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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Mar 28. 2021

페르시아 왕자와 스타크래프트

자본주의에서 가족주의, 그리고 인문주의로.

 어린 시절 우리 집에는 286 컴퓨터가 있었다. 지금 아이패드보다 화면이 작은 컴퓨터. 그 컴퓨터를 가지고 아버지와 나는 매일 밤 게임을 했다. 90년대 명작이라고 하는 게임은 모두 섭렵했다. 페르시아 왕자, 레밍스, 남극탐험, 체스 게임. 그중에 나와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게임은 페르시아 왕자였다. 나는 아버지가 게임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좋았다. 어린 나에게 페르시아 왕자는 꽤 잔인했지만, 왕자가 작두에 잘려 죽고 바닥에서 솟아난 가시에 찔려죽을 때마다 꺅꺅 소리를 지르면서도 아버지 옆에 꼭 붙어 몇 시간이고 게임 구경을 했다. 일본어에 능숙했던 아버지는 게임을 하다가 맥주가 떨어지면 나에게 “비루 잇뽕 구다사이(맥주 한 병 주세요. ビ一ル 一本ください)”라고 말했다. 그러면 나는 “비루이 뽕꾸라사이~”라고 외치며 냉장고에 쪼르르 달려가 시원한 맥주캔을 가져왔다. 그걸 하도 많이 반복해서 나중에는 아버지가 나를 아예 ‘뽕꾸라’라고 불렀다. “뽕꾸라야, 게임하자!”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게임하던 그 방의 모든 것이 생각난다. 빛바랜 286 컴퓨터, 아버지가 입고 있던 늘어난 런닝셔츠, 여름밤의 끈적한 공기, 탈탈 소리를 내며 돌던 선풍기, 빈 맥주 캔에서 나던 냄새, 깔깔대던 웃음소리, 그리고 페르시아 왕자. 내가 부모와 함께 했던 행복한 기억은 그 방에 응축되어 있다.





 철학을 배우고 나는 가족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특히 사랑하던 아버지에게서 정서적으로 독립하기 위해 지난 삼 년간 아버지에 대한 글만 수십 편을 썼을 정도다. 나는 아버지가 좋았다. 누가 뭐래도 아버지는 나에게 잘해주었고, 나와 아버지 사이에는 여느 연인 못지않게 행복했던 둘 만의 추억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 철학을 배울 때, 내가 우울증에 걸리게 된 근본적이 이유가 아버지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스승이 말했다. ‘부모를 죽인만큼 어른이 된다.’ 맞는 말이었다. 철학을 조금만 배워도 내가 기쁜 삶을 살지 못한 이유는 어른이 되지 못해서라는 걸 금방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자각의 이면에는 늘 답답함이 따라 붙었다. 때리는 부모도 아니고, 잘해주고 싶어 안달이 난 부모를 대체 어떻게 죽인단 말인가. 고민 끝에 나는 부모와 거리를 두는 방법을 택했다. 어느 날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아버지, 저는 가족들 앞에서 늘 괜찮은 척 연기를 해왔지만, 사실은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평생을 아버지가 알려준 삶의 방식대로 열심히 살아왔지만, 그 끝에 행복이 없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저는 이제 다른 방식대로 삶을 살아보려고 합니다. 저는 이제 ‘고통 없고 공허한 삶’보다는 ‘고통스럽지만 행복한 삶’을 살고 싶습니다.” 라고.


 그 편지를 아버지에게 건넨 지 벌써 이년이 지났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정말로 다른 방식의 삶을 살았다. 좋은 스승과 친구들이 곁에 있어주었지만, 자본주의 전사였던 내가 인문주의로 가는 길은 결코 쉽지 않았다. 모든 것이 거꾸로 된 세상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나는 가족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배웠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잠재적으로 나를 공격하거나 이용할 사람이니 늘 경계하고 의심해야 한다고 배웠다. 내 것을 남에게 줄 때는 반드시 ‘여유 자금’에서만 줘야 한다 배웠으며, 그 이상을 주는 것은 ‘호구’라고 배웠다. 세상에 돈과 권력으로 안 되는 일은 없다, 예술이니 사랑이니 운운하는 사람들도 막상 돈과 권력을 쥐면 돌변하는 게 삶이다, 인간은 권력욕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니 경쟁에서 이겨 우두머리가 되든지 아니면 노예처럼 굴욕적이게 살아야 한다고 배웠다. 내가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는 나에게 세상은 그런 곳이라 가르쳤다. 그에게 세상이 그런 곳이었을 테니 말이다.


