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고원』 (질 들뢰즈) 제1장 강독 후기
우리가 영토를 사수하기 위해 애를 쓰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영토 밖으로 나가는 순간, 나에게 쏟아지는 차가운 시선을 견디기 힘들어서다. 내가 영토 안에 있었을 때는 한없이 따뜻했던 사람들도 내가 영토 밖으로 나가는 순간 인상을 찌푸리거나 묘하게 거리를 둔다. 심지어 가족들조차 그들이 용납하는 사회적 테두리를 벗어나면 따뜻한 눈빛을 거두고 경멸의 눈빛을 보낼 때가 있다. 그 차가운 눈빛들이 내면에 각인되어, 우리는 영토 밖으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평생 동안 자기 영토를 사수하는 삶은 불가능하다. 유치하지만, 내가 대학교 2학년 때 했던 공상은 나름의 통찰이 있었다. 논리적으로만 따져도, 이 세상 최고 권력자가 되지 않는 이상, 모든 사람들은 언젠가 원 밖으로 밀려나는 순간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신입 사원 때부터 승승장구하며 초고속 승진을 했던 이도 언젠가는 회사에서 물러나야 하는 순간이 온다.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조차 임기가 끝나면 자신이 있던 영토에서 물러나야 한다(그게 싫어서 많은 독재자들이 임기 중에 종신제를 시도한다). 그리고 평생 영토에서 밀려나는 경험을 비껴온 이도 언젠가는 ‘젊음’이라는 영토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다. 타이밍의 차이일 뿐, 누구에게나 ‘영토에서 밀려나는 순간’은 온다.
나의 경우, 그 순간이 일찍 찾아온 편이다. 아마도 내가 다른 걱정 없이 온전히 ‘영토’ 경쟁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에 있었기에, 그 한계 또한 빨리 찾아오지 않았을까 싶다. 학창시절부터 쉴 새 없이 달려오다가 대학 졸업 후에 스타트업을 창업했다. 그로부터 5년 동안 사업을 성공시키려고 고군분투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사업에 실패하고 절망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뭘 그리 유난이었나 싶지만, 그때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나를 ‘루저’라고 손가락질 할 것 같았다. 그 위축감 때문에 친구들은 물론 가족과의 만남도 피해 다녔고 어쩔 수 없이 만나야할 때는 함께 있는 시간 내내 마음을 졸였다. 그 당시 내가 살던 동네에 IT회사가 많았는데, 혹시라도 퇴근하는 직장인 무리를 마주치면 내가 더 작아져 보일까봐 밖으로 산책조차 나가질 못했다. 집에서 멍하니 인터넷을 하다가도 나와 비슷한 시기에 사업했던 친구들이 승승장구하는 이야기가 기사나 SNS에 뜨면 심장이 조여 왔다. 오프라인에서든 온라인에서든 사람을 만날 수가 없었다. 사람을 만나는 순간, 그 사람의 시선을 통해 작아진 나를 보게 되니까. 결국 나는 오프라인에서도, 온라인에서도 세상과의 연결을 끊은 채, 하루 종일 유튜브 영상만 보는 생활을 지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나는 왜 그렇게 망가졌던 것일까? 사실 사업이 망해서 내가 실질적으로 힘들어진 부분은 단 하나도 없었다. 빚더미에 앉은 것도 아니고, 먹고 사는 데도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다만 항상 원 안에 들어가는 삶을 살아가, 처음으로 원 안에 들어가지 못한 경험을 한 것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작은 입장의 변화가 모든 삶을 뒤집어 놓았다. 나는 항상 사회가 정해놓은 원 안에 들어가는 삶을 살았다. 원 안에 들어가면 사회가 약속한 칭찬과 관심을 받을 수 있었다. 내가 좋은 대학에 들어갔을 때 부모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나를 칭찬했다. 하지만 같은 시기 좋은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던 친구들은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수근거림의 대상이 되었다. 그 차가움이 무서워서 고등학교 때 수능을 망치고 모든 친구들과 연락을 끊고 영영 잠적해버린 아이도 있었다. 나는 원 안에 들어와 원 밖을 보며, 원 안에는 달콤한 칭찬과 인정이, 원 밖에는 차가운 멸시와 소외가 있다는 사실을 학습했다. 원 안의 세상이 달콤할수록 원 안에 들어가야 한다는 욕심을 커졌고, 그만큼 원 밖의 세상에 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불안도 커졌다. 그 욕심과 불안이 나를 계속 뛰게 만들었다. 계속 해서 더 작은 원에 들어가 달콤함을 얻고 차가움을 피했다. 그런 경험이 반복될수록 ‘영토를 사수해야 한다’는 집착은 더더욱 커졌다.
