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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향 Aug 10. 2021

향기로운 밤의 산책

여유를 산책하다.

여유를 누리는 시간은 언제나 기분 좋은 느슨함이다.

분초를 다투는 긴박함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목을 꽉 조이고 있는 넥타이를 풀어 젖히는 것과 같다. 목에 걸려 내려가지 않던 체증이 소화되는 그런 시원함이 있다. 그럼에도 여유는 우리 삶과 그리 친하지 않은 듯하다. 그 이유는 몸과 마음이 모두 여유롭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오랜만에 여유를 부려보기로 했다.

소낙비 내린 오후의 한가함을 불러 산책길 어귀에 자리 잡은 카페로 향한다. 어둠이 감싸 안은 세상은 평온함으로 다가오고, 어쩌다 마주치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분주하기만 하다. 이제 곤한 하루를 정리할 시간이 다가오기에 휴식이 또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교차되는 발걸음 사이로 대지가 각도를 세우기 시작하면 어느새 호흡도 기울어진다. 하늘에 오를 기새로 내딛는 발걸음이 뻐근해질라 치면 환하게 미소로 맞이하는 카페가 기다리고 있다.


이제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내기 카페다. 아직 조경이 자리잡기 전이다 보니 어쩌면 휑한 기운마저 느껴지는 입구다. 야생화들이 무성하게 자라나는 우리 집 화단만 바라보던 내 눈에는 다소 어색해 보이기는 하지만 새롭게 단장되는 카페의 신선함은 또 다른 맛을 느끼게 하는 것 같다. 가까이 다가가 쪼그리고 앉아 키 작은 아이들의 모습을 감상해 본다. 겹 물망초의 앙증맞은 눈인사가 촉촉하게 젖은 지면의 흙내음과 섞여 반갑게 다가온다.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걸어오는 우리를 지켜본 것일까.

입구에 앉아 꽃들과 인사하며 머물고 있는 우리에게 카페 사장님이 반가운 미소로 다가온다.

"안녕하세요? 이 근처에 사시나 봐요?"

"안녕하세요. 네, 가까워서 산책 겸 걸어와 봤습니다."

"그러시군요. 오랜만에 이웃분을 뵙네요."

"여기 오픈한 지 얼마 안 돼서 구경도 할 겸, 인사도 할 겸 해서 나왔습니다."

"이제 하나 둘 자리를 잡아가는 중입니다. 앞으로 자주 들러주세요."

"네, 그럴게요."


낯선 이웃의 방문을 반갑게 맞이하는 카페 사장님의 환한 얼굴이 겹 물망초와 닮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삶에 찌들어 세월을 팔고자 하는 장사 속이 녹아있는 그런 모습이 아닌 그저 환하게 웃어주는 꽃과 같이 순수하게 다가오는 모습이다. 겹 물망초의 피고 지는 꽃잎 속에도 그들만의 화려함과 힘겨운 시간이 녹아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누구를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지켜내는 야생화의 모습은 참 아름답기만 하다.


원본 사진과 휴대폰을 떨어뜨리며 찍힌 사진. 우연히 얻어진 사진에 묘한 끌림이 있다.

우연이 인연이 되어 가까워지기도 하지만, 적당한 거리에서 나누는 소통이 때로는 좋기도 하다.

고개를 돌려 뒤쪽을 바라보니 가녀린 야생화들이 각자의 방식대로 꽃을 피우고 있다. 서로에게 기대지 않고 적당한 거리를 두고 피워내는 꽃은 엉성한 듯 하나 결코 부족함이 없다. 오히려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야생화는 서로에게 상처를 입혀 주저앉기 십상이다. 그러니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은 어쩌면 그들이 살아남는 지혜일지도 모른다.


사람들도 역시 마찬가지다. 서로 간에 정이 쌓여 부대끼고 지내는 순간에는 모든 게 좋게만 보인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란 게 마음대로도 잘 안된다는 것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많은 경험을 통해 검증된 사실이다. 부대끼다 보면 작은 오해가 생기고, 오해가 쌓여 상처가 된다. 그렇기에 사람도 적당한 거리에서 나누는 소통이 어쩌면 오랫동안 함께할 수 있는 지혜로운 방법은 아닐까.

한 발 물러난 후에야 세월이 빚어놓은 아름드리 고목을 만났다. 시들어가는 모습이 아니라 세월에 서서히 익어가는 모습이다. 고난을 이겨낸 흔적이 골골이 남아 삶의 애환을 지닌 아름드리나무는 아름다운 꽃 보다 더 깊은 숙성된 향기를 품고 있다. 청춘의 시절을 이미 저 멀리 보내고 익어가고 있는 나에게도 저 고목이 품고 있는 숙성된 향기가 날 수 있을까. 예상치 못한 찰나의 시간으로 고목이 전하는 향기에 나의 삶을 돌아보는 산책의 시간이다.


타오르는 태양의 열기가 입추의 절기를 맞아 힘을 잃는다. 그사이 몇 번의 비가 찾아왔고 귓가로 배달되는 귀뚜라미의 노랫소리가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이제는 밤새 놓지 못하던 리모컨도 붙잡는 시간이 줄어들 것이고, 단단해질 틈조차 없던 각진 얼음도 여유를 찾아갈 것이다.


산책의 여유를 누리며 옆지기와 나는 카페로 들어섰다. 겨울에도 시원함을 찾는 나는 아이스커피를 주문했고, 잠시 물러난 더위에 따뜻함이 그리운 옆지기는 따뜻한 커피를 주문했다. 코로나로 인하여 오래 머물지 못하고 테이크아웃으로 아쉬움을 달래 본다. 커피를 들고 밖으로 나오자 싱그러운 바람이 저마다의 향기를 모아 살며시 전해온다.


내 손에는 여전히 커피 향이 남아있었고, 맑게 개인 하늘에는 일찍 나온 별들이 그들의 향기를 제조하고 있는 향기 가득 담긴 산책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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