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저는 죄인은 커녕 미치광이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아니요, 저는 결코 미치지 않았습니다. 단 한순간도 미친 적은 없었습니다. 아아, 그렇지만 광인들은 대개 그렇게들 말한다고 합니다. 즉 이 병원에 들어온 자는 미친 자, 들어오지 않은 자는 정상이라는 얘기가 되는 것이지요. 신에게 묻겠습니다. 무저항은 죄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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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이해할 수 없었고, 인간으로부터 이해 받지 못한 한 남자의 생애가 있다. 요조라는 이름의 주인공이 전하는 기구한 이야기를 통해 사회로부터 실격당한 많은 이들의 실존과 정신을 생각해 본다.
요조는 어려서부터 본능적으로 다른 사람의 눈치를 살피고, 그들이 바라는 행동이나 대답을 완벽히 실행함으로써 주변의 호감을 샀다. 사회가 요구하는 질서와 관습, 유머코드 뿐 아니라 타인의 은밀한 욕망까지 읽어낼 수 있었기에 누구도 요조를 불편해하지 않았고, 도리어 모든 이들이 그를 좋아했다.
타인의 바람에 언제나 응답하는 그의 성격이 문제가 된 것은 바로 그 자신에게였다. 요조 스스로는 언제나, 그가 응하고야 마는 사회의 질서나 타인의 요구라는게 그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자 라캉은 인간에게 있어 의미란 이미지적인 언어 (은유)를 통해 무의식에 구조화되고, 욕구를 불러일으킨다고 말한다. 많은 욕구는 사회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고, 요구되지 못하고 남은 욕구는 욕망의 형태로 남는다. 욕구 자체가 억압되었을 땐 공포가 남는다.
가부장적이고 엄격한 집안에서 대가족의 막내로 자란 요조는 두려움 속에 자란다. 용납받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 어린시절 그를 강하게 사로잡은 이미지란 아름다운 것,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사자의 형상을 한 무서운 모습의 얼굴이었다. 그에게 의미의 세계란 두려움의 세계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요조는 공포증을 내면화하며 살아간다. 빛이 아에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마저 상실하게된 두 번의 사건에서 요조는 모두 자살을 시도한다.
욕망은 요구될 수 없는 욕구이기에 언제나 뒤로 밀려난다. 요조의 억압된 주체는 떠나온 집을 갈망하는데 한번도 집으로 돌아간 적은 없다. 그의 욕망은 흔들리는 실존에 안식을 줄 수 있는 곳, 돌아갈 수 없고 끝내 다다를 수 없는 곳에 있기에 실현될 수 없다.
요조에게도 사랑이 있었다. 짧지만 가장 깊었던 인연 쓰네코는 궁상맞은 여자였다. 그래서 그녀는 요조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요조는 그녀의 품에서 처음으로 안식을 누린다. 그러나 그 안식은 하룻밤에 그쳤다. 위태로운 두 실존으로 버티기에 삶은 버거웠다.
요시코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인연이었다. 타인의 말을 전적으로 믿고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요조와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요조에게 주체가 억압된 것이라면 요시코에게 있어 주체란 세계와 구분되지 않는 것이었다. 요시코는 경계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요구할 줄을 몰랐다. 요조는 그녀 곁에서 다시 한번 안식을 누리지만, 요시코의 천진함이 빚은 강간사건으로 인해 안식은 오래지 않아 뿌리 뽑힌다. 요시코는 순수를 잃어버리고 이제 모두를 경계하는 일반의 사람이 되고 만 것이다 (이 지점에서는 죄에 대한 작가의 깊은 신학적 사유가 깃들어 있다). 이후로 요조는 삶에 아무런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폐인처럼 살아가게/죽어가게 된다.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생애는 거의 요조의 것과 비슷했다. 살면서 다섯 번의 자살시도를 했고 마지막 시도에서 생을 마감한다.
사회 속에서 실격당한 한 인간의 생애사를 보며 그 기구한 생애의 책임은 어디에 있는지 묻게 된다. 사회를 이해하지 못하는 기질이 있다면 그것은 타고난 것인가, 환경에 의해 발현된 것인가? 어느쪽이든 그에게 책임이 있다고 하긴 어렵다. 그런데 모든 책임이란 본디 그런 것이다. 누구에게도 어떤 문제에 대한 책임이 오롯이 있다고 하기 어려우며, 같은 이유에서 어느 누구도 임의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독서모임에선 다자이 오사무와, 유사한 일본 전후소설이 가지는 특유의 분위기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전범 문제에 대해 책임지지 않으려는 일본의 태도가 이런 문학의 사조와 연관이 있을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 노숙인과 정신장애인, 재소자와 같이 사회로부터 격리된 존재에 깊은 관심이 있고 큰 책임감을 또한 가지고 있다. 타자의 타자성을 돌아볼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또 그에 대한 담론을 생산한다는 점에서 훌륭한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