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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Sep 10. 2021

무게

나와 <소년 아메드>

 영화 '소년 아메드'에서 인상깊었던 장면이 있다. 어려서부터 집에 아버지가 부재했던 아메드는 동네 이슬람교 교단 지도자 '이맘'을 정서적인 아버지로 여기고 의지한다. 아메드는 이맘의 말을 무조건 믿고 따른다. 어느 날 이맘이 아메드의 학교 선생님 '이네스'를 단지 유대인 남자친구를 사귄다는 이유로 배교자로 지목하자, 그녀를 처단할 마음을 먹을 정도로. 결국 13살 소년 아메드는 작은 과도로 이네스를 찌르려다 저지 당한다. 놀란 아메드는 그 자리에서 도망쳐 이맘을 찾아가 이 일을 털어놓는다.


"하지만 (이네스가) 배교자라고 하셨잖아요."

"죽이라고는 않했어!"

"하지만 배교자는....."

"지하드가 시작되면 죗값을 치를 거라고 했잖아!"

"..."

"지금 중요한 게 뭔지 알지?"

"..."

"우리 모스크를 지키는 거야."


이맘은 동요하는 아메드에게 자기는 이네스를 죽이라는 말은 한 적 없다며 선을 긋는다. 자기를 모스크에 숨겨놨다가 사건이 잠잠해지면 먼곳으로 보내달라는 부탁도 차갑게 거절한다. 이맘은 아메드를 남겨두고 도망갈 채비를 한다. 경찰이 물으면 자기는 기도를 주관했을 뿐, 그가 이네스를 죽이려고 한 건 순전히 인터넷에서 본 선동글 때문이라 대답하라고 당부하며. 아메드의 정서적 아버지는 아들을 버리고 도망친다. 남겨진 아메드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안고 소년원에 들어 간다.




"아니, 내 말을 왜 그렇게 있는 그대로 들어. 나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었는데."

"언니 말이 나한테는 법이었으니까 그랬지."


아끼는 동생이 있다. 그 동생은 나를 믿고 의지한다. 나는 그런 동생에게 너무 많은 말을 뱉어왔다. 동생은 내가 뱉은 말들을 스펀지 흡수하듯 흡수하고 따랐다. 그래서 당황스러운 적이 꽤 많았다. 아니, 나는 별 생각 없이 한 말인데, 그걸 저렇게 깊게 생각했다고? 아니, 나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닌데 쟤는 저걸 그렇게 이해했다고? 순간순간 어긋남을 느낄 때마다 나는 당황했지만 그 당황스러움을 제대로 들여다 보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나는 내 말로 인해 그 동생이 느껴왔을 혼란보다 내가 떠드는 기쁨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동생의 혼란을 전부 직면하는 순간, 내가 더 이상 쉽게 떠들지 못할 것을, 앞으로 내가 하는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이맘은 아메드에게 이네스를 죽이라고 명령한 적이 없다. 그는 이네스를 배교자라 말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언젠가 아메드에게 이슬람교에서 배교자는 신의 이름으로 처단해야 한다고 가르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아메드의 머릿 속에서 '이네스->배교자->처단 대상'의 연결고리가 완성됐던 것일 테지. 물론 이맘도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이맘은 이네스를 죽이라고 말한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자기를 아버지처럼 여기는 소년이 자기 말들을 그렇게 해석할 여지가 있다는 걸 몰랐던 것은 그의 책임이다. 아마도 그는 처음부터 배교자와 지하드에 대해 별 생각없이 떠들었을 테다. 애초에 그는 종교지도자로서의 권위를 누리고 싶었을 뿐, 그를 믿는 신도들의 삶에는 관심이 없었을 테니까. 그러니 아메드가 그런 일을 저지를지 몰랐던 것이다. 그러니 동요하는 아메드에게 "내가 언제 죽이라고 했냐!"고 윽박지른 것이다. 그는 누군가의 아버지, 형, 스승, 종교지도자가 될 자격이 없다. 그는 자기가 제일 중요한 사람이니까.




"어떻게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나요?"


내가 철학을 한지 몇개월밖에 되지 않았을 때 스승에게 패기넘치게 던진 질문이다. 나는 스승의 영향력이 부러웠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 한마디 한 마디에 귀를 기울이고, 자기의 관성을 거슬러서까지 그의 말을 삶에서 실천해보려고 애쓰는 것이 정말 신기했기 때문이다. 나는 부모나 연인 혹은 종교인이 아닌 누군가가 그렇게까지 한 사람의 삶에 깊은 영향을 끼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영향력이 너무나 대단해보였다. 권력지향적인 나는 그 영향력을 갖고 싶었기에 그런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면 별로 영향력을 갖고 싶지 않을 거예요."


