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바이를 탄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함께 철학하는 친구들과 나눠 먹으려고 코스트코에서 한 아름 장을 봐서 오토바이 바구니에 하나씩 쌓아 넣고 그물망으로 짐을 고정하려는 순간 그만 손을 놓쳐버렸다. 팽팽하게 늘어나 있던 그물망이 날라 와서 갈고리 부분이 왼손 약지 위를 강타했다. 눈에 눈물이 핑하고 돌았다. 곧 손가락이 퉁퉁 부어올랐다. 다시 그물망을 단단히 채우고 짐을 싣고 왔다. 그런데 다음날, 다다음날이 되어도 손가락 위의 욱신거림이 사라지지 않았다. 손가락 위를 만져보자 결절이 생긴 것처럼 무언가가 뽈록 튀어나와 있었다. 이 주가 다 되도록 욱신거림과 결절이 사라지지 않아서 평소 복싱을 즐겨하는 스승에게 이거 왜 이런거냐고 물었다. 스승이 근육이 찢어져서 그런 거라며, 통증은 좀만 더 있으면 없어지지만 결절은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없어진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병원에 치료를 받으러 가고 싶지 않았다. 아니, 처음 손을 다쳤던 순간부터 나는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그 상처가 어디 혼자 넘어져서 다친 게 아니라, 친구들과 먹을 음식을 싣고 오다 다친 것이라서 그랬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지독히도 이기적인 내 자신을 증오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아주 작은 증거라도 찾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상처를 기쁨으로 느꼈다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나르시시즘이다. 마치 아이에게 헌신하는 내 모습을 보며, 나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 스스로를 대견해하는 부모들처럼. 하지만 그 사건이 분명 내 삶에서 작은 차이를 만들어냈던 것은 맞다. 나는 언제나 내 상처가 너무 아픈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 사건이 있고 며칠이 지났을 때다. 목욕을 하고 나와 거울에 비친 내 벗은 몸을 보는데 갑자기 비루함이 밀려왔다. 하얗고 상처 하나 없는 몸. 곱게 자란 만큼 몸도 참 곱게 생겼다는 생각을 했다. 내 삶이 편했던 만큼 몸도 참 편해보이는 구나. 나는 갑자기 상처 하나 없는 내 몸이 싫어졌다. 내 몸뚱아리조차 이렇게 애지중지하는데, 도대체 내 삶은 얼마나 더 애지중지할까 싶었다. 내 몸, 내 마음, 내 삶에 작은 상처 하나, 작은 오점 하나라도 남을까봐 나는 늘 어떤 것에도 나를 던지지 않았던 것 아닐까. 나는 언제나 내가 덜 상처받거나 예측 가능한 상처를 받는 선택만 해오지 않았나. 그렇기에 ‘내가 어떻게 되어도 좋아!’라는 마음으로 내 욕망을 밀어 부쳐보지도 그 누구를 사랑해본 적도 없는 것 아닌가. 당시에는 이 정도의 생각에 미치지 못했지만,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내 인생의 가장 큰 문제는 스스로를 너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이란 걸. 나는 그 빌어먹을 나르시시즘에, 그 빌어먹을 소심함에 작은 금이라도 내 보고 싶었다. 거울을 보며 생각을 했다. 몸에 상처를 내보자. 그리고 그 길로 타투샵에 예약을 했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그렇게 비장한 마음으로 선택한 상처가 고작 타투라니. 상처마저 돈을 내고 안전한 샵에서 안전한 사람들에게 안전한 방식으로 받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내가 타투를 하고 싶었던 욕망에는 학창시절의 금기라든지, 동경이라든지 다른 원인도 있었을 테지만, 나를 제일 마지막에 움직이게 한 건 ‘상처’에 대한 욕망이 맞았다. 나는 또 안전한 모험을 했다. 예측 가능한 상처. 언제든지 멈출 수 있는 상처. 타자가 제거된 상처. 물론 언제나 그렇듯 헛발질 또한 여러 가지 마주침을 낳는다. 그래서 진짜 욕망이든 가짜 욕망이든 하고 싶으면 무조건 해보는 것이 좋다. 타투가 나에게 남긴 감성은 타투는 가짜 고통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타투를 하며 사람들이 왜 한 번 타투를 하면 타투에 중독된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또 태어나서 처음으로 몸을 자해하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했다. 나는 사람들이 자해를 하며 살아있음을 느낀다고 말할 때마다 그게 어떤 감성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타투칼이 내 살을 찢고 들어올 때, 살과 뼈에서 뭉근하고 뻐근한 고통이 지속적으로 느껴질 때 동시에 묘한 쾌감도 느꼈다. 다음 칼날이 내 살을 찢는 게 두려우면서도 이 고통이 계속 되었으면 하는 마음. 그 두려움과 고통 사이에서 온 감각이 깨어나는 느낌. 그것은 전형적인 쾌락의 느낌이었다. 쾌락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한다. 무감각이 죽어 있음이라면, 쾌락은 감각이 강렬하게 깨어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쾌락은 지속되지 않는다. 쾌락은 찰나이며 쾌락은 가짜이기 때문이다. 타투를 받고 돌아오는 길, 예상했지만 역시나 공허한 마음이 들었다. 그 공허한 마음은 기만적인 고통에 대한 벌이자 안전한 모험을 치르는 대가다. 돈 주고 산 고통은, 내가 나를 칼로 긋는 고통은 예측 가능하고 안전한 고통이기에 고통이 아니다. 언제나 그렇듯 가짜의 끝은 허무다. 가짜 고통도 가짜 사랑도 마찬가지다.