아버지는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밑으로 줄줄이 동생 네 명이 있었다. 작은 집에서 할아버지와 형제들이 부대끼며 살았다. 아버지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초등학생이었을 때부터 집에 없었고 할아버지는 웃는 얼굴을 한 번도 볼 수 없었을 정도로 차갑고 무뚝뚝한 분이었다. 아버지는 평생 집안의 기둥이었다.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몸집도 작고 힘도 약하고 잔병치레도 많이 했지만 깡 하나는 있었다. 사실 그 깡이 아버지의 유일한 무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아버지는 대학생 때 학생 운동을 하다가 학교에서 제적을 당하고 강제로 군대에 끌려갔다. 나에게는 말해 줄 수 없을 만큼 험한 군 생활을 했다고 했다. 제대를 하고 나서는 소위 말하는 ‘빨간 줄’이라 그 어디에도 취직이 안 되었다. 스물다섯의 나이에 할 일이 없어서 산에 들어가 산지기 생활을 하다가, 할아버지가 취직이 안 되면 장사라도 하라고 권유하여 출판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일본에서 만화책들을 가져와 글자를 도려내 한글 번역을 달아 복사해서 팔았다고 했다. 물론 불법 행위지만 그때는 저작권법도 없어서 괜찮았다고 했다. 그 만화책들이 날개 돋힌 듯이 팔려서 사업 초기 자금을 마련했다. 몇 번의 도산 위기가 있었지만, 아버지는 서른 중반 정도 젊은 나이에 사업을 안정기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때쯤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치병에 걸렸다. 언니가 네 살, 나는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다. 아버지의 건강은 하루가 다르게 나빠졌다. 의사들도 어찌 손을 쓰질 못하자 아버지는 병상에서 천천히 삶을 정리했다. 어머니에게 어린 두 딸을 기를 돈은 충분하니 아이가 나오면 얼른 재혼하라고 했다. 너는 예뻐서 남자들이 줄을 설 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나는 심성이 약한 어머니가 임신한 상태에서 남편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어찌 견뎌냈나 싶다. 매일 밤 아버지의 친척들이 와서 ‘하느님 아버지, 병준이 좀 제발 살려 달라’고 기도를 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무신론자인데, 지금도 그때 자기가 안 죽은 이유는 순전히 고모할머니의 기도 때문이라고 한다. 아버지는 기적적으로 일어났다. 의사들의 말에 따르면 병이 나은 게 아니라 몸이 그 병을 우회하는 방법을 어쩌다 알아낸 것이라고 했다. 병이 낫지 않았기 때문에 앞으로 언제라도 재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 시한폭탄을 안고 지금 사십 여년을 살고 있다.


 아버지는 아직도 병상에서 쳐다보던 십자가의 모양이 생각난다고 했다. 고모할머니가 벽에 걸어둔 십자가 말이다. 그 후로 아버지는 교회도 가지 않고 성경도 읽지 않지만, 내가 물을 때마다 자기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했다. 내가 하느님을 믿으면 교회를 가야하는 것 아니냐고 물으면, 아버지는 자기는 ‘사이비 기독교인’이라고 하며 빙긋 웃었다. 그 미소의 의미를 이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버지는 ‘기독교’라는 종교를 믿지는 않지만, 죽음 앞에 한 없이 약해진 경험 끝에 깨달은 것 아닐까. 인간은 너무나도 연약한 존재라서, 무언가 믿을 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그 후 아버지는 방황했다. 그 방황의 시기를 나와 어머니는 다르게 기억한다. 어머니는 그때 너네 아빠는 가족들도 다 팽개치고 놀려 다녔다고 하지만, 내 기억 속에서 아버지는 언제나 가족들이 1순위였다. 어떤 일이 있어도 가족들의 일이 있으면 다 팽개치고 달려왔다. 하지만 아버지는 가족을 제외한 삶에서는 오랜 시간 방황했다. 몇 년은 유흥에 빠지고 몇 년은 운동에 빠지고 몇 년은 이런저런 취미를 전전했다. 누군가의 눈에는, 나이 들어서 건강하고 멋지게 산다고 부러워할 삶이겠지만, 내 눈에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가 공허해보였다.


