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혜원 Jul 04. 2021

'없는 것'에서 '있는 것'으로

영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1974)> 를 보고

"너는 있는 것을 보지 않고 없는 것만 본다."


최근에 스승으로부터 들은 말이다. 그 말을 듣고 '탐욕'의 정서가 생각났다. '탐욕'은 있는 것을 보지 않고 없는 것만 보기에 생겨나는 욕망이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없는 것'의 불안을 조장한다. 하나라도 결여되면 영원히 행복에 가닿지 못할 것처럼 사람들을 불안의 블랙홀로 몰아 넣는다. 탐욕은 '없는 것'을 채우려는 마음이다. 하지만 없는 것은 채워질 수 없다. 애초에 이 세상에 '없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루크레티우스는 태초의 세계는 텅비어 있던 것이 아니라 무수한 원자로 가득차 있다고 사유한다. 무수한 원자들이 서로 끊임없이 부딪쳐 결합과 해체를 통해 지금의 세계가 만들어졌다는 견해다. 루크레티우스의 세계관에 '없는 것'은 없다. 세상은 있음으로 가득차 있다. 없음은 오직 관념 속에서만 존재하는 개념이다. 없는 것은 없기에, 없는 것은 채울 수 없다. 그렇기에 탐욕은 신기루다.





'없는 것'으로 시작된 관계. 영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의 두 주인공 '에미'와 '알리'는 서로의 결핍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만난다. 늙은 독일인 여성 '에미'는 젊고 아름다운 몸을 가진 '알리'에게 매력을 느낀다. 독일에서 아랍인으로 살고 있는 '알리'는 자신의 외로움을 알아주는 '에미'에게 마음이 간다. 둘은 외롭고 결핍된 존재이기에 서로에게 끌린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결핍으로 시작된 관계는 밀도 높은 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 내 결핍에 비추어 상대를 보았기에 상대를 전 인격적으로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결핍으로 인한 관계는 대체가능하다. 내가 나의 결핍이 없다면 그를 만나지 않았을 테고, 그 또한 그의 결핍이 없었다면 나를 만나지 않았을 테니까. 에미와 알리 역시 마찬가지였을 테다. 에미가 젊은 여성이었다 해도 아랍인 알리에게 끌렸을까? 알리가 독일인이었다 해도 중년 여성인 에미에게 끌렸을까? 에미는 알리가 아닌 다른 젊은 청년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여도 사랑을 시작했을 테고, 알리 또한 에미가 아닌 다른 여성이 자신의 외로움을 보듬어주었다면 사랑을 시작했을 테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둘은 지독히도 외로웠으니까.


