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밖에는 연주가 시작됐다. 강약을 조절하는 음악이 흐른다. 점점 거세지는 클라이맥스를 길게 뽑아내고 있다. 그런데 곧 끝날 것 같은 클라이맥스는 숨이 멋을 듯 길게 이어지고 있다.
때 이른 귀뚜라미가 화음을 넣고 있다. 가을이 오나보다. 입추가 지나기 무섭게 들리는 소리가 구슬프게 들린다. 교복이 잘 어울리던 이맘때도 그랬나 보다. 귀뚜라미 울음소리에 가슴 한편 허한 마음이 자리 잡을 즈음이었다. 울리지 않던 집 전화벨이 울린다.
"여보세요~."
"**이니?"
"어, 그래. 나야."
"갑자기 네 생각이 나서 전화했어."
동성도 아닌 이성이 사귀지도 않는데 갑자기 생각나서 전화를 했단다. 그러더니 대뜸 고백을 해온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 얼굴이 빨개져 온다.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나는 그 친구를 별로 맘에 두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심장은 두근거렸다.
한참을 통화했나 보다. 당돌한 그녀의 말에 댓구를 하느라 이마에 땀이 흥건하다. 머릿속은 온통 어떻게 이 상황을 모면할까 궁리만 하고 있다. 대화의 80%는 그녀가 하고 있었고, 나는 간간히 대답만 하고 있었지만 너무도 불편한 통화의 시간이었다.
결국 통화가 끝나갈 때쯤 나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말았다. 그녀가 받을 상처가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받아주기도 뭐한 그런 상황에 결국에는 매듭을 지어야 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녀의 울음 섞인 목소리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밖에서 빗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 후에도 그녀는 내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대놓고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조심스러운 행동 가운데 무언의 간절함이 있었다. 그 모든 상황을 알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더 매몰찼던 내 모습에 더 큰 상처를 받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맥문동 이야기를 하려다가 감성에 젖어 어린 시절 추억이 한토막 튀어나왔다. 그 시절 이맘때면 소나무 숲 아래 보라색 양탄자를 깔아 놓은 듯 펼쳐지는 야생화가 생각이 난다.
일반적으로 식물들은 해를 보고 자란다. 그런데 맥문동은 그런 것에 크게 연연하지 않고 그늘 아래서도 잘만 자란다. 더구나 군락지를 형성하며 펼쳐져 있는 모습은 너무도 아름답다. 상상을 해보라. 새벽에 멋들어진 소나무 숲 아래로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그 아래로 펼쳐지는 보라색의 향연을!!! 어릴 적 그 장관이 아름다워 새벽 댓바람에 일어나자마자 눈곱도 떼지 않고 달려간 기억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우리 집 화단에도 맥문동이 자라고 있다. 그늘은 아니지만 따가운 햇살도 잘 견디며 풍성하게 자라고 있다. 너무 잘 자라는 탓에 올봄에 맥문동의 3분의 2를 캐내어 이웃하는 카페에 기증도 하고, 어른들 계시는 시골집 뜨락에 옮겨심기도 했다.
봄이었나 보다. 맥문동을 모르는 이웃집 할머니가 오셨다. 화단 한쪽에 풍성히 자라고 있는 맥문동을 보시더니 "부추가 벌서 저렇게 실하게 컸네~!"
"잘라서 부추김치 해 먹으면 맛있겠다." 하시는 말에 우리 가족이 한바탕 웃은 적이 있다. 얼핏 보면 부추를 닮기도 한 맥문동은 겨울에도 냉해에 강한 특징이 있다. 그러다 보니 이른 봄에도 풍성한 채로 자라고 있어서 오해를 부르기도 하는가 보다.
오늘 밖에서 들려오는 자연의 연주에 귀뚜라미가 독주를 하고 있다. 불 꺼진 거실에서 조용히 들려오는 이 자연의 음악이 나를 감성에 빠지게 만드나 보다. 옆에 놓인 캔맥주가 나를 보며 빙긋이 웃고 있다. 새벽 2시 내일 또 출근을 해야 하는데 이러고 있다. 여전히 내리는 빗소리와 귀뚜라미 우는소리가 내 맘을 잔잔히 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