그래서 처음으로 원 안에 들어가지 못했을 때, 그토록 절망한 것이다. 항상 원 안에서 원 밖을 보다가 처음으로 원 밖에서 원 안을 보는 상황이 되었다. 원 밖에 있으니 내가 들어가지 못한 그 원이 너무나 간절했다. 나와 같은 시기 사업을 시작해 성공시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친구들. 원 안에 들어간 그들이 누리는 칭찬과 관심이 너무 부러웠다. 그 칭찬과 관심의 달콤함을 알기에 더 부러웠다. 반대로 내가 원 안에 있을 때 원 밖을 보며 했던 생각들이 나에게 돌아올 생각을 하니 죽고 싶었다. ‘너는 낙오됐어.’ ‘네 능력은 거기까지인가 보다.’ ‘더 열심히 했었어야지.’ 사람들을 만날 수 없었다.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원 밖의 세상이 얼마나 차가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 그렇게 나는 방 안에 갇혀 망부석처럼 내가 가닿지 못한 그 원만 쳐다보고 있었다. 유토피아는 그 원 안에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그 상황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딱 두 개 뿐이다. 첫 번째 방법은 다시 도전해서 원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친구 중에 삼수를 해서 원하는 대학에 들어간 이가 있다. 그녀는 원 밖에 있었지만, 원 안에 들어가고 싶은 욕망을 정직하게 직면하고 열심히 노력해서 결국 원 안에 들어갔다. 사회도 우리에게 이 방법을 권한다. 우리가 영토에서 밀려났을 때 사회는 이렇게 속삭인다. “다시 한 번 도전해봐.” “안되면 될 때까지 하는 거야.” “성공이 그렇게 쉬울 것 같아?” “고생 끝에 낙이 온다.”
하지만 다시 도전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 있다. 예를 들면 당장 생계가 걱정인 이들에게 첫 번째 방법을 권유하는 것은 폭력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런 경우는 아니었지만, 워낙 어려서부터 경쟁에 시달려온 탓에 사업이 망한 순간 신체적, 정신적으로 완전히 고갈된 상태였다. 원 밖에 밀려나는 게 너무 무서웠기에, 머릿 속에서는 끊임없이 “다시 도전해야 해!”라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몸은 꿈쩍도 할 수가 없었다. 다른 사업을 해보려고 시장 조사를 나가면 구역질이 났고, 사업에 ‘사’자만 들어도 눈물이 줄줄 흐를 정도였다. 그때 정말 절망스러웠다. 다시 도전하고 싶어도 몸이 따라주질 않으니까.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들뢰즈의 말처럼, 모든 ‘생성’은 ‘차이’에서 시작되는 것이 맞다. 그때까지는 실패하면 다시 도전하면 됐다. 하지만 그때는 다시 도전할 수 없었다. 그 ‘차이’가 새로운 길을 열었다. 내 시선은 항상 내가 들어가지 못한 그 원을 향해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 원 안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자, 자연스럽게 시선이 원 안에서 원 밖으로 돌아갔다. 어차피 저 안에 들어가지 못할 거,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에 뭐가 있는지 보기라도 하자는 마음이 생겼다. 때마침 내가 스타트업을 하는 내내 열심히 글을 챙겨봤던 한 철학자가 글쓰기 수업을 한다는 공지를 올렸다. 그는 대기업을 다니다가 그만두고 글을 쓰고 철학하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를 만나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그는 뭔가 알고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영토 밖의 사람이니까. 심지어 영토 밖으로 스스로 걸어 나온 사람이니까. 삶의 구렁텅이에 빠졌을 때 직관도 더 예리해지는 것일까? 나의 직관은 맞았다. 나는 그를 만나 영토 밖의 삶을 긍정하는 방법을 배웠다. 나아가 진짜 삶은 영토 밖으로 나온 순간 시작된다는 사실 또한 배웠다. 시선을 원 안에서 원 밖으로 돌리기. 원 밖으로 밀려났을 때 절망에서 벗어나는 두 번째 방법이 바로 그것이었다.
