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 들뢰즈 A to Z」(질 들뢰즈) 강독 후기
글쓰기를 시작한지 거의 삼 년이 다 되어간다. 문득 지난 삼년의 시간을 돌아보니, 나의 글쓰기의 변화가 그간 나의 변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글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스승의 말은 틀리지 않나 보다.
나는 지금 있는 인문학 공동체에서 “내 감정을 찾아 떠나는 글쓰기 수업”을 들으며 글쓰기를 처음 시작했다. 삼 개월 동안 내가 과거에 겪었던 사건들과 그에 대한 감정을 글로 쓰며 내 삶을 정돈해보는 수업이었다. 그 수업에서 나는 살면서 처음으로 나의 생각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글을 써보았고, 그런 벌거벗은 모습을 애정 어린 눈빛으로 지켜봐주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때까지 나는 나의 진짜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런 이야기를 해봤자 어차피 아무도 나를 이해해주지 못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수업에서의 경험이 너무나도 강렬했다. 나는 수업이 끝나고 나서도 혼자서 계속 나를 드러내는 글쓰기를 이어나갔다. 누가 읽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고, 매일매일 나의 생각, 나의 감정, 나의 공상, 나의 욕망, 심지어 나의 성적 취향에 대한 글까지 전부 다 필터 없이 써내려나갔다. 그런 내 글을 읽고 어떤 이는 불쾌감을 느끼고 어떤 이는 나의 가감 없는 표현에 상처를 받기도 했다. 반면 ‘어떻게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는데 거리낌이 없냐’며 나를 부러워하거나 추켜 세워주는 이도 있었다. 나는 그런 반응을 받으면 우쭐해하며,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용기 있고 자신감 있는 사람이라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그것은 용기나 자신감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당시 이 공동체에서 나의 별명이 ‘정서적 노출증자’였는데, 그 별명이 많은 진실을 함축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나를 드러내는 것’이 타인으로부터 관심 받을 수 있는 행위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학교 앞 바바리맨처럼 다른 사람들의 기분이나 상태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벌거벗은 글을 써 재꼈던 것이다. 내 글을 읽고 누군가가 관심을 가져주면 그걸로 그만이었다. 그들에게 가닿고 싶은 마음도, 소통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 당시 나의 글쓰기는 ‘타인이 없는 글쓰기’였다. 그때 내가 ‘타인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나의 시선은 온통 나만을 향해 있었고, 나의 관심은 온통 내가 얼마나 많은 관심을 받는지에만 쏠려 있었다. 그런 관종이 해변에서 수영복을 벗어던지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정말로 솔직한 글을 쓰긴 썼다는 점이다. 그래서였을까. 내가 해변에서 벌거벗고 돌아다니자 나를 따라 수영복을 벗어던지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이 하나둘씩 스스로를 드러내는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거의 반년이 넘는 시간 동안 혼자 글을 썼기에 나는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글로 써 주는 것이 너무나도 반가웠다. 누군가가 글을 쓰면 제일 먼저 달려가서 읽었다. 타인의 글을 읽으면서 나도 울고 웃는 경험을 했다. 그게 내가 처음으로 다른 사람들의 삶에 ‘관심’을 가진 순간이다.
