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누드모델과 스피노자

“우리는 자기 몸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by 김혜원

“나도 누드모델 해봐야 하나?”


몇 년 전, 함께 철학을 공부하던 친구가 누드모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자기 친구가 미대생 때 누드 크로키를 그렸는데, 쉬는 시간에 그 누드모델이 너무나도 당당하게 나체로 교실을 돌아다니는 바람에 민망해하는 자신이 더 민망했다는 이야기였다. 내 친구는 그 이야기가 정말 인상적이라고 했다. 그 누드모델은 얼마나 자신을 드러내는데 거리낌이 없으면 나체로 돌아다녀도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궁금하다고 했다. 당시 우리는 철학을 배운지 얼마 되지 않은 ‘철학 사춘기’ 시기였다. 세상이 무서워서 늘 움츠러들어 살다가 처음으로 철학이라는 안경을 써서 세상이 조금씩 명료해지고 삶을 살아가는 데에도 자신감이 붙기 시작한 시기. 우리는 철학에 푹 빠져 매일 밤 술을 마시며 철학 이야기를 꽃피웠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단골 주제는 늘 “어떻게 하면 철학가들이 말하는 자유인의 삶에 다가갈 수 있을까?”였다. 니체가 말하는 ‘초인’, 라캉이 말하는 ‘실재계’의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 그게 무엇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간지나는 철학자들이 간지나는 삶에 대해 이야기하니 우리도 빨리 그런 삶을 거머쥐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후 철학을 더 공부하면서 ‘삶은 언제나 한 걸음씩밖에 걸을 수 없다’는 사실을 천천히 받아들이게 되었지만, 당시 우리는 철학적 삶을 향해 묵직한 한 걸음을 내딛기보다 한 방에 날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데만 몰두했다. 누드모델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이야기였다. 사람들 앞에서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게 어려우니 한방에 두려움을 떨쳐 내보고 싶은 마음.

정신분석가 라캉


그 후 그 대화는 잊혀졌다. 이 년 전에 잠시 나눴던 대화이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런데 몇 달 전 짤막한 글을 쓰다가 갑작스레 그 대화가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 다음부터 ‘누드모델’이라는 단어가 머리에 박혀 빠져나오질 않았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다. 내가 요즘 ‘몸’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많으니 자연스럽게 그 대화가 떠올랐나 보다 했다. 그런데도 관심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내 욕망을 스스로 분석해봤다. ‘이거 몸에 대한 콤플렉스를 쉽게 극복하고 싶은 마음 아닐까? 누드모델은 내 몸을 욕하지 않기로 합의된 사람들 앞에서 몸을 드러내는 것이니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거잖아. 그리고 이거 노출증적인 욕망과도 관련되어 있는 것 같은데? 사람들을 관중으로 무화시킨 채 나를 드러냄으로써 관심 받고 싶은 마음.’ 철학 좀 배웠다고 분석은 줄줄 나왔다. 틀리지 않은 분석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내 욕망의 원인을 알았으니 관심이 식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러질 않았다. 그 후에도 계속 머릿속에 ‘누드모델’이라는 단어가 사라지지 않았다.


당황스러웠다. 왜 사라지지 않지? 다시 곰곰이 따져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누드모델에 관심이 가는 이유는 몸에 대한 콤플렉스를 쉽게 극복하고 싶어서인 것 같았다. 머리로는 인생 날로 먹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날로 먹고 싶으니까 이러는 것 같았다. 계속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언젠가 스승이 지나가듯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네가 무엇을 할지 말지 고민하는 것보다, 네가 지금 그 ‘무엇’을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래, 내가 누드모델에 관심이 가는 이유를 알아서 뭐할 건가. 중요한 건 내가 지금 그것에 관심 있고, 그 관심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지. 며칠을 더 고민하다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누드모델 에이전시에 연락을 했다. 뭐든 간에 일단 해보고 판단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에이전시 문 앞에서 머뭇대다가 문을 열었다. 누드 크로키를 그리는 화실로도 쓰고 있다는 그 공간은 생각보다 훨씬 밝고 따뜻한 분위기였다. 벽 군데군데에 누드화가 붙어 있었다. 늙은 남자의 몸, 살집 있는 여자의 몸, 소녀처럼 수줍은 몸, 웅크린 몸, 누군가를 기다리는 몸. 종이 안에 다양한 몸들이 담겨 있었다. 그걸 보는데 가슴이 조금 뭉클해졌다.



