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by 소향

1
신발장 뒤로 굴러간 짝 없는 슬리퍼
먼지를 먹으며 여름을 훔쳐보고 있다
수박의 붉은 살점이 거미줄 위로 뚝뚝 떨어질 때
기억은 귀를 찌르지 않고도
귀 속에 피어난다

2
벼룩시장에서 산 낡은 라디오가
누군가의 이름을 끝없이 되감는다
햇빛은 안테나 끝에서 부서지고
고장난 시계의 분침이 자꾸만 오후 네 시를 가리킬 때
세상은 흘러가지 않고, 증발하고 있다

3
빨랫줄에 걸린 하얀 셔츠 속에서
심장 하나가 천천히 마르고 있다
우체통에 꽂힌 편지는
봉투보다 먼저 구겨지고
여름은 그렇게, 아무도 보내지 않은 마음을
말리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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