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 들뢰즈 A to Z」(질 들뢰즈) 강독 후기
글을 쓰고 나면 여러 가지 감정을 느낀다. 가장 첫 번째 드는 감정은 ‘오늘 해야 할 일을 했다’는 뿌듯함이다. 나는 글쓰기를 좋아하지만 글을 쓰기 전에 늘 머뭇거리는 마음과 싸우곤 한다. 그냥 쓰면 되는데, 잘 쓰고 싶어서 그렇다. 잘 하고 싶은 마음은 언제나 사람을 무겁게 만든다. 그 욕심 때문에 나는 아직까지도 글을 쓰기 전에 마치 숙제하기 싫은 아이처럼 미적대는 시간을 가진다. 미적대다가 ‘아니야, 그냥 쓰자!’라고 마음을 먹고 일어나 첫 번째 문장을 키보드로 치면 다시 글쓰기의 즐거움에 빠져든다. 그렇게 하나의 글을 완성하고 집필실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보람찬 감정을 느낀다. 그게 내가 글을 쓰고 느끼는 첫 번째 감정이다.
하지만 그 감정은 오래 가지 않는다. 그 뿌듯함은 스스로를 향한 ‘셀프 격려’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글을 잘 쓰고 싶은 욕심은 늘 ‘글을 잘 쓰지 못하면 어떡하지?’라는 불안과 맞닿아 있다. 그 불안 때문에 글을 쓰기 전에 미리 부담을 느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글을 썼다는 건 그런 불안을 넘어서 좋아하는 일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 스스로를 칭찬하고 격려하고 싶은 마음이 내가 글을 쓰고 난 뒤 느끼는 뿌듯함이다. 잘 쓰고 싶은 욕심이 없었다면 불안하지도 않았을 테고, 불안하지 않았다면 그냥 썼을 테고, 그냥 썼다면 뿌듯함을 느낄 이유도 없을 테니까.
그래서일까? 뿌듯함은 금방 사그러들고 그 자리에 같은 질문이 다시 고개를 든다. ‘나는 글을 잘 쓴 걸까?’ 특히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글을 쓰고 있는 요즘, 내가 글을 잘 쓰고 있는지 늘 점검하게 된다. 하지만 한 동안 스스로에게 그 질문을 던지기만 할 뿐, 그렇다할 답을 하지 못해 혼란스럽고 답답했다. 며칠 동안 그 이유를 고민하다가 작은 실마리 하나를 찾았다. 내가 글을 잘 쓰고 있는지 아닌지 스스로 답할 수 없었던 이유는, 어떤 글이 좋은 글인지 깊게 고민해본 적이 없어서였다. 어떤 글이 좋은 글인지 모르니, 내 글이 좋은 글인지 판단할 수도 없었던 게다. 인문학 공동체 안에서 글을 쓴지 2년 가까이 되었다. 공동체 안에서는 스승이 그 판단을 어느 정도 대신해 주었다. 이제는 스스로에게 물어야할 때다. 지금 나는 어떤 글이 좋은 글이라 생각하는가? 지금 나는 어떤 글을 써야하는가?
들뢰즈는 「질 들뢰즈 A to Z」의 가장 첫 파트, Animal에서 동물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한다.
"내가 동물에 있어서 좋아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모든 동물들이 각자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네. 자기 세계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 점이 내 호기심을 자극하지. 많은 사람들은 살아지는 대로 삶을 살지. 하지만 동물들은 각자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네. 그러면 동물의 세계란 무엇일까? 가끔 그것은 아주 제한적으로 보이지. 동물들은 아주 소수의 자극에만 반응을 한다네. 어떤 특정한 것에만. 그러니까 동물들의 첫 번째 특징은 그들이 이런 특정하고 제한적인 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야." 「질 들뢰즈 A to Z」
들뢰즈는 동물은 각자 특정하고 제한적인 세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며, ‘진드기’를 예로 든다. 들뢰즈에 의하면 진드기는 오직 세 가지 자극에만 반응한다. 진드기는 ‘빛’에 반응해 나뭇가지의 가장자리로 이동한 뒤, 몇 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먹지도 않으며 나뭇가지 밑을 지나가는 동물들의 ‘냄새’가 나기를 기다린다. 그러다가 동물이 지나가면 바로 떨어져내려 ‘촉각’에 의지해 동물의 피부에서 털이 제일 적게 난 부위를 찾아낸 뒤, 신나게 피를 빤다. 빛, 냄새, 촉각. 거대한 자연 속에서 진드기는 오직 이 세 가지 자극만을 쫒는다. 즉, 진드기의 세계는 이 세 가지 구성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진드기의 ‘특정하고 제한적인 세계’일 테다.