에이전시 원장과 간단한 상담을 했다. 이 주 뒤에 화가들을 대상으로 누드 크로키 시간이 잡혀 있으니, 그때 와서 한 번 일을 해보라고 했다. 그리고 시간이 된다면 일이 끝난 뒤 다른 모델을 보면서 누드 크로키를 직접 그려보라고 했다. 어떤 식으로 일을 해야 하냐고 물으니,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한 포즈를 3분씩 총 30개 취하면 된다고 했다. 일에 대한 설명은 그게 다였다. 이 일은 느낌대로 하는 것이니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고 했다. 나는 알겠다고 하고 짧은 상담을 마쳤다. 계단을 올라 밖으로 나왔는데 심장박동이 가라앉지를 않았다. 몸도 마음도 어찌할 바를 몰라서 주변 공원을 정처 없이 계속 걸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이 모든 게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핸드폰 달력을 켜서 이주 뒤 토요일에 표시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이 일을 잊어버릴 것 같았다. 핸드폰을 보며 벤치에 앉아 한참을 있었다.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그 후 이주 동안 이상하게도 ‘누드모델’에 대한 생각이 아예 나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기억을 떠올리지 않는 이상, 내가 상담을 하고 왔다는 사실도 가물가물할 정도였다.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이 주가 흐르고 전날 밤이 되었다. 친구가 기분이 어떻냐고 물어서 덤덤하다고 했다. 그때까지는 그랬다. 그런데 친구가 집에 가고 집필실에 혼자 있자 갑자기 또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이상하다, 갑자기 왜 이러지? 이제 와서 긴장되는 건가?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럼 내일 못할까봐 무서운 건가? 그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러면 이 쿵쾅거림은 뭐지? 아! 이거 설렘이구나.


“우리는 자기 몸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한 말이다. 3년 동안 철학을 배우면서 이 문장을 들을 때마다 나는 항상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나는 정신을 중시하는 환경에서 자라왔기에 몸이 중요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내가 배우는 철학은 온통 정신은 거짓이고 몸이 진짜라고 말하니 참으로 미칠 지경이었다. 나는 몸이 약한데다가 별로 써본 적도 없기 때문에 그게 뭐든 몸으로 하는 건 다 못할 것 같았다. 나는 못하는 것을 싫어하니까 몸으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에 매일 위축되었다. 그런데 정말 처음으로 스피노자의 저 문장이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나는 내가 몸을 두려워하기에 저 문장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나는 몸이 아니라 '알지 못한다’는 부분이 두려웠던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예측 불가능한 상황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내 정신은 거부하는데 내 몸은 긍정하는 상황. 내 정신으로 내 몸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 그런 상황을 견딜 수 없기에 저 문장이 그토록 불편했던 것이다. 그런데 처음으로 저 문장이 긍정적으로 다가왔다. 나는 왜 누드모델 일을 앞두고 설렘을 느끼는가? 그건 내일 내가 누드모델을 하며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떤 반응을 할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내 몸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르기에, 삶은 무섭기도 하지만 설레기도 한 것이었다. 그 설렘의 감정이 소중했다. 어쩌면 내가 ‘불확실성’에서 처음으로 두려움보다 설렘을 느껴본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렘을 안고 잠에 들었다. 다음 날이 왔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원장에게 일에 대한 설명을 조금 더 들었다. 1시가 되면, 준비해온 음악을 틀고 가운을 벗어 의자에 걸어놓고 타이머의 스타트 버튼을 누르고 무대에 와서 포즈를 취한다, 타이머의 알람이 울리면 다른 방향을 보고 다음 포즈를 취한다, 10개의 포즈를 끝내면 10분 휴식 후, 다음 세션을 시작한다. 순서를 속으로 되뇌였다. 시간이 흐르자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이젤을 펴고 캔버스를 올리고 물감을 짜고 연필을 깎으며 서로 가벼운 일상 대화를 나눴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그 공간에서 긴장한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오만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아무리 사람들 앞에서 무심한 성격이라고 해도 혹시 갑자기 쫄아서 가운도 못 벗으면 어떡하지? 일부러 음악을 들으며 느낌대로 해보려고 포즈도 미리 생각해오지 않았는데, 혹시 도중에 갑자기 백지 상태가 돼서 멀뚱히 서 있으면 어떡하지?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민폐 아닐까? 혹시 도중에 눈물나면 어떡하지? 감정이 격해지면 어떡하지? 뭘 어떡해. 그럼 그냥 그만하면 되지. 혼자 자문자답하며 커피 컵에 꽂힌 빨대를 쭉쭉 빨았다. 시간이 되었다. “시작하겠습니다.” 원장이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천천히 음악을 켜고 가운을 벗었다. 벽 한쪽을 메운 거울에 내 벌거벗은 몸이 비쳤다. 거울 속의 내 눈과 눈이 마주쳤다. 기분이 묘했다. 무대 쪽으로 가서 타이머의 스타트 버튼을 누르고 첫 번째 포즈를 취했다. 가만히 서서 조금 위 쪽을 바라봤다. 사각사각. 조용한 공간에 연필 소리만 났다. 타이머가 삑 울려 다음 포즈를 취했다.


