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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Jan 22. 2021

영토 안의 세상, 영토 밖의 세상 (2)

"생성에는 오직 소수파 되기만이 있다."

 내가 그 철학자에게 받은 가르침은 들뢰즈의 가르침과도 맞닿아 있다. 들뢰즈는 「천개의 고원」에서 이렇게 말한다.

 

"다수파는 추상적 표준 속에 분석적으로 포함되는 한은 결코 그 누구도 아니며 항상 ‘아무도 아닌 자’이지만, 소수파는 그가 모델로부터 일탈하는 한에서 ‘모든 사람 되기’이며 ‘모든 사람의 잠재적 역량을 갖게 되기’이다. (...) 다수파는 결코 생성이 아니다. 생성에는 오직 소수파 되기만이 있다." 질 들뢰즈「천개의 고원」


 들뢰즈가 말하는 다수파(Majority)는 단순히 수적으로 많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사회가 기준으로 삼는 중심점을 뜻한다. 예를 들면 부자는 가난한 사람보다 수적으로 적지만, ‘부’라는 기준으로 볼 때 중심에 더 가깝기에 다수파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는 대표적인 다수파로 ‘이성애자’ ‘백인’ ‘표준어 사용자’ ‘도시 거주자’ ‘성인’ ‘남성’을 꼽는다. 이성애자, 백인, 표준어 사용자, 도시 거주자, 성인, 남성을 기준으로 원을 그린 뒤, 그에 부합하는 사람들이 원 안의 영토를 차지한다는 말이다. 원의 중심에 가까워질수록 다수파가 되고, 원의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소수파가 된다. 권력은 원의 중심에 있기에, 다수파가 될수록 권력의 혜택을 누리고, 소수파가 될수록 권력으로부터 소외된다. 내가 더 작은 원에 들어갈 때마다 칭찬을 받았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들뢰즈는 이야기한다. 다수파는 ‘아무도 아닌 자(Nobody)’이지만, 소수파는 ‘모든 사람(Everybody)’이다. 원 안에는 아무도 없지만, 원 밖에는 모두가 있다. 이게 대체 무슨 뜻일까?



 