얼핏 진드기의 삶은 단조롭고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한다. 수많은 자극이 넘쳐나는 대자연 속에서 오직 세 가지 자극만 받아들일 수 있는 삶이라니. 그래서 우리는 진드기를 인간보다 덜 진화한 생물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들뢰즈는 우리와 다른 견해를 이야기한다. 그는 이런 조그마한 세계의 제한성이 감동적이라고 하면서, 동물들은 자기 세계를 가지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고 덧붙인다. 그렇다면 왜 동물들은 자기 세계를 가지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렇지 못할까? 동물들은 ‘제한성’을 긍정하는 반면, 사람들은 대부분 ‘제한성’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진드기가 진드기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빛, 냄새, 촉각 세 가지 자극에만 반응한다는 점이다. 만일 진드기가 그 이상의 자극에 반응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진드기가 아닐 것이다. 마치 토끼가 하늘을 날면 더 이상 토끼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우리 눈에는 진드기가 단순하고 열등한 생물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진드기는 그 제한적인 삶을 아무 불만 없이 살아나간다. 날지 못한다고, 뛰지 못한다고, 힘이 세지 않다고 번민하지 않는다. 진드기는 기다린다. 자기가 욕망하는 그 동물이 나뭇가지 밑을 지나갈 때까지. 진드기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수많은 자극 중 어떤 자극에 반응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이다. 진드기는 오랜 기다림 끝에 피를 포식하는 큰 기쁨을 누린다. 어쩌면 우리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을 큰 기쁨을.
자기 세계는 ‘제한성’이 만든다. ‘세 가지 자극’이라는 제한성이 ‘진드기’의 세계를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제한성이 없으면 자기 세계도 없다는 뜻이 된다. 들뢰즈의 말처럼 자기 세계가 없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제한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고기가 물고기인 이유는 날지 못하고 걷지 못하기 때문인데, 그 제한성을 받아들이지 않고 하늘을 나는 매나 초원을 뛰는 사슴이 되고 싶어 하니, ‘물고기’라는 세계가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욕망 또한 마찬가지다. 진드기는 오직 세 가지 자극에만 반응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 인간은 수 없이 많은 자극 중에 자기가 반응해야 하는 자극이 무엇인지 구분하지 못한다. 진드기는 동물의 피만을 욕망하지만, 인간은 자기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잘 모른 채, 이것저것 게걸스럽게 욕망하기 때문이다. 진드기는 제한적이기에 세계를 가지지만, 인간은 제한적이지 않기에, 아니 제한적이고 싶어하지 않기에, 자기 세계를 잃게 된다. 어떤 존재의 세계는 그의 제한성이다. 그것이 들뢰즈의 통찰이다.
어떤 존재의 세계는 그의 제한성이 만든다. 그것이 들뢰즈의 통찰이다.
들뢰즈는 동물들이 각자 갖고 있는 ‘세계’를 그들의 영토(영역)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진드기는 아니지만, 영역을 표시하는 동물들이 있다. 그들에게 영역이란 자기(혹은 자기 무리)가 활동하는 공간을 뜻한다. 그들은 광활한 대지 위에 테두리를 그어 자신만의 영역을 확보한다. 테두리를 긋지 않으면 무한한 공간만이 있을 뿐 유한한 영역을 구분 지을 수 없다. 즉, 영역(영토)는 테두리라는 제한성이 만들어낸다는 뜻이다.
나를 정말 매혹시킨 또 하나는 동물들의 영토라네. (...) 나에게 동물들이 영토를 수립하는 과정은 거의 예술의 탄생처럼 보인다네. 많은 동물들이 오줌이나 항문샘 등 냄새로 영역을 표시하지.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네. 어떤 동물은 앉거나 서거나 자세를 낮추는 등의 동작으로 영역을 표시하고, 심지어는 일련의 색깔들로 영역을 표시하는 동물도 있다네. 예를 들어, 개코원숭이는 자기 영토의 가장자리에서 엉덩이를 들어 색깔을 보여주지. 색, 노래, 동작이 만들어내는 선. 그건 아주 순수한 예술이라네. (...) 그 영토가 바로 동물들의 소유물(세계)이라네.