 며칠 전 스승이 스티브 잡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스티브 잡스는 인문학을 공부했기에 삶의 진실의 반쪽 정도는 알고 있어서, 췌장암 판단을 받고 나서는 담담하게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 것이라고 했다. 갑자기 그 이야기가 아버지의 삶에 포개진다. 아버지도 경제적인 성공을 거두고 죽을병에서 살아난 뒤, 삶의 진실의 반쪽 정도는 본 것 아닐까? 그래서 일보다 가족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더 소중히 했던 것 아닐까? 자본주의 믿음을 끝까지 쫒아본 뒤 가족주의에 도달했지만 그 다음 믿음은 찾을 수 없었던 것 아닐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아버지는 티비에서 도올 선생의 강의를 필기까지 해가면서 들었던 기억이 난다. 최근에는 얼핏 동양철학과 장자 강의를 들으러 간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아버지가 이제 와서 더 사업을 잘하려고 그런 공부를 하는 것은 아닐 테다. 혹시 아버지는 지금도 무언가 믿을 것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아버지의 삶을 모른다. 아버지가 삶에서 겪었던 수많은 생채기들을 나는 겪어보지 않았다. 가난의 상처, 장남의 무게, 어머니 없는 삶, 무심한 아버지, 그 당시 대부분의 남성들의 몸에 새겨져 있을 폭력의 기억, 군대, 불치병, 사업을 하면서 만났을 수많은 인간 군상, 사기와 배신의 경험, 가장의 무게. 그 누구의 보살핌도 없이 혼자서 모든 걸 짊어지고 산 남자의 삶을 나는 헤아릴 수가 없다. 나는 그 남자의 보살핌으로 편한 삶을 살았다. 내 삶에는 상처가 별로 없다. 아버지는 온몸으로 부딪쳐 ‘세상은 전쟁터’라는 믿음을 형성한 것이겠지만, 나는 그 믿음을 아버지로부터 주입받았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보다 훨씬 쉽게 그 믿음을 깰 수 있었다. 과연 내가 아버지만큼 삶에서 상처를 많이 받았다면, 이 나이에 인문주의를 운운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나는 아버지가 만들어준 기반과 틈 덕에 인문주의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 사실이 아버지에게 감사하다. 아버지가 자본주의, 가족주의를 열심히 믿어준 덕에, 나는 그 두 곳에 충만한 행복이 없다는 사실을 일찍 알았으니 말이다.


 나는 자본주의도 가족주의도 믿지 않는다. 나는 인문주의를 믿는다. 나는 세상이 전쟁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인간은 상처받아 가시돋혀 있지만, 자기가 아플 것을 감수하고 계속 안아준다면 언젠가는 가시를 거두고 아기처럼 웃는 존재라는 것을 알아버렸다. 내가 정서적으로 강해진다면 상대를 굳이 경계하고 의심할 필요가 없으며, 나를 찌르는  알면서도  사람을 안아줄 여유가 생긴다는 것도 알았다.  것을 남에게  때는 아낌없이 주어야 한다는 , 그래야 겨우 거래가 아닌 사랑의 관계가 싹틀  있다는  알았다. 충만한 기쁨은 권력이 아닌, 오직 사랑을 통해서만 도달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권력의 본질은 ‘대체가능이고 사랑의 본질은 ‘대체불가능이기에, 권력욕을 넘어서지 못하면 사랑으로 충만한 삶에 다다를  없다는 것도 알았다. , 가족을 사랑할  있지만, 가족만 사랑하는 것은 불행한 삶이란  알았다. 아니, 가족이라서 오히려 그를, 그녀를 사랑해줄  없다는  알았다. 나는 나의 아버지가 ‘아버지이기 때문에, 나의 어머니가 ‘어머니이기 때문에 사랑하고 싶지 않다. 내가 ‘이기 때문에 받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가족주의가 아무도 사랑할  없기에 가족만 사랑하려는 마음이라는  안다. 하지만 아무도 사랑할  없는 사람은 결코 애증과 집착으로 점철된 가족들을 사랑해줄  없다는 것도 안다. 나는 가족주의를 믿지 않는다. 내가 가족주의를 믿지 않는 만큼  틈에는 인문주의가 들어설 것이다. 나는 이제 인문주의로 다시 가족들을 만나고 싶다.




