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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Jan 14. 2021

특별하고 싶어서 (2)

"우리는 모두 아주 작은 구성요소들이잖아. 구조의 소립자들이지."

 특별하고 싶었다. ‘졸라’ 특별하고 싶었다. 그게 지금까지 내 인생의 유일한 동력이었다.


 나는 굴곡진 삶을 살지 않았다. 집안은 부유했고, 가족 관계도 큰 문제는 없었다. 학창시절에 공부도 잘했고, 친구들과의 관계도 원만했고, 딱히 큰 상처가 될 만한 사건도 겪지 않았다. 내가 만일 ‘돈’에 대한 결핍이 컸다면 ‘부’를 욕망했을 테고, 가족에 대한 상처가 있었다면 ‘화목한 가정’을 욕망했을 테다. 하지만 나에게는 구체적인 결핍이 없었다. 그래서 구체적인 욕망도 없었다. 대신 막연하게 사람들의 관심과 인정을 욕망했다. 내가 ‘특별함’이라는 모호한 이미지를 욕망했던 건 그 때문이다.


 특별하고 싶었다. 특별하면 사람들의 관심과 인정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 인생의 모든 굵직굵직한 선택들은 ‘특별해지고 싶어서’ 내린 결론이었다. 남들보다 특별한 학창시절을 보내고 싶었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민족사관고’를 갔다. 남들보다 특별한 대학생활을 보내고 싶었다. 그래서 미국으로 대학 유학을 갔다. 남들보다 특별한 진로를 택하고 싶었다. 그래서 졸업 후에 취직을 하지 않고 스타트업을 창업했다. 나의 욕망은 ‘남들과 다른 삶’이었다. 남들과 달라야 차별화가 되고, 차별화가 되어야 특별해지고, 특별해져야 눈에 띄고, 눈에 띄어야 인정과 칭찬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들과 다른 삶.’ 얼핏 들으면 멋있어 보일 수도 있지만, 이보다 더 뜬구름 잡는 욕망도 없다. 대체 ‘남들과 다른 삶’이 무엇이란 말인가? 모든 이들의 삶은 이미 ‘남들과 다르다.’ 세상에 같은 삶은 단 하나도 없다. 심지어 짐승의 삶도 개체별로 다르다. 어떤 동물은 일찍 죽고 어떤 동물은 늦게 죽는다. 이미 삶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남들과 다른데, ‘남들과 다른 삶’을 대체 어떻게 쫒는 말인가. 들뢰즈는 항상 욕망은 구체적이라고 했다. 하지만 ‘남들과 다른 삶’은 절대 구체적일 수 없는 욕망이다. 첫 번째는, 모든 삶은 이미 남들과 다르다는 점에서 그렇고, 두 번째는 상황에 따라 그 ‘남’은 계속해서 달라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예를 들면 '유학'이라는 진로는 한국 고등학생일 때야 특별하지만 유학을 가는 순간 평범해져 버린다. 모두가 유학생인 무리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는 또 그 무리 안에서 특별해지기 위해 다른 무언가를 해야 했다. 유학생 무리에서 '유학생'으로는 관심과 칭찬을 받을 수 없었으니까.


 그게 내 삶이 모호한 이유였다. ‘특별함’은 구체적인 욕망이 아니니까.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지 못했던 이유도 다 특별해지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 특별해지고 싶은 욕망의 본질은 불특정 다수의 관심과 칭찬을 받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좋아하는 일을 찾는다고 해도 그 일이 불특정 다수의 관심과 칭찬을 받을 수 없을 일이라면, 시작도 하기 전에 거세해버렸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일을 하며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지 못하고, ‘어떻게 하면 대중의 박수를 받을까’ 맨날 공상만 하는 뜬구름 잡는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런데 나는 대체 왜 특별해지고 싶었던 것일까? 시간이 지난 지금, 그것이 극단적인 자본주의적 욕망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자본주의에서 가장 가치가 높은 상품은 무엇일까? 바로 ‘애플’이나 ‘샤넬’처럼 대체불가능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브랜드다. 이런 브랜드의 가치는 좋은 기능이나 재질이 아니다. 이런 브랜드의 가치는 ‘특별함’이다. 사람들은 이런 제품에 대체할 수 없는 ‘특별함’이 있다고 믿기에, 이런 제품들에 많은 돈을 지불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희소성은 가치다. ‘이 제품만 특별하고 소중하다’라고 홍보해야 제품의 가치가 올라간다.