언젠가 스승이 말했다. “삶은 공허 아니면 고통이다.” 처음에 그 말을 듣고 너무 두려웠다. 나는 공허의 좆같은 기분을 경험해봤기에 더 이상 공허한 삶을 살고 싶지는 않는데, 그렇다고 고통스러운 삶 또한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공허하지 않으면서 편한 삶을 살고 싶었다. 아니 조금 더 정직히 이야기하자면 조금 불편하고 조금 덜 공허한 삶을 살고 싶었다. 공허와 고통의 외줄에서 나는 너무 안전한 곳에서 균형을 잡고 싶었던 것 같다. 이 어찌 어리석은 생각인가. 이제 알겠다. 삶은 공허 아니면 고통이다. 가짜는 공허하고 진짜는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가짜 고통, 가짜 앎, 가짜 욕망, 가짜 관계, 가짜 사랑은 공허하다. 모든 가짜가 주는 최고의 기쁨은 쾌락이다. 쾌락은 정점을 찍는 순간 무섭게 지하로 내리꽂는 기쁨이다. 사막의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사라져 더욱 더 사람을 갈증 나게 하는 기쁨. 반면 진짜 앎, 진짜 욕망, 진짜 관계, 진짜 사랑은 고통스럽다. 모든 진짜는 고통스럽다. 진실은 나를 해체시킨다. 소중한 내가 상처받을 까봐 온갖 페르소나와 자기합리화, 나르시시즘으로 무장해놓은 나의 가짜 포장지를 한꺼번에 벗겨버린다. 진짜 앞에 나는 너무 작아진다. 진짜 앎 앞에, 진짜 사랑 앞에 나는 너무 작아진다. 내가 너무 초라하고 비루해서 견딜 수 없을 만큼 나를 작아지게 만든다. 그런데 사실은 작아지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내 원래 크기가 그 만큼이었던 것이다. ‘내가 너무 소중하다’는 자의식 과잉으로 풍선처럼 부풀려진 허상의 자아가 원래 제 본디 크기로 돌아가는 것이다. 진짜 앎은 그랬다. 진짜 앎은 진짜 나를 찾아주었다. 비루하고 초라하며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지극히 인간적인 나. 어딘가에 있는 한 사람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나. 진짜 앎은 고통스러운 앎이며 살아 있는 앎이다. 철학을 배우고 3년. 철학은 진짜 앎이기에 나를 파괴했고, 나는 내가 파괴되는 그 고통스러웠던 순간 가장 살아 있었다. 진짜 앎을 마주하는 게 고통스러워서 울고불고 불안에 떨고 이제 그만할까 고민했던 수많은 순간들. 그 순간 나는 살아 있었고 빨갛게 빛나고 있었다. 지나고 나니, 내가 살아있던 순간은 그 고통스러웠던 순간들뿐이다.
나는 진짜로 살고 싶다. 겁쟁이는 사랑하지 못한다고 했다. 소심한 사람은 최선의 선택이 두려워 선택하지 않거나 차선의 선택을 한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진짜는 최선의 선택 하나뿐이다. 여전히 나는 상처받는 것이 두려운 사람일 테다. 내가 작아지는 것이, 내가 흔들리는 것이, 내가 버림받는 것이 두려운 사람일 테다. 하지만 나는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스스로 사랑을 교살하는 어리석음은 버리고 싶다. 상처받을 때 한 걸음 더. 그렇게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게 진짜 살아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