 며칠 전 내가 있는 인문공동체에서 컴퓨터 한 대 샀다. 평생 항상 바쁘게만 살아온 친구가 33년 만에 취미를 찾았다며 스타크래프트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친구가 취미를 찾은 것이 기뻐서 마음껏 스타크래프트를 하라고 공동체 공간에 게임용 피씨를 장만했다. 컴퓨터가 온 날, 스승이랑 그 친구랑 나랑 셋이서 몇 시간 동안 스타를 했다. 나는 스타를 잘 몰라서 옆에서 구경만 하는데도 너무 재밌었다. 스승이랑 친구도 초보라서 컴퓨터랑 대결을 하는데도 마치 스타 경기 중계를 보는 것처럼 손에 땀을 쥐었다. 서로 못한다고 갈구고, 컴퓨터가 잘할 때마다 환호성을 지르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렇게 이틀 동안 나는 글도 안 쓰고, 친구는 일을 새벽에 몰아서 하고, 스승은 운동도 안 가면서 스타에 몰두했다. 너무 많이 소리를 질러대서 나중에는 목이 쉴 정도였다. 그렇게 이틀을 실컷 놀고 집에 가는 길 친구가 나에게 말했다. “아까 쌤이랑 언니랑 스타하는 거 보는데, 언니가 어렸을 때 아빠랑 페르시아 왕자 했다던 게 생각나더라.” 그 말을 듣는데 기분이 정말 묘했다. 나에게는 이제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는데 그 가족이 너무 묘해서였다.



 이 가족은 가족주의도, 자본주의도 아닌, 인문주의에서 시작되었다. 나와 스승과 친구는 가족처럼 피를 나눈 사이도, 법적으로 묶인 사이도 아니다. 그렇다고 회사나 여타 동호회처럼 이해관계나 네트워킹을 위해 만난 사이도 아니다. 우리는 삶이 힘들어서 만났다. 삶이 너무 힘들어서 어떻게든 더 기쁜 삶을 살아보려고 만났다. 나와 스승은 글쓰기 수업에서 만났다. 삼개월 수업이 끝나면 끝나는 게 정상인 관계다. 그런데 어느덧 삼년 째 매일 보는 사이가 되었다. 스승은 나를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고 내가 정서적으로 가장 의지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와 함께 이 공동체를 꾸려나가는, 내가 사랑하는 동생도 글쓰기 수업에서 만났다. 나와 그녀는 아무런 삶의 접점이 없다. 나는 서울 도심에서 자랐고 그녀는 울산 바닷가에서 자랐다. 우리는 서로 자라온 환경도 성격도 말투도 취향도 모든 게 다 다르다. 그런데 나는 그녀가 참 좋다. 친동생처럼 아껴주고 싶고 도와주고 싶고 사랑을 듬뿍 주고 싶다. 힘들 때 곁에 있고 싶고, 기쁠 때 더욱 기뻐해주고 싶다. 그 동생뿐만이 아니다. 나는 이 공동체에서 오래도록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족보다 진한 애정을 느낄 때가 많다. 나는 가끔씩 이렇게 완벽한 타인들과 가족보다 더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는 게 신기하다.


 나는 요즘 ‘가능성’이라는 단어에 꽂혀 있다. 우리는 왜 더 충만한 관계를 맺고 있을까?  ‘가능성’이 없는 관계라서 그렇다. 가족, 법, 이해관계. 그 어떤 것도 이 관계를 붙들고 있지 않다. 그렇기에 누군가가 이 공간에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순간 관계는 끝나버린다. 하지만 아무것도 붙들고 있는 게 없기에 모두가 알고 있다. 이 관계를 유지하는 유일한 힘은 서로를 향한 애정이라는 것을. 그래서 매일 또 만나고 또 만날 때마다 서로의 애정을 확인한다. 내가 진심으로 사랑받고 있다는 걸 매일 확인받는 사람이 충만하지 않을 리 없다. 그리고 이 관계는 회사나 종교단체처럼 함께 이루고자 하는 목표 또한 없다. 그냥 서로 만나 어떤 날은 삶의 이야기들을 하고,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스타크래프트를 하며 논다. 그냥 자연스럽게 모여 하고 싶은 것들을 하는데, 그 사이에서 예기치 못한 기쁨들이 터져 나온다. 어느 날은 수다를 떨다가 삶의 고민을 해결하기도 하고, 어느 날은 함께 밥을 먹다가 삶의 방향이 전환되기도 한다. 뿌리들이 서로 얽혀 끊임없이 새싹을 틔워내는 것 같다. 그것은 가능성이 없기에 가능한 일이다. 잠재성은 가능성이 없는 땅에서만 숨을 쉴 수 있기 때문이다.


 스타크래프트를 실컷 하고 돌아온 길, 마음에 잔잔한 기쁨이 몰려들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기쁨도,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기쁨도 아니고, 호수처럼 잔잔한 파동의 기쁨이었다. 그 기쁨은 마치 자라나는 뿌리 같았다. 채워지는 기쁨이 아니라 생성하는 기쁨 같았다. 이렇게 삶이 충만할 수 있다면 앞으로 조금도 공허해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악착같이 사랑과 기쁨을 쫒을 것이다. 기쁨은 너무나도 기쁘기에. 사랑은 너무나도 기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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