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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디 Feb 11. 2022

엄살이라는 어린 습관

다 컸지만 여전히 엄살 피우고 싶은 나

지영이가 예방주사 맞는 날

작성자 : 어머니 2003.06.23 17:03


장마가 시작했나 보다. 요새는 일기예보도 제법 정확해.


지영이에게 뇌염 예방주사를 맞혀야 하는데 어찌나 꺽정스럽던지 자꾸 미루고 미루게 되었다. 비 오는 날 예방주사를 맞히면 좋다. 오후에 밖에 나가서 못 노니까 하루 정도는 안 씻겨도 되고. 벼르고 벼르던 그날이 오늘인 것이다 장마가 시작하는 날.


흔들흔들 저절로 뽑히기 직전의 이빨 하나라도 뽑으려면 온 동네방네가 떠들썩한 지영이 인지라 예방주사는 안 봐도 뻔하다. 항상 숙제하는 것처럼 미루다가 어쩔 수 없이 한다. 벌써부터 모기는 빌빌 날아다니는데, 온종일 밖에서만 노는 지영이한테 뇌염 예방주사는 필수다. 


학교 앞에서 기다리다가 아이를 데리고 보건소에 갔다. 언젠가는 아이를 겨우 구슬려서 데려갔는데, 12시부터 점심시간이었었다. 증말 신경질 나는 일이었다. 다시는 속나 봐라.


1시 5분에 도착하였다. 민지영 이젠 넌 꼼짝마라다. 미리 인상을 북북 쓰고, 이를 악 물고 턱에 힘주면서 한 번만 더 창피 떨면 아이스크림은 오늘 없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애들을 둘씩이나 끌고 나타나니까,

"예방 접종하러 왔나요? " 뻔한 걸 묻는다.

"예방접종은 오전에만 하는데요."


뭐 이런 게 있냐.. 예방주사 맞히려면 애들을 하루 결석시키고 데려와야 하냐 원. (속으로만) 오전에는 애가 학교에 가야 하니까 못 온다고 하니까, 그럼 여름 방학 때 오란다. 모기 때문에 맞히는 예방주사를 말이다. 난 그럴 수 없다고 버티면서 이유를 물으니 오후에 주사 맞고 아이가 열이라도 나면 자기네들이 대책이 없으니 안된다나. 벌써 그렇게 하기로 한지가 다섯 달째라나.


보건소에서 예방주사 맞히면 꼭 공짜로 싸구려 접종하는 것 같아 영 기분이 말이 아니다. 우리 앞집에 의사 선생님이 사니까 만약 아이가 열이 나면 피해 안 가도록 조처하겠다고 강력하게 호소를 하고서야 주사를 드디어 맞히는가 싶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지영이가 문 뒤로 도망가서 들어오지도 않는 것이다. 제 딴에는 속으로 오늘은 주사를 안 맞아도 되는 줄 알았는지 방심을 하고 있었다.


지영이를 부름과 동시에 통곡을 늘어 놓을려고 준비하는 순간 우리는(간호사 셋과 엄마) 달려들어 아이를 잡았다. 간호사 아줌마의 큰 엉덩이 뒤에 숨겨 둔 주사기를 못 본 아이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우리는 기습적으로 왼팔에 찔렀다. "엄마 눈 좀 가려 줘..." 야, 이미 상황은 끝인데 눈은 뭐하러 가리냐...








그리고 2022년 2월 11일 금요일


나는 정말 엄살이 심했다. 아빠한테 혼나며 매를 맞을 때도 ‘제발 살살 때려주세요'라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려서 결국 아빠를 웃게 만들었고, 치과에 갔다 하면 진료받기가 무서워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오겠다며 그 길로 집까지 도망치곤 했다. 당연히 예방접종은 재앙이었다. 줄 서서 주사 맞기를 기다리다 내 차례가 오면 ‘잠깐만요...’하며 줄의 맨 뒤에 가서 다시 서고, 이러기를 반복하다 결국 제일 꼴찌로 주사를 맞았던 기억도 있다. 나에게는 이제 파편으로 남은 우스운 기억이지만, 그 어리고 겁 많은 나를 데리고 수많은 예방 접종과 치과 진료를 다녀야 했던 엄마는 얼마나 고생스러웠을까. 사실은 참 짜증도 나고 벅찼을 그 일화를 이토록 애정 어린 문장으로 기록해 둔 엄마가 왠지 존경스럽다.


언젠가부터 엄살을 떨지 않게 된 걸까. 치아 교정을 하며 밥 먹듯이 치과를 들락거렸던 때부터일까. 아니면 햄버거 쿠폰을 준다는 말에 냉큼 달려갔던 헌혈 버스에서 두 눈이 휘둥그레 해지는 굵직한 채혈 주사를 맞아본 날부터일까. 어쨌든 지금은 코로나 3차 백신 접종을 맞아야 한다는 말에 ‘무섭다'보다 ‘귀찮다'가 먼저 떠오르는 평범한 어른이 됐다. 이제 주삿바늘도, 치과 의자에 앉아 바라보는 시린 백색 등도 하나도 무섭지가 않아졌다. 그렇게 엄살떨 때마다 엄마를 붙들고 통곡하던 어린 습관도 달아났다... 고 생각했는데. 지난여름, 오랜만에 이 어린 습관을 다시 만났다.


여름의 한가운데였던 7월, 3주째 생리가 멈추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출근해 일을 하다가도 머릿속이 깜깜해졌다. 자리에 잠깐 앉아있기도 불안할 만큼 피가 흘렀던 그날, 회사에서 뛰쳐나와 무작정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뭐 잘못된 거 아니겠지, 큰 병은 아니겠지'하며 길거리에서 엉엉 울었다. 엄마가 의사도 아닌데, 엄마라고 해답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그렇게 통곡을 했다. 통화를 하며 겨우 진정을 하고 병원에 가 보니 자궁에 근종이 있었다. 수술을 해야 하긴 하지만, 심각한 병도 아니고 크게 아프지도 않으며 엄마도 언니도 있었던 그 근종이었다. 곧바로 대학병원 진료를 예약했고 다음 달에 수술을 받았다. 사실 길거리에서 엉엉 울면서 난리 피운 게 머쓱할 만큼 내 근종은 작았고, 수술은 간단했다.


어쩌면 그 여름날 길거리에서 오랜만에 ‘엄살'이라는 나의 어린 습관을 만난 걸지도 모르겠다. 잠깐만 생각해보면 별 일이 아니라는 걸 알 텐데, 일단 울음부터 터뜨리고 기대고 보는 막내딸의 어린 습관. ‘이런 걸로 엄살 부리면 안 돼'라고 스스로 되뇌며 억눌러왔던 습관. 지난여름 다시 마주하고 나를 조금은 머쓱하게 만들었던 그 습관. ‘엄살'이라는 습관.


참으로 어른스럽지 못한 습관이지만, 이 습관이 없어지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엄살이란 어딘가 기댈 구석이 있어야만 피울 수 있는 거니까. 그 말인즉슨 나에게는 예방 접종을 맞던 7살 때나 지금이나, 언제든 붙잡고 통곡할 엄마라는 비빌 언덕이 있다는 뜻이니까 말이다. 이렇게 엄살 많은 막내딸을 둔 엄마는... 아마 앞으로도 꽤나 귀찮은 일이 많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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