 경험이 많기 때문이다. 반대로 내가 우울증에 잘 빠지는 이유는 내가 원래 우울하고 어두운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내가 지금까지 많은 욕망들을 억압하는 환경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을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라 여기는 사람은 스스로를 ‘구조’라고 받아들이지 못한다. 나를 ‘구조’라고 생각하는 순간, ‘나’라는 자의식이 깨져 버리기 때문이다. 내가 '김혜원'이 아니라 '구조'라는 말은 누구라도 내 상황에 있었다면 지금의 내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즌 내가 '특별한 존재'라는 인식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말이다. 그래서 예전에 나는 누가 “나도 네 상황에 있었으면, 명문대 갈 수 있었어.”라고 말하면 발끈했다. 내 인생에서 자랑스러운 것들은 다 나란 사람이 잘나고 열심히 노력한 덕에 얻은 것이라 생각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야 내가 '특별한 존재'처럼 느껴지니 말이다. 반대로 누가 “네가 미국 사람이 아니니까 유학가서 힘든 건 당연하지"라고 위로해도 발끈했다. 넌 날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난 '특별한 존재'이니 그런 고난도 당연히 이겨내야 한다고 여긴 까닭이다.
다행히 나는 삶의 이야기를 나누는 공동체 들어와서 ‘나는 특별하다’는 자의식에서 많이 벗어났다. 사람들의 진한 삶의 이야기를 들으니 더 이상 내가 과거에 겪었던 불행이 딱히 대단해보이지 않았다. 반대로 내가 자랑스럽게 여긴 것도 사실은 그냥 내 과거의 상황이 만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런 환경을 만났으니 이렇게 된 거고, 저 사람은 저런 환경을 만났으니 저렇게 된 거구나. 그런 깨달음이 여러 번 반복되자, 점점 나도, 저 사람도 그냥 구조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특별해지고 싶은’ 욕망은 애초 실현 불가능한 욕망이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모두 아주 작은 구성 요소, 우주의 소립자일 뿐이기 때문이다.
“선생님도 자식들이 불행하면 슬프지 않겠어요?”
“어떻게 내 자식들만 불행하지 않을 거라 생각할 수 있지?”
언젠가 한 수업에서 어떤 학생이 스승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냐면서, 사랑하는 아이들이 불행한 일을 겪으면 당연히 슬플 것 같지 않냐는 질문이었다. 그 질문에 스승이 “어떻게 내 자식들만 불행을 비껴갈 거라 희망할 수 있냐” 되물었다. 물론 스승도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불행이 닥치면 슬퍼할 테다. 사랑하는 사람의 슬픔이 슬프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그 대답이 나의 어떤 부분을 깨뜨려준 느낌이었다. ‘그래, 우리 모두 우주의 소립자일 뿐인데, 어떻게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만 예외적으로 행복한 삶을 살길 바랄 수 있지? 그거야 말로 불가능한 것을 바라는 어리석음 아닌가?’ 하고.
하지만 나는 아직도 내 삶이 혹시라도 불행해질까봐 두렵다. 세상 사람들의 시선에 상처받을까봐, 예상치 못한 고통이 들이닥칠까봐 두렵고, 혹시라도 내 삶에 작은 오점이라도 묻을까봐 뭘 하기 전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다. 그런 나를 보고 있으면 스승이 얘기한다. "욕 먹으면 되잖아!" 마치 자기 삶에 작은 흠 하나 생길까봐 스스로를 금지옥엽 아끼는 꼴이라고 한다. 자기 자식만 특별하고 소중하다 생각하듯, 내 자신만 특별하고 소중하다 생각하니, 내 몸에 상처 하나 생길까봐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그 스스로를 아끼는 마음 때문에 정작 진짜 하고 싶은 일은 할 수 없게 된다. 그렇게 자유로운 삶은 요원해진다. 또 그 스스로를 아끼는 마음 때문에 다 나만 행복하면 된다는 생각에 빠지게 된다. 그렇게 인간적인 세상도 요원해진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단 하나의 깨달음은 “우리는 모두 우주의 소립자라는 것"일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