생각보다 옷을 벗는 것은 긴장되지 않았다. 머릿속에 온통 다음 포즈는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음악을 들으며 느낌가는 대로 포즈를 취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질 않았다. 포즈를 취한 3분 내내 다음 포즈를 어떻게 하나 머리를 굴렸다. 첫 번째 쉬는 시간이 왔다. 원장이 조용히 나에게 다가와 나른한 포즈만 취하지 말고, 자기가 표현하고 싶은 것을 동작으로 표현해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멘붕이 왔다. 표현하고 싶은 것을 표현하라고? 나는 포즈라는 게 어떤 특정한 모양의 동작을 취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구나. 몸으로 어떤 감정이나 장면을 표현하기를 바라는 거구나. 다음 세션이 시작됐다. 음악에 조금 더 귀를 기울여보자고 생각했다. 음악을 듣자 그 음악을 자주 들었을 때 장면이 떠올랐다. 나는 쭈그리고 앉아서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 음악을 들었을 때 그런 자세로 자주 울었었다. 그 자세를 취하자 갑자기 울컥하면서 눈에 눈물이 고였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 다음엔 내가 삶에서 기억나는 장면들을 떠올려봤다. 일어서서 머리카락을 손으로 쥐고 뜯는 모양을 했다. 그 자세를 취하자 절망스러운 감정이 들었다. 갑자기 풋 하고 웃음이 날 것 같았다. 그래,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어야 하는데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맨날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망감에 빠졌었지? 홧김에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치던 기억, 살에 피가 날 때까지 손톱으로 찍어 누르던 기억도 떠올랐다. 절망스러운 감정이 들어서인지 다음 포즈는 사람을 때리는 자세를 취하고 싶었다. 우울감과 절망감이 지속되면 나는 건물 위에 올라가서 뛰어내리거나 자동소총으로 사람들을 다 쏴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게도, 포즈를 취할 수가 없었다. 사람을 총으로 쏘는 상상만 해봤지, 실제로 사람을 때려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갑자기 머릿속에 원장이 상담에서 지나가듯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 일을 처음 할 때 포즈를 취하는 걸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 수 있어요.”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흘려들었던 말이다. 소심한 사람은 소심한 포즈를 취할 테고, 계산적인 사람은 계산된 포즈만 취할 테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그 말은 그런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다. 사람은 삶에서 직접 몸으로 해보지 않은 것을 몸으로 떠올릴 수 없는 것이었다. 갑자기 해보지 않은 자세를 상상해서 취해본들, 부자연스럽고 어색할 게 뻔했다. 마치 내가 느끼지 않은 것을 상상해서 쓴 글처럼 거짓스럽고 가벼울 게 뻔했다. 갑자기 큰일났다 싶었다. 내가 삶 속에서 취해본 자세가 몇 개나 있을까.