동물들은 어떻게 자신의 영역을 표시할까? 동물들은 땅에 선을 긋지 않는다. 대신 냄새로, 춤으로, 노래로, 색으로 자기 영토를 표시한다. 인간들처럼 땅에 선을 긋고 벽을 쌓지 않기에, 동물들은 매일같이 영토를 돌아다니며 춤을 추고 노래하고 엉덩이의 색을 보여주어야 한다. 들뢰즈는 동물들이 영역 표시를 ‘예술의 탄생’이라고 한다. 동물들이 영역 표시를 하는 행위가 예술가가 매일 같이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자기 세계를 표현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들뢰즈가 인간의 예술 행위를 동물의 영역 표시와 등치시킨 부분에서 소름이 돋았다. 첫 번째는 예술이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특별한 무언가가 아니라, 지극히 동물적이고 자연스러운 행위라는 생각이 들어서고, 두 번째는 나의 세계를 표현하지 않는 예술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렇다면 나의 세계는 무엇인가? 진드기의 제한성이 진드기의 세계를 만들어내듯, 나의 제한성이 나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나의 세계는 곧 나의 제한성이다. 그러므로 나의 세계를 표현하는 행위는 곧 나의 제한성을 표현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김혜원’이라는 한 인간의 테두리를 춤, 노래, 그림, 글 등의 형식으로 표시하는 것. ‘김혜원’이라는 동물의 영역 표시 행위.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가자. 나는 어떤 글이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는가? 좋은 글은 나의 제한성을 가감 없이 드러낸 글이다. 그렇지 않은 글은 무의미하다.
그 잣대로 다시 나의 글을 되짚어 본다. 나의 글은 나의 제한성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는가? 그런 글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글도 있었다. 나의 제한성이란 무엇인가? ‘내가 원하는 것’과 ‘내가 원하지 않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내가 할 수 없는 것’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나의 한계(테두리)를 뜻한다. 내가 진드기라면, ‘나는 동물의 피를 원하지만 풀은 원하지 않아’, ‘나는 빛, 냄새, 촉각을 느끼지만 다른 자극은 느끼지 못해’라고 말하는 것이 곧 나의 세계를 표현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종종 나의 제한성을 가감 없이 드러내지 않았던 것 같다. 나의 고결한 욕망은 드러내지만 나의 더러운 욕망은 숨기고, 나의 잘난 부분은 드러내지만 나의 못난 부분은 숨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구분짓기의 신기루’라는 글에서, 나는 타인(의사 친구와 부르주아)의 구분짓기 욕망에 대해서는 자세히 이야기했지만, 나의 구분짓기 욕망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정작 나야말로 그 의사친구만큼이나 구분짓기 욕망이 강했던 사람인데 말이다. 하지만 그런 나를 드러냈다가는 욕먹을 것 같으니까 나대신 타인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 글을 쓴 것이다. 나를 드러내지 않은 채 타인 뒤에 숨어 이야기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행위다. 들뢰즈에 의하면, 예술은 나의 제한성을 표현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글을 썼던 이유는, 내가 욕먹지 않은 선에서 이 주제에 대해 말해보고 싶은 지적 허영이 아니었을까. 나는 이 주제에 대해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나는 구분짓기의 최전선에 있었지만 이제 그 욕망이 구리다는 것마저 안다, 그런 나의 잘난 모습을 뽐내고 싶은 마음. 어쩌면 그 글 자체가 거대한 ‘구분짓기’였을 수도 있겠다.
“욕먹으면 되잖아!”
나의 철학 스승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다. 인이 박힐 정도로 자주 들은 그 말이 요즘 새삼스럽게 느껴지곤 한다. 이 짧은 말에 참 많은 삶의 진실이 담겨 있다 싶다. 내가 나의 제한성을 가감 없이 드러내지 못했던 이유는 한 마디로 얘기하면 ‘욕먹기 싫어서’다. 글에다가 나의 어두운 모습이나 추한 욕망을 드러냈다가 사람들이 혹시라도 욕을 할까봐서다. 그걸 두려워하는 마음 자체가 아직 내가 나의 제한성을 충분히 긍정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자기 세계가 탄탄한 사람은 사람들의 욕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화장을 해서 더 많은 관심을 받으려 하지도 않고, 나를 드러내지 않고 타인 뒤에 숨어 욕으로부터 안전거리를 유지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 모든 행위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진정으로 아는 사람만이 자기 세계를 가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렇게 못난 점이 많고 못하는 것도 많고 이상한 욕망을 가지고 있어."
있는 힘껏 용기를 내, 나의 제한성을 매일같이 노래하며 세상 사람들의 시선 속에 나의 영토를 표시하는 것. 그리고 진드기가 제한적이기에 진드기에 매료된 들뢰즈처럼, 내가 제한적이기 때문에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 내가 할 수있는 것은 그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