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 이언 매큐언

by 규영

2022-02-27

<속죄> 이언 매큐언

"브리오니는 일어난 일들이 모두 퍼즐 조각처럼 잘 맞아들어간다고 생각했다. 끔찍한 현재는 바로 얼마 전의 과거를 완성시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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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수성어린 소녀 브리오니의 상상력과 감정이 어떤 불확실한 경험과 마주하자 하나의 세계가 창조되었다. 그 세계속에서 그녀의 언니 세실리아와 세실리아의 연인 로비, 그리고 브리오니 자신은 각자 고통스런 삶을 살아가게 된다.

사촌에 대한 브리오니의 질투로부터 시작해 탈리스가에서 며칠간 일어나는 온갖 종류의 사사로운 갈등, 이어지는 범죄와 심판, 그리고 전쟁에서 발생하는 수만가지의 참상들까지 폭력의 현상학이 저자만의 섬세하고 긴장감 넘치는 언어로 묘사되고 있다. 중간 중간에 세실리아와 로비의 로맨스 서사가 사건들을 관통하고 있으며, 브리오니의 그 날의 기억이 이 모두를 다시 감싼다. 한 권의 책으로서 구성에 빈틈이 없다.

아우슈비츠 시대를 살았던 철학자 레비나스는 타자성을 동일성 안으로 환원시키는 모든 일을 폭력이라 정의한다. 하나의 이념을 강조하는 일이나 하나의 질서와 룰을 가지고 사람들을 제단하는 일은 폭력적인 것이다.

언어는 그 속성이 '규정적'이라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폭력성을 내포하고 있는데, 과연 브리오니가 로비를 '어떤 인간' 이라고 정의할 수록, 그 말이 사적 대화에서 공적 진술로 옮겨갈 수록 그 폭력의 무게는 점점 커져간다. 로비라는 이름에 다 담기지 않는 무한의 존재자, 하나의 '얼굴', 그의 생애, 터너부인의 사랑의 현신이 '정신병자'로 낙인 찍히고 심판 받기까지 소녀의 몇마디 말이면 충분했던 것이다.

언어가 폭력의 도구라면 전쟁은 폭력의 무대라고 볼 수 있다. 비록 레비나스는 나를 동일자의 세계에 포섭하려는 힘으로부터 맞서 싸워야 한다는 점에서 개인 차원의 전쟁에 어느정도 긍적적인 면이 있다고 본듯 하지만, 분명 전쟁은 그 배경 자체가 이미 폭력적이다. 전쟁의 상황에서는 무수한 '얼굴'들이 사라지고, 러시아놈, 유태인, 하마스, 빨치산 따위로 모두 환원되고 만다. 최근의 전쟁은 민간인과, 환자, 심지어 어린이마저 '잠재적인 적군'으로 불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레비나스를 따르자면 평화를 구축하는 길은 다수성, 타자성을 회복함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레비나스에겐 '타인의 얼굴'을 마주하고 그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야 말로 유일한 실마리인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다소 낭만적인 말로 들리는 것이 사실이다. 언어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타인을 규정하지 않기란 불가능한 작업인 것이다. 나는 대신 우리의 작업이 아도르노의 사유를 따라 '나의 세계'의 불완전성, 즉 합리적 이성의 한계와 유한성을 직시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쇼펜하우어는 세계는 단지 의지의 표상 (image)이라 했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란 우리에게 감각되는 물리화학적 자극이 신경에 의해 하나의 현실로 재구성된 의식일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이는 사실이다. 데카르트의 의심처럼 우리는 우리의 세계가 실재한다고 확신할 수 없을 뿐더러, 우리가 서로 동일한 세계 속에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사유는 합리적일 수 있지만 우리의 타자는 그 사유 너머에 있다.

오늘 나는 누가 만든 세계 속에 살아가는가? 퍼즐을 맞추려는 시도야 말로 악의 근원일지 모른다. 쇼펜하우어를 따라 완성된 퍼즐이라는 공간성과 시간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 '그저 있음'의 존재로 살거나, 사도 바울을 따라 하나의 퍼즐 조각으로서의 삶을 받아들이고 완성된 퍼즐의 세계를 기다리는 순례자로서 살아가거나 두 가지 존재방식이 있는 듯 하다. 아직 어린 브리오니는 이 같은 사실을 알지 못했고, 훗날 원죄를 저지른 스스로를 '속죄' 속에 영원히 가두고 만다.

본다는 것, 그리고 말한다는 것은 분명 하나의 세계를 담을 만큼 무거운 일이다.

#속죄 #이언매큐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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