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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Oct 07. 2021

요구와 욕망

<라캉과 정신의학(브루스 핑크)> 수업 후기

"(신경증자는) 타자의 욕망을 요구로 변질시킨다." 「라캉과 정신의학」 브루스 핑크


 수업을 들으면서 과도하게 웃었다.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스승이 신경증자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 그대로 놔두지 않는다고 설명을 덧붙었다. 그러면서 신경증자의 두 양태인 강박증자와 히스테리증자가 방식만 다를 뿐 어떻게 타자의 욕망을 요구로 변질시키는지 예를 들어 주었는데, 둘 다 내가 살면서 타자에게 너무나도 자주 했던 말이라 마음 속으로 뜨끔했다. 강박증자는 타자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했다. "네가 원하는 있으면 말을 하라고!" 히스테리증자는 이렇게 말한다고 했다. "왜? 어디 불편해? 화났어? 혹시 내가 저번에 그래서 이러는 거야? 그럼 나 그렇게 하지 말까?" 나는 상대가 누구인가에 따라 강박증자가 될 때도 있고 히스테리증자가 될 때도 있다. 내가 강박증자일 때(내가 관계에서 남성(?)역할을 맡을 때) 상대가 나에게 서운함이나 불만족을 표현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그때 말을 좀 해주지 그랬어'다. 사랑하는 이가 나에게 불만족을 표현했을 때 제일 먼저 들어야 하는 감정은 미안함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상대의 요구를 제대로 충족시켜주지 못했다는 생각 때문에 미안함보다 불안이 먼저 올라와 버리는 것이다. 내가 히스테리증자(관계에서 여성(?)역할을 맡을 때)도 마찬가지다. 히스테리증자일 때는 내가 상대방을 만족시키지 못할까봐 상대가 나에게 끊임없이 요구해주길 바라고 내가 그 요구를 잘 이행하고 있는지 확인하려 한다. 그래서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불안해하며 끊임없이 상대를 들들 볶게 된다.


 신경증자의 불안은 어디서 오는가. 신경증자는 왜 타자의 욕망을 욕망인 채로 남겨두지 못하는가. 신경증자는 왜 타자에게 욕망을 요구로서 표현하길 바라는가. 신경증자는 타자의 욕망만 가만히 내버려두지 못하는 게 아니다. 자신의 욕망도 가만히 내버려두지 못한다. 자신을 욕망 그대로 놔두지 않고 '뚜렷한 무엇'으로 치환시키려 한다. 신경증자는 타자도, 자신도 욕망 그대로의 존재가 아닌 요구를 이행하는 존재로 축소시키려 한다.


 처음 정신분석학을 공부할 때 상징계와 실재계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았다. 이제 이해한 것 같다. 상징계는 요구의 세계고, 실재계는 욕망의 세계다. 신경증자의 불안의 근원은 무엇인가.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아이는 부모에게 버림받는 것이 두려운 존재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인간은 꽤 오랜 시간 동안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홀로 서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부모를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생존'이다. 아이는 부모에게 버림받으면 살 수 없기에 끊임없이 부모의 욕망을 만족시키려 노력한다. 부모의 만족스러운 미소는 오늘도 내가 버림받지 않을 것이라는 안도감을 준다. 어쩌면 정서적 안정감의 정체란 안도감인지도 모르겠다.


 나를 포함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이인 채로 어른이 된다. 아이인 채로 어른이 된 사람들은 부모와 맺었던 관계를 연인과의 관계에서 되풀이한다. 그래서 신경증자는 타자가 나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명확하게 알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불안하니까. 나는 홀로 설 수 없으니까. 네가 없으면 나는 살 수 없기에 나는 너의 욕망을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 그 불안이 타자의 욕망을 요구로 변질시키는 근본 동력이다. 불안하지 않은 사람은 요구하지 않는다. 그냥 존재한다. 타자도 그냥 존재하도록 지켜봐 준다. 하지만 불안한 사람은 스스로를, 그리고 타자를 들들 볶게 마련이다. 그냥 내버려둘 수 없다. 그가 떠나면 안 되니까. 부모가 나를 떠나면 나는 살 수 없으니까. 그래서 타자에게 묻는 것이다.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 거야? 내가 그걸 할 테니까 나를 버리지 말아줘." 왜 강박증자는 상대가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얘기해주지 않는 것에 화를 낼까. 상대의 욕망을 만족시키지 못해 자신이 버림 받을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그 두려움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지 못하니까, 상대가 말을 똑바로 해주지 않아서 몰랐다며 '남탓'을 해버리는 것이다. 반면 히스테리증자는 상대의 아주 작은 요구를 끊임 없이 파악해서 충족시켜주고자 한다. 어떨 때는 상대가 요구하지 않은 것까지 요구한 것으로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마치 혼자 밥을 먹고 있는 아이의 숟가락을 굳이 뺐어서 밥을 떠먹여주는 엄마처럼. 그건 왜 그런 것일까. 계속 해서 상대의 요구를 충족시켜주지 않으면 자기가 버림받을까봐 불안해지기 때문이다. 히스테리증자는 상대가 요구하지 않는 상태는 견디지 못한다.


 이제 신경증자의 사랑은 왜 사랑이 아닌지 명백하게 알겠다. 신경증자의 사랑은 아이가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과 같다. 그 사랑에는 타자는 없고 나만 있다. 내가 사는 게 제일 중요하다. 그 마음이 있는 한, 절대로 타자를 있는 모습 그대로 볼 수 없다. 욕망은 흐른다. 자연 상태의 욕망은 마치 시냇물처럼 매 순간 마주치는 항에 따라 미세하게 방향을 바꾸며 흐른다. 흐르는 욕망은 나에게 머물 수 없다. 잠시 머물다 또 흘러 간다. 그렇기에 신경증자는 욕망을 욕망 그대로 놔두지 못하는 것이다. 신경증자는 흐르는 것을 참지 못한다. 신경증자는 고이게 한다. 그가 없으면 나는 혼자 살 수 없으니까. 그래서 그를 내 곁에 붙들어 매고자 '요구'를 인질 삼아 웅덩이를 파는 것이다. 신경증자의 사랑은 동력은 불안이고 매개는 요구며 목표는 소유다.


 글을 쓰는데 왜 이렇게 숨이 턱턱 막히는지 모르겠다. 라캉이 말하는 상징계는 거대한 부모-자식의 세계구나. 상징계의 법은 거대한 부모의 '요구'구나. 언어는 요구의 수단이다. 들뢰즈는 「천 개의 고원」에서 모든 말은 명령이라고 말했다. "사랑해"란 말 속에는 "너도 나를 사랑한다 말해줘"라는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 그 말이 이해가 된다. 언어는 요구이기에 여분을 남긴다. 욕망은 언어로 표현될 수 없다. 요구로 '말'해진 욕망은 마치 사진에 담은 풍경과도 같다. 언어로 표현된 요구(상징계)는 결코 욕망(실재계, real)에 가닿을 수 없다. 그런데 왜 라캉은 분석하는가. 분석은 언어다. 언어로는, 분석으로는 절대로 어떤 한 존재를 이해할 수 없다. 스피노자가 말했다. 인간의 본질은 욕망이다. 들뢰즈가 말했다. 욕망은 매 순간 끊임없이 변하는 항의 배치다. 한 존재는 매순간 끊임없이 변화하는 항의 배치이기에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 너는 흐름이며 냄새며 표정이며 분위기이니까. 손이 떨리고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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