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개

by 소향

책상 위 하얗게 질식 된 돌덩이

사람들은 그것을 지우개라 부른다


한 줄의 흑심을 문지르면

가루가 흩날리고

종이는 다시 눈처럼 하얘진다


사라지는 것은 글자가 아니라

헝클어진 내 생각들이다

흩어진 것은 잘못이 아니라

잘못을 붙들던 시간


하얀 공백은 빈자리가 아니라

새겨지지 않은 운명

아직 오지 않은 생


지우개는 알지 못한다

무엇을 지웠는지

그러나 그 부서짐으로만

남은 것들이 더 선명해진다는 것을


가루는 먼지 같고

먼지는 별빛 같고

별빛은 결국 인간의 재와 같다


삶도 그렇다

우리는 서로의 지우개가 되어

자신을 닳아 없애며

서로의 어둠을 지운다


그리고 마지막에야 알게 된다

남아 있는 것은 글자가 아니라

지워진 자리

흰 여백이야말로

우리의 유일한 존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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