온통 나밖에 없던 세상에 처음으로 타인이 들어와서 너무 기뻤던 것일까? 나는 사람들의 글에 댓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글을 읽고 내가 생각하거나 느낀 점을 글로 써서 보냈다. ‘타인 없는 글쓰기’를 하다가 처음으로 타인에게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타인을 위한 글쓰기’가 아닌, ‘타인을 위하는 척 하는 글쓰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 나의 정신 상태가 딱 그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정서적 노출증자’에서 ‘꼰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철학을 공부하고 글도 꾸준히 써온 터라 내가 꼰대짓을 할 근거는 충분했다. 심지어 내가 공부를 오래 했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분위기도 조성 되었다. 나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얕은 지식을 바탕으로 사람들에게 조언을 일삼았다. 하지만 그건 애정에서 나온 조언이 아니었다. 나는 ‘타인에게 조언하는 나’가 되고 싶었을 뿐, 그 조언이 정말 그에게 도움이 되는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 밖에 없는 세상에 살다가 처음으로 타인을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나의 관심은 내가 남들에게 어떻게 비추어지는지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나는 타인을 내가 추구하는 이미지를 갖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다. 그 당시 내가 추구하던 이미지는 ‘타인을 위하는 나’였다. 그래서 나는 '타인을 위하는 척' 했다. 꼰대가 ‘내가 다 너를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라며 조언을 시작하듯, '타인을 위하는 척 하는 글'을 썼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 동안 꼰대로 지냈다. 그러다가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어느 순간 나는 ‘사람은 결코 혼자만의 세상에서 살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자 갑자기 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나에게 별풍선을 쏘아줄 관객도, 나의 이미지를 위해 동원될 수단도 아닌, 나와 앞으로 인간적인 관계를 맺을 진짜 ‘타자’의 모습이. 그와 동시에 내가 지금까지 그들에게 얼마나 무신경하고 꼰대짓을 일삼았는지 한꺼번에 기억에 떠올랐다. 그때부터 나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편지의 주된 내용은 미안함과 고마움이었다. “너에게 상처를 줘서 미안해.” “이런 나를 보듬어 줘서 고마워.” 참 다행히도 편지를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나를 이해하고 용서해 주었다. 그 편지를 시작으로 나와 인간적인 관계를 맺기 시작한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그런 편지를 쓸 때마다 묘하게 공허한 마음이 조금씩 쌓여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좋아하는 친구가 잘 다니던 회사에서 급작스럽게 해고 통보를 받는 일이 벌어졌다. 바로 다음 달에 회사에서 비정규직 사원 전부를 계약해지한다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정말로 당황했다. 오래 다닌 회사에서 갑자기 잘린 기분이 어떤 지 모르겠고, 이 친구가 앞으로 어떻게 생계를 해나갈지 상상할 수도 없어서. 내가 도와줄 있는 것은 하려고 했지만,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많지 않아서 미안했다. 그러다가 그 친구가 마지막으로 회사를 가는 날이 왔다. 마지막으로 회사를 갔다 집에 오는 길 마음이 싱숭생숭할 것 같아서 읽으라고 편지를 써서 줬다. 그런데 그 편지를 쓰면서 정말 답답하고 미안했다. 나는 그 친구의 마음을 위로해주고 싶은데, 그 친구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편지를 써서 주고도 미안했다. 그때 알았다. 나는 한번도 ‘타인을 위한 글쓰기’를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내가 이때까지 쓴 편지는 타인에게 보내는 글이긴 했지만, 사실은 ‘나를 위한 글쓰기’였다는 것을.
내가 사람들에게 썼던 편지가 ‘너를 위한 글쓰기’가 아닌 ‘나를 위한 글쓰기’였던 이유는 자명하다. 나는 ‘나’의 고마움과 ‘나’의 미안함을 표현하기 위해 편지를 썼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나는 ‘좋은’ 사람들과 ‘진정한’ 관계를 가꾸어나가는 일보다 인생에 중요한 일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내 주변에 좋은 사람들과 관계를 회복하거나 혹은 잃지 않기 위해, 그들에게 미안하고 고맙다는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 나는 진정한 관계가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오고 가는 미안함과 고마움 속에서 관계가 시작되거나 깊어지는 경험을 하긴 했다.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나의 미안함과 고마움을 표현하는 글을 쓸 생각이다. 하지만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순전히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픈 ‘나’의 욕망에서 비롯된 글이라는 사실을.
그래서일까. ‘나를 위한 글쓰기’는 어느 정도 필요하지만, 공허한 구석이 있는 것 같다. 정작 좋아하는 친구가 힘든 상황에 빠지자 ‘나를 위한 글쓰기’는 아무짝에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친구가 힘들어하고 있는데 어떻게 고마움이나 미안함을 표현하겠는가. 별다른 힘이 되어주지 못해 미안하긴 했지만, 그 상황에서 그 미안함을 표현하는 것보다 자기중심적인 일도 없겠다 싶었다. 그래서 그냥 밥이나 사주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주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 잘 모를 때는 그냥 닥치고 옆에 있는 것이 최선이니까.