내 질문에 스승이 답했다. 그때는 '그런가?'라고 넘겨버렸던 그 말이 삼 년이 지난 지금 다시 떠오른다. 그간 나는 (적어도 내가 있는 공동체 안에서는) 작은 영향력을 갖게 되었나 보다. 그럴 만도 하다. 나는 철학을 많이 배웠고, 철학적으로 사려고 애를 썼고, 그만큼 덜 혼란스러운 사람이 되었으니까. 아는 게 많아 말도 그럴 듯 하게 할 수 있고, 수업을 몇 번 진행했기에 '선생'이라는 이미지도 갖고 있으며, 무엇보다 나와 오랜 시간을 함께 하며 나에게 인간적인 신뢰를 느끼는 이들이 많아졌으니까. 하지만 나는 내 영향력이 늘어난 만큼 그 영향력의 무게는 제대로 보지 않았다. 사실 요즘 그런 일들이 쌓여가고 있었다. 내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 동생이 오해를 하면 미안해하진 못할망정 답답함을 토로 했고, 누군가에게 애정보다 답답함 때문에 "너 이런 것 아니냐'고 성급하게 말해 그를 구렁텅이에 빠뜨려놓고는 외면했으며, 나를 가장 정서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이에게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찾으라고 준비도 안된 사람의 등을 떠민 적도 있다. 이 모든 일이 작은 무게, 작은 책임도 지지 않으려는 내 관성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사실 최근에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는 꿈을 꿨다.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는 이미지는 내가 어떤 상황에서 도망가고 싶을 때마다 떠오르는 이미지다. 이제 그 꿈을 왜 꿨는지 알겠다. 최근에 나는 내 삶에 무게가 생겨남을 직감하고 도망가고 싶었던 것이다.





동생에게 사과했다. "내가 '이맘'이다. 나는 나를 믿는 너에게 왜 나를 믿냐고 탓을 한 꼴이다." 그와 동시에 내가 소년 아메드처럼 내 스승을 믿어온 시간들이 생각났다. 그때 내 스승은 얼마나 조심스럽게 나를 대해줬었나. 스승도 그런 적이 있다고 했다. 자기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닌데, 내가 그 말을 내 언어습관에 따라 다르게 해석해서 오해했던 순간이. 그때 스승은 나에게 사과를 하거나, 내가 더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도록 내 언어규칙을 더 이해하고 그 안에 들어가려고 노력했다. 심지어 스승은 자본주의의 언어가 익숙한 나를 위해 인문주의를 자본주의의 언어로 말해준 적도 많다. "인간 관계에서 회계장부를 쓰되 차이나는 회계장부를 써라. 언젠가 손해가 득이라는 걸 깨닫게 될 거다." "인생에서 어떤 삶이 진짜 가성비가 좋은지 생각해봐라." "소설을 쓰는 AI는 더 이상 AI가 아니다." 더욱이 그는 한번도 나를 '답답하다'고 다그친 적이 없다. 나도 과거의 나를 생각하면 답답한데 스승은 오죽 했겠는가. 하지만 그는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 말을 해야할 순간이 올 때까지.


말을 잘못할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해야 한다. 내 말이 가지는 무게를. 작은 힘이 생긴 만큼 작은 무게를 져야 한다. 사실은 나도 다 알고 있지 않나. 내가 지금 이 말을 하는 이유가 정말 상대가 덜 다치고 더 기뻐지길 바라는 마음 때문인지, 아니면 단지 내가 답답하거나 잘난 척 하고 싶거나 지금의 나를 정당화하고 싶은 마음 때문인지는. 후자라면 닥치고, 전자라면 고민해야 한다. 내가 제대로 된 말을 하고 있는지 공부하고, 내 말이 상대방에게 어떤 촉발을 낳을지 연구해야 한다. 그래서 말은 애정을 가진 이에게만 해야 하나보다. 그래야 그 말이 오해를 낳아도 그 책임을 내가 다시 질 수 있을 테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맘처럼 자기를 믿은 소년에게 오해의 책임을 돌리는 최악의 스승, 최악의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사랑이 있다면 지금 잘 몰라도 제대로 된 앎을 찾아가게 된다. 내가 사랑하는 이에게 제대로 된 앎을 알려주어야 하니까. 사랑이 있다면 오해도 줄여갈 수 있다. 내가 사랑하는 이가 혼란스럽지 않도록 오해를 줄여나갈 방식을 계속 고민할 테니까. 그렇기에 믿음의 대상은 오직 사랑하는 자만이 되어야 하나 보다.


말의 무게, 믿음의 무게는 사랑의 무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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