 이런 자본주의적 마케팅이 삶에까지 침투하면 ‘퍼스널 브랜딩’ 같은 끔찍한 개념이 생기는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나의 ‘특별해지고 싶은 욕망’이 바로 ‘퍼스널 브랜딩’의 욕망이았으니까. 나는 내 삶을 ‘상품화’하고 싶었던 것이다. 남들이 손에 넣기 힘든 특별한 아이템들을 덕지덕지 몸에 붙이고(학벌), 나만의 특별한 삶의 스토리를 덧붙여서(창업) '희소성 높은 상품’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렇게 자기 삶을 상품으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수많은 멘토들과 자기개발 강사들은 물론, 자본주의의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는 ‘스티브 잡스’ 또한 자기 삶을 애플의 브랜딩에 써먹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자신의 삶을 상품화하는 것만큼 끔찍한 일도 없다. 그런 생각은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자본주의적 가치에 따라 줄세울 뿐만 아니라, 내 삶이 마치 희소한 물건처럼 ‘특별하고 소중해야 한다'는 허황된 자의식마저 심어버리기 때문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세상에는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모두 구조일 뿐이다. 내가 지금의 나인 이유는, 내가 잘나서도 못나서도 아니고, 그저 내가 과거에 그런 상황을 마주쳤기 때문이다. 내가 남들보다 좋은 학교를 나온 이유는 내가 머리가 좋고 공부를 열심히 해서가 아니라, 내가 대치동이라는 동네에서 자랐고 나의 부모가 경제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남들보다 자기표현을 잘하는 이유는 내가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성격이라서가 아니라, 자기주장을 확실히 하는 것을 칭찬하는 부모님 밑에서 자라 그런 경험이 많기 때문이다. 반대로 내가 우울증에 잘 빠지는 이유는 내가 원래 우울하고 어두운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내가 지금까지 많은 욕망들을 억압하는 환경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을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라 여기는 사람은 스스로를 ‘구조’라고 받아들이지 못한다. 나를 ‘구조’라고 생각하는 순간, ‘나’라는 자의식이 깨져 버리기 때문이다. 내가 '김혜원'이 아니라 '구조'라는 말은 누구라도 내 상황에 있었다면 지금의 내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즌 내가 '특별한 존재'라는 인식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말이다. 그래서 예전에 나는 누가 “나도 네 상황에 있었으면, 명문대 갈 수 있었어.”라고 말하면 발끈했다. 내 인생에서 자랑스러운 것들은 다 나란 사람이 잘나고 열심히 노력한 덕에 얻은 것이라 생각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야 내가 '특별한 존재'처럼 느껴지니 말이다. 반대로 누가 “네가 미국 사람이 아니니까 유학가서 힘든 건 당연하지"라고 위로해도 발끈했다. 넌 날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난 '특별한 존재'이니 그런 고난도 당연히 이겨내야 한다고 여긴 까닭이다.


 다행히 나는 삶의 이야기를 나누는 공동체 들어와서 ‘나는 특별하다’는 자의식에서 많이 벗어났다. 사람들의 진한 삶의 이야기를 들으니 더 이상 내가 과거에 겪었던 불행이 딱히 대단해보이지 않았다. 반대로 내가 자랑스럽게 여긴 것도 사실은 그냥 내 과거의 상황이 만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런 환경을 만났으니 이렇게 된 거고, 저 사람은 저런 환경을 만났으니 저렇게 된 거구나. 그런 깨달음이 여러 번 반복되자, 점점 나도, 저 사람도 그냥 구조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특별해지고 싶은’ 욕망은 애초 실현 불가능한 욕망이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모두 아주 작은 구성 요소, 우주의 소립자일 뿐이기 때문이다.




“선생님도 자식들이 불행하면 슬프지 않겠어요?”

“어떻게 내 자식들만 불행하지 않을 거라 생각할 수 있지?”


 언젠가 한 수업에서 어떤 학생이 스승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냐면서, 사랑하는 아이들이 불행한 일을 겪으면 당연히 슬플 것 같지 않냐는 질문이었다. 그 질문에 스승이 “어떻게 내 자식들만 불행을 비껴갈 거라 희망할 수 있냐” 되물었다. 물론 스승도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불행이 닥치면 슬퍼할 테다. 사랑하는 사람의 슬픔이 슬프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그 대답이 나의 어떤 부분을 깨뜨려준 느낌이었다. ‘그래, 우리 모두 우주의 소립자일 뿐인데, 어떻게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만 예외적으로 행복한 삶을 살길 바랄 수 있지? 그거야 말로 불가능한 것을 바라는 어리석음 아닌가?’ 하고.


 하지만 나는 아직도 내 삶이 혹시라도 불행해질까봐 두렵다. 세상 사람들의 시선에 상처받을까봐, 예상치 못한 고통이 들이닥칠까봐 두렵고, 혹시라도 내 삶에 작은 오점이라도 묻을까봐 뭘 하기 전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다. 그런 나를 보고 있으면 스승이 얘기한다. "욕 먹으면 되잖아!" 마치 자기 삶에 작은 흠 하나 생길까봐 스스로를 금지옥엽 아끼는 꼴이라고 한다. 자기 자식만 특별하고 소중하다 생각하듯, 내 자신만 특별하고 소중하다 생각하니, 내 몸에 상처 하나 생길까봐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그 스스로를 아끼는 마음 때문에 정작 진짜 하고 싶은 일은 할 수 없게 된다. 그렇게 자유로운 삶은 요원해진다. 또 그 스스로를 아끼는 마음 때문에 다 나만 행복하면 된다는 생각에 빠지게 된다. 그렇게 인간적인 세상도 요원해진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단 하나의 깨달음은 “우리는 모두 우주의 소립자라는 것"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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