하지만 그 사건은 분명 나의 글쓰기를 돌아보게 해준 계기가 되었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힘들고 혼란스러울 때 스승의 글을 계기로 그 상황에서 빠져나온 적이 종종 있기 때문이다. 스승은 때로 ‘나’가 되어 편지를 써준다. 내가 의식조차 하지 못한 ‘나’의 모습이 되어, 내 안에 깊숙하게 숨겨 둔 말들을 꺼내 ‘대신’ 글로 적어준다. ‘너 사실은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거 아니니?’ 아무도 받아주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 마음속에 꽁꽁 숨겨둔 말. 너무 오래 숨겨두어 나조차 잊고 있었던 말. 그 말을 누군가가 대신 해줄 때, 나는 내가 가장 어둡고 낮다고 생각했던 점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느낌이 든다. 그게 내가 현재 생각하는 ‘사랑 받는다’는 느낌이다.
들뢰즈는 「천 개의 고원」에서 사랑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
"가장 충실하고 가장 부드럽고 가장 강렬한 사랑은, 자기 자신이 다른 사람의 입 속에서 벌거벗은 언표가 되고 또한 다른 사람이 내 자신의 입에서 벌거벗은 언표행위가 되는 달콤함 속에서 서로 끊임없이 뒤바뀌는 언표행위의 주체와 언표의 주체를 분배한다." 질 들뢰즈「천 개의 고원」
스승은 이 부분을 이해하기 쉽도록 “사랑은 내가 그의 혀가 되어 그의 말을 해 주고, 그가 나의 혀가 되어 나의 말을 해주는 것”라고 설명했다. 내가 스승의 편지를 읽고 마치 내가 쓴 글처럼 느끼는 이유가 바로 그가 나의 혀가 되어 나의 말을 대신 해주기 때문일 테다. 최근 한 영상 클립에서 비슷한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사람들에게 ‘영재’소리를 듣는다는 여섯 살짜리 꼬마 아이가 나왔다. 그 아이는 세상에서 공부하는 것이 가장 즐겁다고 말한다. 심지어 엄마가 아이가 공부만 하는 것이 걱정되어 안 해도 된다고 말해도, 자기는 공부하는 것이 정말로 재미있다고 말한다. 부모가 몇 번을 다시 물어도 자기는 좋아서 하는 거라며, 부모 친구들이 오면 어려운 수학 문제를 내보라고 하고 문제를 풀어 어른들이 놀라면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른다. 그런 아이가 정신과 의사를 만나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었다. 의사가 아이에게 “네가 그렇게 공부를 잘한다며.” 하고 말을 거니 아이는 “아무 문제나 한번 내 보시던가요.” 라고 말한다. 의사가 문제도 내보고 칭찬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아이에게 “너는 학습지 푸는 게 정말로 재미있니?”라고 묻자 아이가 갑자기 침묵한다. 한참을 머뭇대던 아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저는 안 하고 싶어요.”라고 답하고 소파 뒤에 숨어 버린다. 의사가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네가 수학도 잘하고, 영어도 잘하고..”라고 다시 운을 떼자 아이가 급히 말을 자르며 “그럼 문제를 내보시던가요.”라고 또 말한다. 그때 의사가 이야기 한다. “선생님은 네가 문제를 잘 푸는지 궁금하지 않은데. 네가 기분이 좋은지가 궁금한데?” 그러자 아이가 의사 품에 안겨 펑펑 운다.
“저는 공부를 하고 싶지 않아요.” 그 작은 아이는 누군가가 그 말을 대신 해주길 얼마나 기다렸을까. 아이는 그 말을 하는 순간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덜 받게 될 거라는 사실을 직감하고 있었으리라. 아이는 부모 없이 살 수 없기에 약자다. 약자는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다. 그래서 아이는 그 말을 마음 깊은 곳에 꽁꽁 숨겨둔 것이겠지. 자기가 그 말을 하고 싶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정도로 오랜 시간 동안. 아이는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묻어둔 채, 자기는 수학이 정말 좋아서 하는 거라고 스스로를 속였을 거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의 사랑을 받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을 테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이 처음으로 자기가 진짜로 하고 싶었던 말을 대신 해준 것이다. 아이는 깜짝 놀라서, 다시 자기가 항상 사랑 받아오던 방식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그런데 이 어른은 ‘공부 잘하는 나’는 궁금하지 않고, ‘기분이 좋은 나’가 궁금하다고 한다. 아이 입장에서는 처음 느껴보는 차이 아니었을까.