내가 그 철학자에게 받은 가르침은 들뢰즈의 가르침과도 맞닿아 있다. 들뢰즈는 「천개의 고원」에서 이렇게 말한다.
"다수파는 추상적 표준 속에 분석적으로 포함되는 한은 결코 그 누구도 아니며 항상 ‘아무도 아닌 자’이지만, 소수파는 그가 모델로부터 일탈하는 한에서 ‘모든 사람 되기’이며 ‘모든 사람의 잠재적 역량을 갖게 되기’이다. (...) 다수파는 결코 생성이 아니다. 생성에는 오직 소수파 되기만이 있다." 질 들뢰즈「천개의 고원」
들뢰즈가 말하는 다수파(Majority)는 단순히 수적으로 많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사회가 기준으로 삼는 중심점을 뜻한다. 예를 들면 부자는 가난한 사람보다 수적으로 적지만, ‘부’라는 기준으로 볼 때 중심에 더 가깝기에 다수파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는 대표적인 다수파로 ‘이성애자’ ‘백인’ ‘표준어 사용자’ ‘도시 거주자’ ‘성인’ ‘남성’을 꼽는다. 이성애자, 백인, 표준어 사용자, 도시 거주자, 성인, 남성을 기준으로 원을 그린 뒤, 그에 부합하는 사람들이 원 안의 영토를 차지한다는 말이다. 원의 중심에 가까워질수록 다수파가 되고, 원의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소수파가 된다. 권력은 원의 중심에 있기에, 다수파가 될수록 권력의 혜택을 누리고, 소수파가 될수록 권력으로부터 소외된다. 내가 더 작은 원에 들어갈 때마다 칭찬을 받았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들뢰즈는 이야기한다. 다수파는 ‘아무도 아닌 자(Nobody)’이지만, 소수파는 ‘모든 사람(Everybody)’이다. 원 안에는 아무도 없지만, 원 밖에는 모두가 있다. 이게 대체 무슨 뜻일까?
원 안에 들어가면 사회의 칭찬을 받는다. 그 칭찬은 정말이지 달콤하다. 그 칭찬을 받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 잊어버릴 정도로 달콤하다. 하지만 한번은 멈추어 서서 내가 그 칭찬을 받기 위해 무엇을 잃었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나는 사실 학창시절 만화영화를 제일 좋아하는 아이였다. 하지만 공부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만화영화는 하루 30분도 보질 못했다. 고등학교 때는 공부 시간이 줄어든다는 이유로 체육, 미술, 음악 수업이 아예 없는 학교를 다녔다. 학창시절 내내 친구들과 마음 편히 논 적도 많지 않다. 사업을 할 때는 더 심했다. 꽃다운 20대였는데, 오직 사업을 성공 시켜야 한다는 이유로 하루 12시간씩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일만 했다. 나는 원의 기준에 맞지 않는 내 모습들은 다 버려야한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날씨가 좋으면 놀러나가고 싶은데 그건 불성실한 모습이니 안 된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다 때려치고 싶을 만큼 불안하고 힘들었는데, 그건 나약한 모습이니 징징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재미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즐거운 일을 하며 살고 싶었는데, 그건 진취적이지 않은 모습이니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작은 원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하지 않은 욕망은 모두 다 제거하려고 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의 본질은 곧 욕망’이니, 그 말은 나는 나의 본질 중 많은 부분을 제거하려 했다는 뜻이다. 그래서였을까. 원의 중심에 가까워질수록 나는 ‘나’를 잃어갔다. 신해철의 노래 가사처럼, ‘저 좁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나를 깎고 잘라서 스스로 작아지는 것 뿐’이었으니까. 원 안으로 들어갈수록 사회의 칭찬을 받았다. 하지만 그럴 수록 만화책을 좋아하고 친구들에게 편지 쓰는 걸 즐거워하던 인간 ‘김혜원’의 모습은 사라지고, 사회가 원하는 모습만 억지스럽게 잘라 붙인 인조 인간의 모습만 남았다. 들뢰즈의 말처럼, 다수파가 될수록 나는 ‘아무도 아닌 자’가 되었다. 사회의 칭찬을 누리는 대가는 바로 ‘나’를 잃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나는 사업이 망해서 어쩔 수 없이 원 밖으로 밀려 나왔다. 