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티투바, 세일럼의 검은 마녀> 마리즈 콩테

by 규영

2023-06-25

<나, 티투바, 세일럼의 검은 마녀> 마리즈 콩테

"하지만 삶은 죽음만큼이나, 특히나 나의 사람들로부터 그토록 멀리 떨어진 상태라면, 죽음만큼이나 공포를 안겨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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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2년 매사추세츠의 한 작은 마을을 휩쓸었던 그 유명한 '세일럼의 마녀재판' 사건 속 실존 인물인 흑인 여성 티투바의 이야기이다. 똑같이 마녀로 재판받았어도 흑인 여성은 역사에서 철저히 비존재 취급되었다. 단 한줄 기록에 실린 티투바의 생애는 얼마나 무거운 것이었을까? 작가 마리즈 콩테는 그 스스로 흑인, 여성, 이주민으로서 그만의 고유한 시선으로 잊혀진 티투바의 존재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제국주의 시대부터 현대에 에르기까지 흑인 여성이란 그 존재만으로 시대에 대한 하나의 비판이자 물음이었다. 근대부터 이어져온 페미니즘 운동 일반이 중산층 백인 여성의 목소리였다면, 현대에 이르러서야 주목을 받기 시작한 흑인 페미니즘이란 성차 뿐만 아니라 인종과, 빈부, 계급 차별 모두를 포괄하는 교차적 (intersectional) 문제를 담고 있다.

폭력은 폭력을 낳고, 증오는 증오를 심는다. 노예는 모두 같은 역사를 공유하는 것처럼 보여지지만, 노예 중에서도 여성이자 고아였던 티투바는 차별받는 이들에게서도, 심지어 같이 마녀로 몰린 이들에게서도 차별받는다.

프랑스 인류학자 르네 지라르는 '희생양'이 인류 보편의 장치라고 본다. 야만의 생활을 하던 인류가 모여살기 시작하면서 질서의 세계가 발생했고, 억압된 폭력성과 불안을 해소할 대안으로서 희생양 제의가 고안되었다는 것이다.

서구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이후로 더 이상 동물로써 속죄하지 않게 되었는데, 오히려 그럼으로써 역사 속에 다시 한번 등장하게 된 '희생양' 장치가 바로 '마녀사냥'이라고 볼 수 있다. 페스트가 창궐하던 시절, 엄격하다 못해 숨쉬기 조차 어려웠던 중세 로마 가톨릭과, 아메리카 청교도인들에게는 그야말로 '희생양'이 필요했던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형은 수없이 재현되었다.

지라르의 말대로 희생양의 조건이 첫째, 주변부적 존재여야 하고 둘째, 보복할 힘이 없는 무력한 존재라면, 과부와 정신장애인이 대부분을 차지했던 중근세의 마녀는 그 조건을 충족한다. 어디 그시절에서 그쳤을까?

한편, 티투바는 기존의 마녀 혹은 기존의 흑인 서사와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인물인데, 그녀가 욕망하는 주체이자, (주술적 능력과는 별개로) 혼자서는 무력한 여성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흠 하나 없는 희생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다. 오히려 바로 그런 모습들이 역사에서 기록되지 않은 무수한 티투바의 생애를 조명해준다. 삶은 단순한 긍정이 아니며, 역사는 희망과 승리만큼이나 절망과 쓰라림의 이야기이다.

다른 한편, 책에는 티투바가 짧게나마 안식을 누리던 모습들이 등장하는데 자연 속에서 자기만의 세계를 짓던 때가 그렇고, 존 인디언을 만나 처음 사랑을 나누던 때가 그렇고, 또 다른 비극의 주인공인 유대인 다제베두의 가정에서 사랑을 받던 때가 그렇다.

티투바는 예속되어 있지만, 노동과 사랑과 공동체와의 관계 사이에서 자유를 맛본다. 오히려 끝까지 불안속에 살아가는 건 뱀같은 형상의 목사 새뮤얼 패리스와 그 가족들이다. 헤겔의 말대로 어떤면에서 진정 예속된 존재란 노예가 아닌 주인인 것이다. 세계 속에서 소외된 채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불행한 게 아닐까?

책을 읽으며 티투바의 알 수 없는 말과 행동에 답답하고 불편한 감정을 여러번 느꼈지만, 과연 그만큼 그녀에게서 내게 없는 많은 것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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