 원 안에 들어가면 사회의 칭찬을 받는다. 그 칭찬은 정말이지 달콤하다. 그 칭찬을 받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 잊어버릴 정도로 달콤하다. 하지만 한번은 멈추어 서서 내가 그 칭찬을 받기 위해 무엇을 잃었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나는 사실 학창시절 만화영화를 제일 좋아하는 아이였다. 하지만 공부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만화영화는 하루 30분도 보질 못했다. 고등학교 때는 공부 시간이 줄어든다는 이유로 체육, 미술, 음악 수업이 아예 없는 학교를 다녔다. 학창시절 내내 친구들과 마음 편히 논 적도 많지 않다. 사업을 할 때는 더 심했다. 꽃다운 20대였는데, 오직 사업을 성공 시켜야 한다는 이유로 하루 12시간씩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일만 했다. 나는 원의 기준에 맞지 않는 내 모습들은 다 버려야한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날씨가 좋으면 놀러나가고 싶은데 그건 불성실한 모습이니 안 된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다 때려치고 싶을 만큼 불안하고 힘들었는데, 그건 나약한 모습이니 징징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재미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즐거운 일을 하며 살고 싶었는데, 그건 진취적이지 않은 모습이니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작은 원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하지 않은 욕망은 모두 다 제거하려고 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의 본질은 곧 욕망’이니, 그 말은 나는 나의 본질 중 많은 부분을 제거하려 했다는 뜻이다. 그래서였을까. 원의 중심에 가까워질수록 나는 ‘나’를 잃어갔다. 신해철의 노래 가사처럼, ‘저 좁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나를 깎고 잘라서 스스로 작아지는 것 뿐’이었으니까. 원 안으로 들어갈수록 사회의 칭찬을 받았다. 하지만 그럴 수록 만화책을 좋아하고 친구들에게 편지 쓰는 걸 즐거워하던 인간 ‘김혜원’의 모습은 사라지고, 사회가 원하는 모습만 억지스럽게 잘라 붙인 인조 인간의 모습만 남았다. 들뢰즈의 말처럼, 다수파가 될수록 나는 ‘아무도 아닌 자’가 되었다. 사회의 칭찬을 누리는 대가는 바로 ‘나’를 잃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나는 사업이 망해서 어쩔 수 없이 원 밖으로 밀려 나왔다. 원 밖으로 나오자 원 안에서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들이 마구 터지기 시작했다. 철학자를 만나 철학을 배웠다. 자본주의의 최전선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철학과 인문주의와의 만남은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철학자가 꾸리는 인문공동체에서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보게 되었다. 부자 동네에서 고만고만한 사람들끼리 어울리며 살았던 내 협소한 삶에서는 그 또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배우지 않았던 것을 배우고 만나지 않았던 사람들을 만나는 게 즐거웠다. 여전히 학교 동창이나 사업하던 친구들을 만나 "혜원이는 뭐하고 지내?"라는 질문을 받으면 버벅대고 주눅들 때도 있었지만, 점점 그 위축감이 별 거 아니게 느껴질 정도로 지금의 삶이 재미있어졌다. 그렇게 영토 안의 칭찬보다 영토 밖의 마주침이 더 즐겁다는 생각이 든 순간, 나는 ‘영토 밖의 삶’을 긍정하게 되었다. 영토 안을 향하던 시선도 자연스레 영토 밖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지금까지 작은 원에 들어가기 위해 잘라냈던 나의 수많은 모습들이 하나둘씩 되살아났다. 친구에게 편지를 쓰는 것을 좋아하는 나, 날씨가 좋은 날에 정처 없이 걷는 것을 좋아하는 나,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들으며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나, 좋아하는 사람들과 술 마시고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 잊고 있던 모습들이 하나둘씩 돌아올 때마다 ‘나’를 되찾는 기분이 들었다. 잘 웃고, 잘 울고, 좋아하는 것도 많고 호기심도 많던 초등학생 때 모습을 되찾아 새로운 모험을 떠나는 느낌이었다. 그 모험 속에서 나는 또 내가 몰랐던 많은 모습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영토 밖으로 벗어날수록 나는 ‘김혜원’이 되고, 또 새로운 ‘김혜원’이 되어 갔다. 원 안으로 들어갈수록 ‘나’를 잃고, 원 밖으로 나올수록 ‘나’를 만나는 경험. 이 경험이 나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테다.


 들뢰즈는 말한다. '소수파'야말로 '모든 사람-되기'라고. 여기서 '모든 사람-되기'란 사람들이 각자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회복하고 계속해서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들뢰즈에 의하면 그런 '-되기'는 소수파, 즉 원 밖에서만 일어난다. 영토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잃어버린 나, 나아가 새로운 나를 만날 수 있다는 말이다. 내가 집착했던 영토는 '자본주의적 성공'이었다. 그 영토에 대한 집착을 버리자, 사람들과 인간적인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나의 모습이 되살아났다. 내가 아는 어떤 이에게 그 영토는 '남성성'이었다. 그는 긴 세월 자신의 남자답지 못한 모습들을 부정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 '남성성'이라는 영토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순간, 아름다운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소중히 대하는 모습이 되살아났다. 또 다른 이에게 그 영토는 '도덕성'였다. 그는 긴 세월 도덕적으로 바른 삶을 살아오며, 유치하고 경박스러워 보이는 욕망들을 억누르며 살았다. 하지만 '도덕성'이라는 영토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순간, 자기가 그간 하고 싶었던 일들을 가치 판단 하지 않고 하나씩 해나가며 더욱 유쾌하고 재미있는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들뢰즈의 말은 옳다. 원 안에는 아무도 없다. 그곳에는 오직 인간성을 상실한 인조 인간만이 살 뿐이다. 하지만 원 밖에는 모두가 있다. 인간성을 회복한, 생동감 넘치고 변화무쌍한 아름다운 진짜 인간들은 모두 그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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