원 밖으로 나오자 원 안에서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들이 마구 터지기 시작했다. 철학자를 만나 철학을 배웠다. 자본주의의 최전선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철학과 인문주의와의 만남은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철학자가 꾸리는 인문공동체에서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보게 되었다. 부자 동네에서 고만고만한 사람들끼리 어울리며 살았던 내 협소한 삶에서는 그 또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배우지 않았던 것을 배우고 만나지 않았던 사람들을 만나는 게 즐거웠다. 여전히 학교 동창이나 사업하던 친구들을 만나 "혜원이는 뭐하고 지내?"라는 질문을 받으면 버벅대고 주눅들 때도 있었지만, 점점 그 위축감이 별 거 아니게 느껴질 정도로 지금의 삶이 재미있어졌다. 그렇게 영토 안의 칭찬보다 영토 밖의 마주침이 더 즐겁다는 생각이 든 순간, 나는 ‘영토 밖의 삶’을 긍정하게 되었다. 영토 안을 향하던 시선도 자연스레 영토 밖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지금까지 작은 원에 들어가기 위해 잘라냈던 나의 수많은 모습들이 하나둘씩 되살아났다. 친구에게 편지를 쓰는 것을 좋아하는 나, 날씨가 좋은 날에 정처 없이 걷는 것을 좋아하는 나,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들으며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나, 좋아하는 사람들과 술 마시고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 잊고 있던 모습들이 하나둘씩 돌아올 때마다 ‘나’를 되찾는 기분이 들었다. 잘 웃고, 잘 울고, 좋아하는 것도 많고 호기심도 많던 초등학생 때 모습을 되찾아 새로운 모험을 떠나는 느낌이었다. 그 모험 속에서 나는 또 내가 몰랐던 많은 모습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영토 밖으로 벗어날수록 나는 ‘김혜원’이 되고, 또 새로운 ‘김혜원’이 되어 갔다. 원 안으로 들어갈수록 ‘나’를 잃고, 원 밖으로 나올수록 ‘나’를 만나는 경험. 이 경험이 나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테다.
들뢰즈는 말한다. '소수파'야말로 '모든 사람-되기'라고. 여기서 '모든 사람-되기'란 사람들이 각자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회복하고 계속해서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들뢰즈에 의하면 그런 '-되기'는 소수파, 즉 원 밖에서만 일어난다. 영토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잃어버린 나, 나아가 새로운 나를 만날 수 있다는 말이다. 내가 집착했던 영토는 '자본주의적 성공'이었다. 그 영토에 대한 집착을 버리자, 사람들과 인간적인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나의 모습이 되살아났다. 내가 아는 어떤 이에게 그 영토는 '남성성'이었다. 그는 긴 세월 자신의 남자답지 못한 모습들을 부정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 '남성성'이라는 영토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순간, 아름다운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소중히 대하는 모습이 되살아났다. 또 다른 이에게 그 영토는 '도덕성'였다. 그는 긴 세월 도덕적으로 바른 삶을 살아오며, 유치하고 경박스러워 보이는 욕망들을 억누르며 살았다. 하지만 '도덕성'이라는 영토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순간, 자기가 그간 하고 싶었던 일들을 가치 판단 하지 않고 하나씩 해나가며 더욱 유쾌하고 재미있는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들뢰즈의 말은 옳다. 원 안에는 아무도 없다. 그곳에는 오직 인간성을 상실한 인조 인간만이 살 뿐이다. 하지만 원 밖에는 모두가 있다. 인간성을 회복한, 생동감 넘치고 변화무쌍한 아름다운 진짜 인간들은 모두 그곳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