결핍으로 시작한 사랑. 하지만 나는 그 둘의 사랑이 예뻐보였다. '외로운 것 둘이서 만나 자위하는 것 아니야?'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둘은 결핍된 만큼 미숙한 사랑을 하지만, 미숙한 사랑도 미숙한 대로 어여뻐보였다. 나는 특히 에미에게 감정이입이 됐다. 에미가 알리를 처음 만난 날 집에 자고가라 했던 것도, 차마 함께 자자는 말은 하지 못했지만 자기 방에 알리가 불쑥 들어온 것을 보고 당황하면서도 기뻐했던 것도, 어느날 뜬금없이 알리에게 결혼을 하자고 했던 것도, 결혼하고 얼마간 달콤한 행복에 빠졌지만, 그 뒤에 스무살이나 차이나는 아랍 청년과 결혼한 것에 대한 주위 사람들의 비난과 소외를 견디지 못해 사랑하는 알리 앞에서 너무 힘들다며 울음을 터뜨렸던 것도, 그 뒤 사람들이 에미가 필요한 순간마다 친절하게 태도를 바꾸자, 다시 무리에 속하기 위해 '이게 다 우리 둘을 위한 길'이고 생각하며 알리에게 이웃의 짐을 들어주라고 하고, 자기 친구들에게 그의 몸을 자랑한 것도. 알리에게도 감정이입이 되는 부분이 많았다. 알리는 유일하게 마음을 연 에미가 '독일인은 쿠스쿠스를 먹지 않는다'고 차갑게 말했을 때 얼마나 상처를 받았을까. 알리는 에미에게 상처 받고 에미를 떠나 외로움을 채우려고 술집 여사장과 하룻밤을 보내고 도박에 빠진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알리의 영혼을 채워주지 못한다. 알리는 결국 공허함을 견디다 못해 거울을 보여 자기 빰을 후려치며 후회한다. 에미 또한 마찬가지다. 에미는 알리의 떠남을 견디지 못해 알리가 일하는 자동차 정비소에 찾아가 미안하다고 사과를 한다. 그 장면을 보며 스승은 자기가 에미였다면 다시 알리를 찾아가지 않을 거라고 했다. 사랑이 떠난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자기가 주변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준 것을 뼈져리게 후회하며, 에미의 직장인에 있는 또다른 소수자 '올란다'에게 사랑을 확장할 것이라고 했다. 영화는 에미가 알리를 다시 찾아가지 않는 것으로 끝났어야 할까. 에미는 알리를 되찾는다. 하지만 그 달콤한 재회의 순간 알리는 위궤양으로 쓰러진다. 마지막 장면에서 의사가 에미에게 앞으로 병간호를 하는데 많이 힘들 것이라고 겁을 준다. 하지만 에미는 알리의 수술을 거부하고 괜찮을 것이라고 한다. 의사가 쏟아내는 불안한 말들을 들으며 에미는 담담함을 유지한다. 나는 그 에미의 담담한 표정이 가슴에 남았다. 에미는 알게 된 걸까. 행복은 달콤하지만은 않다는 걸. 하지만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걸. 그 뒤로 에미와 알리는 어떤 사랑을 할까.





나는 홀로서지 못한다. 나는 홀로 서지 못하기에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좋아할 때 끊임없이 마음 속에서 검열을 했다. 나는 나의 철학 스승을 좋아하지만 내가 그의 도움 없이 혼자 설 수 없기 때문에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건 사랑이 아니야. 의존이야." 나는 홀로 서지 못해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있는 내 자신이 싫었다. 그래서 빨리 홀로 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내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해 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은 전부 다 총체적인 기만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스승에게 미안한게 아니었다. 내가 정서적으로 혼자 서지 못할까봐 두려운 것이었다. "넌 언제나 떠날 생각만 한다." 언젠가 스승에게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의아했다. 나는 떠날 생각이 없는데 왜 스승이 그런 말을 하는지. 그런데 맞는 말이다. 나는 떠날 생각만 한다. 어떤 관계에서도 그렇다. 어떤 관계에서도 마음 한 켠으로 내가 홀로 남는 상황을 염두하고 있다. 어떤 관계에서도 나는 현재 이 관계보다 내가 혼자 남겨질 미래를 생각한다. 관계에서도 나는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을 먼저 보는 것이다. 나는 심지어 내 자신에게도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을 먼저 본다. 그래서 나는 죽고 싶다. '없는 것'을 보기에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없는 것'을 보기에 죽고 싶어지는 것이다.


