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어떻게 되는거지?" "우린 사라지는 거야, 영원히. 하지만 두려워하지 마. 네가 나를 기억했듯이 누군가 너를 기억한다면 그것은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춘희는 뭔가 더 질문을 하려고 했지만 미처 입을 뗄 사이도 없이 둘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져 광대한 성간에는 희미한 목소라만 남게 되었다. "꼬마 아가씨, 안녕." "코끼리, 너도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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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막힌 이야기꾼이 들려주는 한국판 판타지 히어로물. 평대-부두-공장으로 펼쳐지는 거대한 세계관이 마지막 춘희에게서 끝이날 때 말 못할 감동이 있었다.
구전설화의 양식을 차용한 소설로 나래이터는 독자에게 말을 건네가며 대놓고 구라를 펼친다. 주인공 금복-춘희뿐만 아니라 에꾸, 노파, 반편이, 걱정, 칼잡이, 쌍둥이, 생선장수, 약장수 등 모든 인물들은 저마다의 서사를 가지고 있는데 각자의 서사는 금복을 주위로 다시 물고물고 이어진다.
충격적으로 자극적이며, 황당무개한 전개에 한번 펼친 책을 좀처럼 멈추기 어려웠다. 주인공들은 여성이지만 시대적 배경과 장면 묘사는 불편할 정도로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이며, 성차에 대한 고정관념이 가득한데 작가 천명관씨는 이 모든 불편함을 나래이터에게 덮어 씌워버린다.
한편,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저머다 비루한 시절을 지나, 짧았던 황금기를 보내고, 이후 긴 쇠퇴의 시간들을 지낸다. 반복되는 흥망성쇠 한 가운데 사랑이 있으며, 그 이후로는 욕망이 가득하다. 춘희와 춘희의 의붓아버지 文만 제외하고.
자본주의가 봇물처럼 밀려들던 20세기 한국에서 느린 것은 살아남지 못했다. 먼저 금복의 눈에 보였던 고래가 그랬고, 생선장수의 삼륜차가 그랬고, 코끼리 점보가 그랬고, 걱정이의 미련함이 그랬고, 장님이 된 文과 춘희가 그랬다. 文은 춘희에게 벽돌 굽는 법을 가르키는데 벽돌은 느리고 공이 많이 드는 일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춘희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웠기에 벽돌을 구웠다고도 볼 수 있지만, 벽돌을 구웠기에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라캉의 말대로 무의식적 욕망 역시 언어에 의해 구조화된다면, 듣지 못하고 말을 못했던 춘희가 인간의 욕망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도 이해가 간다.
모든 개별자의 서사들이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진다는 점과, 춘희가 우주의 성간에 흩어지지만 남겨진 이야기와 기억 속에서 계속 존재하게 된다는 점에선 작가 나름의 존재론을 이해할 수 있었다.
프로이트는 '꿈'에 평소 억압된 욕망을 해소하는 고유한 기능이 있다고 보았다. 이러저러한 해석과는 별개로 기가 막힌 꿈을 한 편 꾼것만 같아 어쩐지 속이 시원하다. 이런 책이 맨부커상 후보에 올랐다니 서양에 한국의 맛을 보여준 것 같아 괜히 뿌듯하기도 하다. 나는 이 책을 <고래전>이라 부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