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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Jan 28. 2021

나를 드러내는 글쓰기의 어려움 (1)

"동물들은 특정하고 제한적인 세계를 가지고 있다네."

 글을 쓰고 나면 여러 가지 감정을 느낀다. 가장 첫 번째 드는 감정은 ‘오늘 해야 할 일을 했다’는 뿌듯함이다. 나는 글쓰기를 좋아하지만 글을 쓰기 전에 늘 머뭇거리는 마음과 싸우곤 한다. 그냥 쓰면 되는데, 잘 쓰고 싶어서 그렇다. 잘 하고 싶은 마음은 언제나 사람을 무겁게 만든다. 그 욕심 때문에 나는 아직까지도 글을 쓰기 전에 마치 숙제하기 싫은 아이처럼 미적대는 시간을 가진다. 미적대다가 ‘아니야, 그냥 쓰자!’라고 마음을 먹고 일어나 첫 번째 문장을 키보드로 치면 다시 글쓰기의 즐거움에 빠져든다. 그렇게 하나의 글을 완성하고 집필실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보람찬 감정을 느낀다. 그게 내가 글을 쓰고 느끼는 첫 번째 감정이다.


 하지만 그 감정은 오래 가지 않는다. 그 뿌듯함은 스스로를 향한 ‘셀프 격려’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글을 잘 쓰고 싶은 욕심은 늘 ‘글을 잘 쓰지 못하면 어떡하지?’라는 불안과 맞닿아 있다. 그 불안 때문에 글을 쓰기 전에 미리 부담을 느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글을 썼다는 건 그런 불안을 넘어서 좋아하는 일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 스스로를 칭찬하고 격려하고 싶은 마음이 내가 글을 쓰고 난 뒤 느끼는 뿌듯함이다. 잘 쓰고 싶은 욕심이 없었다면 불안하지도 않았을 테고, 불안하지 않았다면 그냥 썼을 테고, 그냥 썼다면 뿌듯함을 느낄 이유도 없을 테니까.


 그래서일까? 뿌듯함은 금방 사그러들고 그 자리에 같은 질문이 다시 고개를 든다. ‘나는 글을 잘 쓴 걸까?’ 특히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글을 쓰고 있는 요즘, 내가 글을 잘 쓰고 있는지 늘 점검하게 된다. 하지만 한 동안 스스로에게 그 질문을 던지기만 할 뿐, 그렇다할 답을 하지 못해 혼란스럽고 답답했다. 며칠 동안 그 이유를 고민하다가 작은 실마리 하나를 찾았다. 내가 글을 잘 쓰고 있는지 아닌지 스스로 답할 수 없었던 이유는, 어떤 글이 좋은 글인지 깊게 고민해본 적이 없어서였다. 어떤 글이 좋은 글인지 모르니, 내 글이 좋은 글인지 판단할 수도 없었던 게다. 인문학 공동체 안에서 글을 쓴지 2년 가까이 되었다. 공동체 안에서는 스승이 그 판단을 어느 정도 대신해 주었다. 이제는 스스로에게 물어야할 때다. 지금 나는 어떤 글이 좋은 글이라 생각하는가? 지금 나는 어떤 글을 써야하는가?





 들뢰즈는 「질 들뢰즈 A to Z」의 가장 첫 파트, Animal에서 동물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한다.


"내가 동물에 있어서 좋아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모든 동물들이 각자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네. 자기 세계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 점이 내 호기심을 자극하지. 많은 사람들은 살아지는 대로 삶을 살지. 하지만 동물들은 각자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네. 그러면 동물의 세계란 무엇일까? 가끔 그것은 아주 제한적으로 보이지. 동물들은 아주 소수의 자극에만 반응을 한다네. 어떤 특정한 것에만. 그러니까 동물들의 첫 번째 특징은 그들이 이런 특정하고 제한적인 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야." 「질 들뢰즈 A to Z」


 들뢰즈는 동물은 각자 특정하고 제한적인 세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며, ‘진드기’를 예로 든다. 들뢰즈에 의하면 진드기는 오직 세 가지 자극에만 반응한다. 진드기는 ‘빛’에 반응해 나뭇가지의 가장자리로 이동한 뒤, 몇 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먹지도 않으며 나뭇가지 밑을 지나가는 동물들의 ‘냄새’가 나기를 기다린다. 그러다가 동물이 지나가면 바로 떨어져내려 ‘촉각’에 의지해 동물의 피부에서 털이 제일 적게 난 부위를 찾아낸 뒤, 신나게 피를 빤다. 빛, 냄새, 촉각. 거대한 자연 속에서 진드기는 오직 이 세 가지 자극만을 쫒는다. 즉, 진드기의 세계는 이 세 가지 구성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진드기의 ‘특정하고 제한적인 세계’일 테다.


 얼핏 진드기의 삶은 단조롭고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한다. 수많은 자극이 넘쳐나는 대자연 속에서 오직 세 가지 자극만 받아들일 수 있는 삶이라니. 그래서 우리는 진드기를 인간보다 덜 진화한 생물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들뢰즈는 우리와 다른 견해를 이야기한다. 그는 이런 조그마한 세계의 제한성이 감동적이라고 하면서, 동물들은 자기 세계를 가지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고 덧붙인다. 그렇다면 왜 동물들은 자기 세계를 가지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렇지 못할까? 동물들은 ‘제한성’을 긍정하는 반면, 사람들은 대부분 ‘제한성’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진드기가 진드기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빛, 냄새, 촉각 세 가지 자극에만 반응한다는 점이다. 만일 진드기가 그 이상의 자극에 반응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진드기가 아닐 것이다. 마치 토끼가 하늘을 날면 더 이상 토끼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우리 눈에는 진드기가 단순하고 열등한 생물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진드기는 그 제한적인 삶을 아무 불만 없이 살아나간다. 날지 못한다고, 뛰지 못한다고, 힘이 세지 않다고 번민하지 않는다. 진드기는 기다린다. 자기가 욕망하는 그 동물이 나뭇가지 밑을 지나갈 때까지. 진드기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수많은 자극 중 어떤 자극에 반응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이다. 진드기는 오랜 기다림 끝에 피를 포식하는 큰 기쁨을 누린다. 어쩌면 우리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을 큰 기쁨을.


 자기 세계는 ‘제한성’이 만든다. ‘세 가지 자극’이라는 제한성이 ‘진드기’의 세계를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제한성이 없으면 자기 세계도 없다는 뜻이 된다. 들뢰즈의 말처럼 자기 세계가 없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제한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고기가 물고기인 이유는 날지 못하고 걷지 못하기 때문인데, 그 제한성을 받아들이지 않고 하늘을 나는 매나 초원을 뛰는 사슴이 되고 싶어 하니, ‘물고기’라는 세계가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욕망 또한 마찬가지다. 진드기는 오직 세 가지 자극에만 반응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 인간은 수 없이 많은 자극 중에 자기가 반응해야 하는 자극이 무엇인지 구분하지 못한다. 진드기는 동물의 피만을 욕망하지만, 인간은 자기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잘 모른 채, 이것저것 게걸스럽게 욕망하기 때문이다. 진드기는 제한적이기에 세계를 가지지만, 인간은 제한적이지 않기에, 아니 제한적이고 싶어하지 않기에, 자기 세계를 잃게 된다. 어떤 존재의 세계는 그의 제한성이다. 그것이 들뢰즈의 통찰이다.


어떤 존재의 세계는 그의 제한성이 만든다. 그것이 들뢰즈의 통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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