나는 어떻게 강건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걸 참 오래도록 고민했다. 철학을 배우며 오래도록 고민하고 수행했다 생각했는데 아직도 홀로 서지 못하고 종종 불안과 허무주의에 잠식되는 나를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다. 그런데 강건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조차 '없는 것'을 보는 마음이 아니었나 싶다. 나의 자본주의적 욕망의 동력은 '없는 것'에 대한 불안이었다. 나는 나에게 '없는 것'을 채워서 사회적으로 좀더 '완벽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다가 우울증에 빠져 철학을 배우게 되었는데, 나는 철학조차 그런 자본주의적 욕망으로 공부하고 수행해 왔다. 내가 약하니까 강해지고 싶다는 마음. 내가 사랑을 해 본적이 없으니까 사랑이라는 것을 해보고 싶은 마음. 그런 경박스러운 야심과 게걸스러운 탐욕으로 철학을 했다. 하지만 철학을 배워도 어느 지점에서 나는 다시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없는 것'에 대한 탐욕으로는 근원적인 불안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철학을 배우면서도 종종 '모든 게 무의미하다'는 허무주의에 빠졌다. 이제야 내가 왜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알겠다. 나는 삶과 사랑, 철학에서조차 '없는 것'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미는 어떻게 알리와의 사랑을 지켜낼  있을까. 사랑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은 힘든 일이다.  세상이 나와 사랑하는 이를 상처입히고,  세상이 우리의 사랑을 지탄할 테니.  힘든 사랑의 투쟁을 견뎌낼 동력은 기쁨밖에 없다. 에미는 불안보다 기쁨에 집중해야했다. 소외의 두려움은 '없는 '이고, 알리와 함께 보내는 시간은 '있는 '이다. 알리와의 잠자리. 같이 먹는 커피 한잔. 저녁 식사. 바에서 추는 . 에미는 지금 그녀 앞에 있는 사랑의 기쁨을   온전히 누려야 했다. 불안이  기쁨을 잠식하도록 허락해서는 안되었다. 없는 것이 있는 것을 집어 삼킬  삶은 죽음으로 치닫는다. 미숙한 에미는 알리가 떠난 후에야 알리가 얼마나 자신에게 기쁨이었는지를 깨닫는다. 아마  뒤늦은 후회가 에미에게 사랑의 기쁨을 지킬 힘을 주었던  아닐까. 에미가 의사에게 보였던 담담한 표정은 아마 그런 뜻이 아니었을까. 나는 미숙한 에미에게  모습이 겹쳐 보였다. 있을 때는 '없는 ' 보고 있다가,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있는 ' 보는 .  또한 너무도 무기력하게  앞에 있는 기쁨을 놓아버리지 않았나.


요즘 부쩍 '진지'라는 단어가 자주 생각난다. 진지는 꼭 쥔다는 뜻이다. 진지한 삶은 무엇일까. '죽음의 철학'이 아닌 '삶의 철학'이란 무엇일까? 나는 삶을 꼭 쥐어본 적이 있을까? 나는 삶이 주는 기쁨을 온전히 누리고, 그 기쁨을 침해하는 것에 대항하여 싸운 적이 있을까? 기쁨과 혁명. 철학자 들뢰즈가 삶의 유일한 의미는 '혁명적-되기'라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삶의 기쁨을 누리고 삶의 기쁨을 침해하는 것들에 대항할 것. 역동적인 삶이란 그런 모습일 테다. 나는 지금 내 앞에 주어진 삶의 기쁨을 누리지 않고 '없는 것'만 쳐다보며 다 죽어가는 할머니처럼 죽음을 기다리는 삶을 살고 있지 않나 생각이 든다.


실체는 감각되는 것 뿐이다. 최근에 이상하게도 촉감의 기억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깊은 밤 손을 잡았던 기억. 사랑하는 이의 품에 안겨 자던 밤. 피부결와 냄새. 아버지의 사무실에서 그림책 삽화들을 만지던 기억. 포스터 물감이 말라 오돌도돌하게 만져지던 감촉. 종이 위에 파스텔을 그리던 느낌. 찰흙의 느낌. 출판사 할 때 원고를 넘기던 감촉. 인쇄소의 잉크 냄새. 어린시절 아버지가 나의 엉덩이를 만지던 기억. 머리칼을 만지고 머리칼이 만져지는 기억. 냄새. 웃음소리. 표정. 감촉. '있는 것'. 홀로 설 준비를 하는 사람은 홀로 설 수 없다. '떠남'의 불안이 아니라 '머무름'의 기쁨을 악착같이 누려낸 사람만이 사후적으로 홀로 설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는 절벽이 너무 두려워 절벽에서 떨어진 준비만 하고 산 사람이 아닐까. 그래서 사랑도 삶도 늘 끝낼 준비만을 하고 살았던 것 아닐까. 행복은 달콤하지만은 않다. 하지만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없는 것'에서 '있는 것'으로.



작가의 이전글 심판, 처벌, 죽음, 생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