다음 세션 내내 나는 우울하고 무기력한 포즈만을 취했다. 바닥에 누워서 머리에 손을 올리고 있는 포즈, 아무것도 하기 싫어서 땅의 한 지점만 바라보고 있던 포즈. 다행이 사이사이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했던 포즈도 떠올라서 취해봤지만, 대부분은 부정적인 감정을 느꼈을 때의 포즈였다. 내가 포즈를 취할 때마다 내 우울하고 무기력한 감정이 그 공간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나중에는 그리는 사람들에게 너무 미안해서 어떻게 기쁘고 역동적인 감정을 몸으로 표현할지 계속 고민하다가 타이머 소리를 못 듣는 실수까지 저질렀다. 당황스러웠다. 나는 정말로 몸을 유쾌하고 역동적으로 써본 적이 없다는 자각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지금의 나는 그저 지금 내 몸이 기억하는 자세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우울하고 무기력한 동작들을 털어내고 싶었다. 내 몸에 유쾌한 동작, 역동적인 동작, 사랑의 동작들이 새겨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다리를 주무르고 기지개를 켜고 싶었다. 조금은 수줍게 기지개를 켰다. 다 벗은 채로 팔을 쭉 벌리고 가슴을 편 자세가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런데 마음에서 무언가가 꿈틀대고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조금은 뭉클했고 설렜으며 두근댔다. 타이머가 길게 울렸다. 세 번의 세션이 끝났다. 탈의실에 가서 옷을 입었다. 몇 분 전까지 벌거벗고 있다가 갑자기 옷을 입으니 왠지 옷을 입은 모습을 보이는 게 더 쑥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벽에 붙은 거울에, 후드티를 입고 안경을 쓰고 머리를 묶은 평소의 내 모습이 비쳤다. 그 모습이 왠지 반갑게 느껴졌다.


쉬는 시간이 지나자 다음 모델이 들어왔다. 40대 후반 정도의 남성분이었다. 지나가는 이야기를 들으니 평생 무용수로 활동하다가 은퇴 후 이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타이머가 울리고 그 분이 가운을 벗고 첫 번째 포즈를 취했다. 인간의 몸이 저렇게 움직일 수 있구나, 경탄의 감정이 들었다. 그 분은 자기가 과거에 겪었던 장면을 묘사하는 게 아니었다. 그냥 온 몸으로 분노, 의지, 고뇌, 슬픔, 안도감, 투지, 사랑 같은 감정들을 표현해냈다. 어떤 때는 살아있는 뭉크의 ‘절규’ 같았다가, 어떤 때는 살아있는 그리스 조각상 같았다. 그 분의 몸이 경이로웠다. 사실 그 분이 처음 가운을 벗었을 때는 너무 깡마르고 피부에서도 노화의 흔적이 많이 묻어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분이 포즈를 취할 때마다 온몸이 정말 펄떡펄떡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힘이 있는 글처럼 힘이 있는 몸이라고 생각했다. 형용할 수 없는 여러 가지 감정들이 구더기처럼 꿈틀댔다. 강렬했다.





‘나는 그간 얼마나 많은 욕망을 스스로 거세해왔을까?’


