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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Jan 28. 2021

나를 드러내는 글쓰기의 어려움 (2)

 들뢰즈는 동물들이 각자 갖고 있는 ‘세계’를 그들의 영토(영역)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진드기는 아니지만, 영역을 표시하는 동물들이 있다. 그들에게 영역이란 자기(혹은 자기 무리)가 활동하는 공간을 뜻한다. 그들은 광활한 대지 위에 테두리를 그어 자신만의 영역을 확보한다. 테두리를 긋지 않으면 무한한 공간만이 있을 뿐 유한한 영역을 구분 지을 수 없다. 즉, 영역(영토)는 테두리라는 제한성이 만들어낸다는 뜻이다.


나를 정말 매혹시킨 또 하나는 동물들의 영토라네. (...) 나에게 동물들이 영토를 수립하는 과정은 거의 예술의 탄생처럼 보인다네. 많은 동물들이 오줌이나 항문샘 등 냄새로 영역을 표시하지.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네. 어떤 동물은 앉거나 서거나 자세를 낮추는 등의 동작으로 영역을 표시하고, 심지어는 일련의 색깔들로 영역을 표시하는 동물도 있다네. 예를 들어, 개코원숭이는 자기 영토의 가장자리에서 엉덩이를 들어 색깔을 보여주지. 색, 노래, 동작이 만들어내는 선. 그건 아주 순수한 예술이라네. (...) 그 영토가 바로 동물들의 소유물(세계)이라네.

 


 동물들은 어떻게 자신의 영역을 표시할까? 동물들은 땅에 선을 긋지 않는다. 대신 냄새로, 춤으로, 노래로, 색으로 자기 영토를 표시한다. 인간들처럼 땅에 선을 긋고 벽을 쌓지 않기에, 동물들은 매일같이 영토를 돌아다니며 춤을 추고 노래하고 엉덩이의 색을 보여주어야 한다. 들뢰즈는 동물들이 영역 표시를 ‘예술의 탄생’이라고 한다. 동물들이 영역 표시를 하는 행위가 예술가가 매일 같이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자기 세계를 표현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들뢰즈가 인간의 예술 행위를 동물의 영역 표시와 등치시킨 부분에서 소름이 돋았다. 첫 번째는 예술이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특별한 무언가가 아니라, 지극히 동물적이고 자연스러운 행위라는 생각이 들어서고, 두 번째는 나의 세계를 표현하지 않는 예술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렇다면 나의 세계는 무엇인가? 진드기의 제한성이 진드기의 세계를 만들어내듯, 나의 제한성이 나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나의 세계는 곧 나의 제한성이다. 그러므로 나의 세계를 표현하는 행위는 곧 나의 제한성을 표현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김혜원’이라는 한 인간의 테두리를 춤, 노래, 그림, 글 등의 형식으로 표시하는 것. ‘김혜원’이라는 동물의 영역 표시 행위.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가자. 나는 어떤 글이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는가? 좋은 글은 나의 제한성을 가감 없이 드러낸 글이다. 그렇지 않은 글은 무의미하다.




 그 잣대로 다시 나의 글을 되짚어 본다. 나의 글은 나의 제한성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는가? 그런 글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글도 있었다. 나의 제한성이란 무엇인가? ‘내가 원하는 것’과 ‘내가 원하지 않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내가 할 수 없는 것’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나의 한계(테두리)를 뜻한다. 내가 진드기라면, ‘나는 동물의 피를 원하지만 풀은 원하지 않아’, ‘나는 빛, 냄새, 촉각을 느끼지만 다른 자극은 느끼지 못해’라고 말하는 것이 곧 나의 세계를 표현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종종 나의 제한성을 가감 없이 드러내지 않았던 것 같다. 나의 고결한 욕망은 드러내지만 나의 더러운 욕망은 숨기고, 나의 잘난 부분은 드러내지만 나의 못난 부분은 숨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구분짓기의 신기루’라는 글에서, 나는 타인(의사 친구와 부르주아)의 구분짓기 욕망에 대해서는 자세히 이야기했지만, 나의 구분짓기 욕망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정작 나야말로 그 의사친구만큼이나 구분짓기 욕망이 강했던 사람인데 말이다. 하지만 그런 나를 드러냈다가는 욕먹을 것 같으니까 나대신 타인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 글을 쓴 것이다. 나를 드러내지 않은 채 타인 뒤에 숨어 이야기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행위다. 들뢰즈에 의하면, 예술은 나의 제한성을 표현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글을 썼던 이유는, 내가 욕먹지 않은 선에서 이 주제에 대해 말해보고 싶은 지적 허영이 아니었을까. 나는 이 주제에 대해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나는 구분짓기의 최전선에 있었지만 이제 그 욕망이 구리다는 것마저 안다, 그런 나의 잘난 모습을 뽐내고 싶은 마음. 어쩌면 그 글 자체가 거대한 ‘구분짓기’였을 수도 있겠다.




“욕먹으면 되잖아!”


나의 철학 스승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다. 인이 박힐 정도로 자주 들은 그 말이 요즘 새삼스럽게 느껴지곤 한다. 이 짧은 말에 참 많은 삶의 진실이 담겨 있다 싶다. 내가 나의 제한성을 가감 없이 드러내지 못했던 이유는 한 마디로 얘기하면 ‘욕먹기 싫어서’다. 글에다가 나의 어두운 모습이나 추한 욕망을 드러냈다가 사람들이 혹시라도 욕을 할까봐서다. 그걸 두려워하는 마음 자체가 아직 내가 나의 제한성을 충분히 긍정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자기 세계가 탄탄한 사람은 사람들의 욕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화장을 해서 더 많은 관심을 받으려 하지도 않고, 나를 드러내지 않고 타인 뒤에 숨어 욕으로부터 안전거리를 유지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 모든 행위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진정으로 아는 사람만이 자기 세계를 가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렇게 못난 점이 많고 못하는 것도 많고 이상한 욕망을 가지고 있어."


있는 힘껏 용기를 내, 나의 제한성을 매일같이 노래하며 세상 사람들의 시선 속에 나의 영토를 표시하는 것. 그리고 진드기가 제한적이기에 진드기에 매료된 들뢰즈처럼, 내가 제한적이기 때문에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 내가 할 수있는 것은 그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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