물론 그 아이가 진짜 치유받기 위해서는 의사가 아닌 부모님이 그 말을 해주어야 할 테다. 그 작은 아이가 지금 필요한 건 몇 번 만나지 못하는 의사의 사랑이 아닌 부모님의 사랑일 테니까. 그렇다고 부모님이 “우리는 네가 공부 잘하는 것보다 기분 좋은 게 더 궁금해.”라고 말만 해서는 안 된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말만 그렇게 하면, 아이는 부모의 거짓말을 언젠가 눈치 채고 더욱 더 마음을 닫아버릴 테니까. 네가 차마 하지 못한 말을 대신해주고, 그 말을 진심으로 긍정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 아닐까.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권력을 지녔다는 것이다.”
최근에 스승이 스치듯 했던 말이다. 내가 지금 글을 쓰는 삶을 욕망해서 때문인지 그 말이 꽤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 정말로 그러하다.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특권이다. 글을 배우고 어느 정도 지식이 있으며 먹고 사는 문제를 약간이라도 해결한 사람만이 글을 쓸 수 있다. 글을 배우지 못했고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할 만큼 교육 받지 못했으며 생계 때문에 시간적, 정신적 여유를 낼 수 없는 사람들은 글을 쓸 수가 없다. 글을 쓰지 못한다는 것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른 이들에게 ‘남길’ 수 없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살펴보아도 민중들은 글을 쓰지 못했기에 자신의 이야기를 남길 수 없었다. 그렇다면 ‘글을 쓸 수 있다’는 권력을 가진 작가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작가란 무엇인가? 분명 작가란 독자를 ‘위해’ 글을 쓰는 사람이지. (...) 책을 읽는 사람들을 ‘위해’ 글을 쓰는 것이라네. 하지만 작가들은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글을 쓰거든. 이 경우 작가는 그들을 ‘대신하여’ 글을 쓰는 것이지. 그러므로 독자를 위해 쓴다는 것은 그들을 ‘위해’ 쓰는 것과 그들을 ‘대신하여’ 쓰는 것, 두 가지를 의미한다네."
"아르토는 이런 글을 썼지. “나는 문맹들을 위해 글을 쓴다.” “나는 바보들을 위해 글을 쓴다.” 그렇다고 문맹들과 바보들이 그의 글을 읽는 것은 아니라네. 그건 그가 문맹들과 바보들을 ‘대신하여’ 글을 쓴다는 말이지. (...) 나는 문맹, 바보, 동물들을 대신하여 글을 쓴다네.”「질 들뢰즈 A to Z」
들뢰즈는 작가는 누군가를 ‘대신하여’ 쓰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누군가를 대신하여 쓰는 것. 말을 할 수 없는 이의 혀가 되어 그의 말을 대신해 주는 것. 그래서 들뢰즈는 글을 쓸 수 없는 문맹, 글을 읽을 수 없는 바보, 말을 할 수 없는 동물들을 대신하여 글을 쓴다고 한다. 문맹, 바보, 동물을 대신하는 글이 어떤 것인지 나는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다. 하지만 나의 스승이 나에게, 또 의사가 작은 아이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도 언젠가는 사랑하는 누군가가 너무나 하고 싶었지만 차마 꺼내지 못했던 그 말을 대신 해주고 싶다. 그렇게 누군가의 아픈 마음을 안아주고 싶다. 문맹, 바보, 동물, 아이를 대신하는 글은 쓸 수 없어도, 사랑하는 이를 대신하는 편지는 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네가 없는 나’, ‘너를 위하는 척 하는 나’, ‘나를 위하는 나’를 넘어, 언젠가는 ‘너를 위하는 나’, ‘너를 대신하는 나’가 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