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고 있었다. 나오미의 삶 속에서 계속. 떠나고, 어딘가에 마음을 두고, 또 다시 쫓겨나듯 도망치는 밤들이. 이제 나오미는 눈물도 나지 않았다. 마치 마음 한 구석음 도려낸 것 같은 공허감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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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5년에 발생한 '더스트폴'이라는 재앙 이후 재건된 사회에서 살아가는 한 생태학자가 모스바나라는 정체불명의 식물의 뿌리를 좇으며 알게 된 이야기들을 담은 책이다. 디스토피아를 살았던 이들의 살림살이와 잔혹한 운명들, 살아남은 자들의 트라우마, 대안공동체의 가능성과 한계, 그리고 인류를 지켜낸 이들의 소박한 우정과 약속이 책의 주제를 이룬다.
스티븐 샤비로는 SF는 그 장르 자체로 하나의 '사고실험'이라 말한다. 기술과 조건이 현실에서 발생 가능한 상황을 넘어설 때 우리는 그동안 묻지 않았던 질문들을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가령 영화 <메트릭스>에서 네오가 마주하는 '빨간약과 파란약'의 딜레마는 보는 이들을 자유와 결정론의 문제 앞으로 초대한다.
SF소설을 읽으며 독자들은 작가가 설정한 윤리/정치 시뮬레이션에 참여하며 일종의 '외삽' 과정을 경험한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사고의 경계들을 다시 돌아봄으로써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세계를 경험하는 것이다.
<지구 끝의 온실>에서 작가 김초엽은 생태계 전체를 뒤흔드는 전지구적 재앙을 설정함으로써 인간 사회의 조건과 한계라는 문제로부터, 생존욕구와 도덕성, 그리고 감정의 인위성에 관한 물음에 이르기까지 '인간' 전체를 아우르는 질문들을 던진다. 다만, 분량이 짧은만큼 이야기의 전개나 인물들의 서사가 다소 느슨하게 짜여진 점이나, 적당한 따뜻함과 희망으로 급하게 마무리되는 결말의 진부함은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프림빌리지'라는 공동체는 시대적 맥락이나 그 역할을 볼 때 성서가 그리는 교회의 모습과 상당히 유사한데, 그러고보면 모스바나나 돔시티도 종교적 상징 같은 면이 있다. 유토피아든 디스토피아든 구원과 희망의 서사는 비슷한 흐름의 전개를 가질 수 밖에 없는 듯 하다.
모든 SF가 그러하듯 미래에 대한 이야기는 곧 오늘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인류가 만들어낸 '더스트폴'은 소위 선진국이 지난 삼백년간 뿜어댄 이산화탄소와, 마찬가지로 그들이 수많은 국가에 뿌려놓은 전쟁과 반목의 씨앗으로 아프리카와 중동과 남미에서 실재하는 재앙이다.
오늘날 나오미와 같이 벌거벗은 생명으로 살아가는 전쟁/정치/기후 난민이 1억명을 넘었다. 매년 4천명에 달하는 이들이 지중해를 건너다 목숨을 잃는다. 인구 1인당 탄소배출 1위, OECD 난민 인정률 최하위인 이 땅을 보면 '돔시티'도 실재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프롬빌리지'와 '온실'도 어딘가에 실재할까? 언젠가 '더스트폴'의 끝을 보게 된다면 그 답을 알 수 있겠다.
나이가 들어서 후대에 내가 전할 수 있는 이야기가 생명과 평화의 이야기라면 좋겠다. 책을 덮으며 내가 심어야 할 '모스바나'를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