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더이상 기웃거리지 않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내게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로자 아줌마 곁에 앉아 쉬고 싶다는 것. 적어도 그녀와 나는 같은 부류의, 똥 같은 사람들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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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선 모모라고 불리는 소년 모하메드는 자신의 부모를 만나보지 못했다. 단지, 엄마가 갓난 아기였던 자신을 로자 아줌마한테 맡겨놓고 떠나버렸다는 사실과, 그녀가 매춘부였다는 것만 안다. 모모는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과 함께 로자 아줌마네 집에서 생활하는데 로자 아줌마는 폴란드 출신의 유태인이며, 은퇴한 매춘부이다. 젊은 시절 아우슈비츠를 겪었으며 알제리와 모로코에서 몸을 팔아 살아왔으나 은퇴한 지금은 갈데 없는 아이들을 맡아 그들의 부모가 보내주는 얼마간의 양육비로 하루 하루 살아간다. 그러다 병이 들고 제 몸을 못가누는 신세가 되자 이제 모모가 그녀의 전부가 된다. 모모는 오롯이 홀로 그녀의 곁을 책임진다.
이 책은 서사 대신 모모의 내면 세계를 다루고 있다. 로자 아줌마가 지내는 프랑스의 슬럼가를 배경으로 하는데 무겁고 때론 비참한 장면들이 어린이의 시선으로 그려지는 지점에서 이 책의 진가가 드러난다. 우울과 천진함의 변증법이란게 있다면 그건 바로 모모가 살아가는 세계이다. 모모와 로자 아줌마를 제외하곤 등장하는 인물들은 입체감이 없이 한정된 역할만 수행할 뿐인데, 이 역시도 모모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계라는 걸 이해하고 나면 수긍이 간다.
로자 아줌마와 작가 로맹 가리 (에밀 아자르)가 20세기 유태인 프랑스 이민자라는 사실, 그리고 이 책에서 줄곧 말하는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다"는 메시지에서 자연스레 레비나스를 생각하게 된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고통 속에 있는 타자는 나의 주인이다. 취약한 타자의 얼굴을 통해 우리는 자기보존의 욕구를 넘어 설 수 있고, 타자를 섬기는 '환대'의 행위 속에서 죽음의 불안이 비로소 극복될 수 있기에, 타인의 얼굴은 곧 신의 현현이라 할 수 있다. 존재의 의미를 타자에게 둘 때만 자신의 죽음, 존재의 상실이 극복될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러므로 자유가 있어야 책임이 있다는 칸트의 명제와 달리 레비나스에게선 책임이 자유에 앞선다. '자유'로운 주체, 진정한 주체란 게 있을 수 있다면 이는 자유를 요구하는 주체가 아니라 먼저 고통 속에 있는, 거주할 곳 없는 이를 책임지는 주체, 즉 '환대적 주체'에 다름 아닌 것이다. 진정한 철학이란 윤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로자 아줌마와 모모는 비록 경제적 자유, 교육의 자유를 부여받지 못한 채 법에서 소외된 삶을 살았지만 (물론 이는 또 다른 차원에서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이다), 서로를 책임지는 환대적 실천을 통해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었다. 모모는 죽음마저도 초월한다.
'자기 앞의 생'이란 무엇인가? 생의 바깥에서만 자신의 생을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 모모가 초월한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겠고, 다른 한편에선 모모와 로자 아줌마, 그리고 이 책에 나오는 많은 비주류들이 기꺼이 환대했던, 고통받는 '타인의 얼굴'을 말할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