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당신의 의지인가요?
감정과 구조가 만났을 때, 선택은 달라졌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의 선택을 한다. 어떤 커피를 마실지, 어떤 상품을 장바구니에 담을지, 저녁 메뉴는 무엇으로 정할지를 고민한다. 이처럼 우리는 일상 속에서 늘 선택의 연속에 놓여 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의문이 든다. 내가 한 이 선택은 정말 나 스스로의 의지였을까?
만약 그 결정이 단지 무심코 본 이미지 한 장 때문이었다면? 혹은 무언가를 ‘기본값(Default)’으로 설정해 뒀다는 이유로 특별한 고민 없이 선택을 마쳤다면? 행동경제학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자주, 우리의 무의식이 환경에 의해 조종된다고 말한다. 그 대표적인 방식이 바로 점화 효과(Priming Effect)와 넛지(Nudge)다.
점화 효과는 단어나 이미지, 공간의 분위기 같은 간접적인 자극이 사람의 감정이나 판단, 행동에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현상이다. 영국의 뉴캐슬대학교 무인 음료 판매대에서 실험을 했다. 무인 음료 판매대 앞에 감시하는 듯한 눈동자 이미지를 붙이기만 해도, 소비자들이 지불한 금액이 3배 이상 늘어났다는 실험 결과였다. 실제로 누가 보고 있지 않더라도 감시받고 있다는 인식이 정직한 행동을 이끌어낸 것이다.
반면 넛지는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하면서도 특정 방향으로 행동을 유도하는 구조적 설계다. 예컨대 기본 옵션을 친환경 배송으로 설정해 두면 많은 사람들이 별다른 생각 없이 그대로 친환경 옵션을 선택한다. 강요하지 않고도 더 나은 행동을 끌어내는 이 방식은 모바일 앱 딜리버리 앱에서 일회용품 주지 마세요 옵션 등 정부 정책과 기업 서비스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겉보기에 비슷해 보이지만 이 두 방식은 분명히 다르다. 점화 효과는 감정과 인식의 층위에서 작용하는 반면, 넛지는 행동의 구조를 설계한다. 그렇기 때문에 적용해야 할 상황도 서로 다르다. 잘못 사용하면 효과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부정적인 반응을 유도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의 감정을 움직여야 할 타이밍에 지나치게 구조적인 넛지를 적용하면 소비자는 압박감을 느끼고 반감을 가질 수 있다. 반대로, 선택이 중요한 순간에 애매한 이미지나 문구로만 점화하려 하면 아무런 행동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 둘을 적절히 조합하면 시너지 효과를 낼 수도 있다. 영국 캠임브리지대학교 Behaviour and Health Research Unit 소속의 Hollands 박사는 2017년 발표된 한 연구에 그 가능성을 잘 보여준다. 영국의 행동과학 연구진은 식사 공간에서 점화 효과와 넛지를 복합적으로 적용한 실험을 진행했다. 한 그룹에는 식당 입구에 ‘건강한 삶’을 연상시키는 문구와 이미지를 배치해 무의식적으로 건강한 식사를 떠올리게 했고, 다른 그룹에는 음식 배치를 바꿔 채소류를 먼저 접하게 하거나 접시 크기를 줄여 섭취량을 조절하게 했다. 마지막 그룹은 두 가지를 동시에 적용했다. 그 결과 점화 효과만 적용한 그룹은 전체 섭취량이 줄었고, 넛지만 적용한 그룹은 채소 섭취 비율이 증가했다. 하지만 두 효과를 동시에 받은 그룹은 음식을 적게 먹으면서도 건강한 음식을 더 많이 선택하는 결과를 보였다. 감정과 구조를 동시에 설계할 때, 단순한 유도가 아니라 지속적인 행동 변화까지 가능하다는 뜻이다.
출처 : A study comparing priming, default options, and perceived variety in a buffet setting found that priming reduced total food consumption, while default options increased vegetable intake.
이 사례는 마케터나 정책가, 서비스 디자이너들에게 중요한 통찰을 준다. 감정은 분위기와 문구, 이미지로 유도할 수 있다. 반면 행동은 순서, 기본값, 버튼 하나로 달라질 수 있다. 이 둘을 혼동하거나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류에 빠진다. 진짜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유도하고자 하는 행동이 왜 필요한지, 그리고 그 행동이 일어날 환경과 사람의 심리 상태는 어떤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다.
소비자 역시 이 원리를 알아야 한다. 우리가 ‘내가 고른 것’이라 믿는 많은 결정들이 사실은 무언가에 의해 유도된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눈동자 하나에 돈을 더 내고, ‘지금 3개 남음’이라는 문구에 충동구매를 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비논리적이어서가 아니라, 사람의 뇌가 그렇게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 작동 원리를 알고 선택하는 것, 즉 소비자의 자기 인식이다.
우리는 언제든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 문제는 그 영향을 의식하지 못할 때 발생한다. 감정과 구조, 두 축의 작동 방식을 이해하고 활용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소비자이든 마케터이든, 더 현명한 선택을 하기 위한 출발점이 아닐까?
지금 당신은 어떤 자극에 반응하고 있는가? 그 자극은 당신의 선택을 돕고 있는가, 아니면 조종하고 있는가?
그 질문이 바로, 똑똑한 행동 설계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