그날 밤 잠에 들기 전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분명 나는 누드모델 일을 하면서 관종적인 기쁨을 느끼긴 했다. ‘나는 여전히 무대에서 주목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그래서 누드모델을 해보고 싶었던 거구나.’ 내가 이 일을 해보기 전, 내가 왜 이걸 하고 싶어 하나 스스로 분석해봤을 때 찾아냈던 원인들은 분명 틀리지 않았다. 내가 누드모델이 하고 싶었던 이유는 몸에 대한 콤플렉스를 쉽게 극복하고 싶어서, 그리고 쉽게 관심을 받고 싶어서가 맞았다. 내가 분석했던 대로 그 욕망은 한방에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었기에, 누드모델을 했다고 몸에 대한 콤플렉스가 사라지지도 않았고, 순간적으로 관종의 쾌감을 느끼긴 했지만 그렇게 관심 받았다고 크게 기쁘지도 않았다. 오히려 내가 정말 기뻤던 것은 예측하지 못한 마주침들이었다. 내가 몸으로 느낀 것들, 갑자기 떠오른 스피노자의 문장, 스승이 지나가듯 했던 말, 그 공간의 분위기, 내 몸의 반응과 기억, 그 속에서 떠오른 생각들, 구더기처럼 꿈틀대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 벽에 붙어있던 누드화 속의 몸들, 강렬한 힘을 가진 어떤 타인의 몸, 그 몸을 보며 스친 생각들, 처음 누드 크로키를 그려온 경험, 색연필의 감촉, 그런 것들. 삶의 기쁨은 그런 것들에서 오는 것이였다.



나는 참 바보 같았다. 철학을 배우고 욕망에 따르는 삶을 살겠다고 했다. 그래놓고 어떤 욕망이 생기면 제일 먼저 달려가서 내가 그 욕망을 싹둑 잘랐다. 앎이 너무 많아서 생긴 사달이었다. 앎이 너무 많아서 나는 철학 사춘기에서 철학 노인이 되어버렸다. 어떤 욕망이 생기든 그 욕망의 원인을 분석했다. ‘내가 저 사람에게 끌리는 건 저 사람이 아버지를 닮아서야. 라캉이 딸은 아버지를 욕망하는 존재라고 했잖아. 내가 저 일에 끌리는 건 내가 그게 결핍된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야. 저 일을 한다고 그 결핍이 채워지진 않을 거야.’ 그렇게 분석해버리면 왠지 그 욕망이 시시해보였다. 분석은 내 욕망 주변에 거품처럼 끼어있는 환상들을 걷어 내주기 때문이다. 환상이 없으면 실망 또한 적다. ‘이 사람이랑 사귀면 영원히 행복할 거야!’라는 환상을 가지면 그 환상이 깨졌을 때 추락하는 폭도 커지니까. 나는 그 추락의 상처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그토록 치밀하게 내 욕망을 분석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너무 지나친 나머지 실망하지 않기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지경이 다다랐다. 난 내 삶을 스스로 갑옷 안에 넣어버린 셈이다.


앞으로도 나는 내 욕망을 분석하는 습관을 버리지 못할 것이다. 그건 무의식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이니까. 라캉의 말처럼 내가 과거 어떤 지점에서 겪은 결핍이 지금의 내 욕망을 만들어내는 게 맞을 테다. 그런데 그 결핍은 내가 지금 어느 방향으로 걸을지 등 뒤에서 한번 쓱 밀어주는 동력이 되어줄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는 것 같다. 결핍이 나를 밀어주면 그 방향으로 일단 걸으면 된다. 그 방향으로 걷다보면 내가 예측할 수 없는 수없이 많은 마주침들을 만날 테고, 그 마주침에 이끌려 조금씩 걷는 방향이 바뀔 테니까. 그렇게 계속 결핍을 동력삼아 마주침이 이끄는 대로 그냥 걸으면 된다. 그렇게 걷다보면 결핍이 더 이상 큰 의미를 띄지 않게 되는 것이었다. 결핍으로 시작했기에, 그 끝에 ‘결핍의 완벽한 해소’가 있을 거라고 믿는 것이, 더 나아가 ‘결핍의 해소’가 없다면 애초에 걷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큰 오만이자 어리석음이었다.


몸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누드모델을 하고 싶었다. 누드모델을 했지만 몸에 대한 콤플렉스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내가 머리로는 상상할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을 느꼈으니까. 몸에 대한 결핍이 사라지지 않았기에 나는 다른 것들을 또 해볼 것이다. 그것들을 해도 결핍은 사라지지 않을 수 있다. 그래도 괜찮다. 계속 걷기만 한다면 나는 또 새로운 것들과 마주칠 테니까. 인생은 소풍이라는 스승의 말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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