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들레아의 굴욕

야생화 이야기

by 소향

붓들레아의 굴욕


"안녕하세요?"

"예~, 그런데 저 담장에 보라색 꽃이 뭐니껴?"

"아, 저기 담넘어로 보이는 꽃 말하시는 거죠?"

"예, 육모초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할매들이 궁금해 죽니더~"

"붓들레아라고 외래종입니다."

퇴근하는 나를 보자 동네 왕할머니는 궁금하셨던지 담장 위로 뻗은 꽃 이름을 물으신다. 안 봐도 눈에 훤하다. 꽃 이름을 가지고 한동안 줄기찬 토론이 오갔으리라. 그래도 그렇지 붓들레아보고 육모초(익모초)라니....


우리 집 지킴이가 생기다.


우리 집 앞 놀이터에는 정자가 하나 놓여있다. 정자는 동네 할머니들의 사랑방이다. 매일 아침부터 밤 9시까지 할머니들이 모여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다. 나에게는 정자에 모여 정담을 나누는 할머니들이 너무나 고마운 분들이다.


처음 이사를 왔을 때, 사람들과 차들이 많이 다니는 길목에 있는 주택이다 보니 아무래도 보안에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경비업체에 신청을 해야 하나 고민을 했다. 그러던 중 정자에서 담소를 나누시는 할머니들이 보였다. 마당에 자라는 무화과를 한 바구니 따 가지고 정자에 찾아가서 인사도 드리고 잠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사람이 많이 다녀서 보안이 걱정된다고 하자 할머니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하신다. 자신들이 매일 여기 나와서 노는데 그 집 드나드는 사람 우리가 다 봐줄 수 있다고 하신다. 할머니들이 자신 있게 이야기하시니 반신반의하면서 일단은 경비업체는 미루기로 했다. 그 후로는 어쩌다 잠시 집을 비웠을 때 누군가 왔다 가면 대충 시간대부터 그 사람의 인상착의까지 다 알려주신다. 우리 집 치킴이 역할을 톡톡히 해 주신다.


정자에 가장 오래 머무르시는 분이 왕할머니시다. 거의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하듯 정자로 나오시면 식사시간을 제외하시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정자에 머무르시는 듯하다. 동네 터줏대감이라 우리 집을 누가 지었고, 어떻게 지어졌으며 그간의 사정 이야기까지 모르는 게 없으시다. 덕분에 우리 집 지은 역사까지도 알게 되었다.


지난봄에는 마당에 파티등을 달았다. 처음에는 등의 밝기를 잘 몰라 등이 큰 것을 달았더니 할머니들은 마당에 공을 주렁주렁 매달았다시며 한바탕 이야기 꽃을 피우셨다. 멀지 않은 거리라 정자에서 하는 대화가 옆에서 하는 이야기처럼 잘 들려온다. 저녁이 되어 불을 밝혔다. 이번에는 밝은 등을 가지고 대화를 하신다. 우리 집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할머니들의 관심사요 대화거리가 되는가 보다. 할머니들은 우리 집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궁금해서 못 견뎌하신다.


왕할머니의 부재


며칠 왕할머니가 보이지 않는다. 어디 많이 편찮으신 건 아닌지 걱정이 된다. 왕할머니가 안 계시니까 다른 할머니들도 발검음이 뜸해지신다. 역시 정자에 활력을 불어넣는 사람은 왕할머니였던 것이다. 혹여나 싶은 마음에 다른 할머니들한테 물어도 잘 모르시는 듯 대답이 없다. 마음이 허전해진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왕할머니가 정자에 모습을 비추셨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묻는다. 할머니는 허리가 좋지 않아 병원에 다녀오셨다고 한다. 한 달을 입원하셔서 그런지 얼굴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나이가 들면 온 몸에 통증과 같이 살아가야 한다는 할머니, 아파도 그러려니 하고 지낸다고 하시는 할머니의 말씀이 짠하게 느껴진다.


병원을 다녀오시느라 몸도 마음도 힘이 드셨을 할머니를 위해 붓들레아 꽃을 한 움큼 잘라다 드리며 할머니 퇴원 선물이라고 하니 무척 좋아하신다. 나이가 들어도 여자는 꽃 선물이 좋은가 보다. 코로 냄새를 맡으며 "향기가 너무 좋니더." 하시는 왕할머니의 얼굴에 밝은 달이 떴다. 달빛 물든 붓들레아의 보라색 꽃이 더 밝게 빛나는 듯 하다.



우리 아이들이 "할머니, 안녕하세요?" 하는 인사가 그렇게 좋다고 하시는 왕할머니. 늘 인자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반기는 왕할머니의 그 밝은 웃음소리가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머물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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