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한철을 발견하자, 해가 떠오르기 직전 온 하늘에 분홍빛이 번지듯 옥희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그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삶의 근본적인 의미를 가득 안고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마치 형언할 수 없는 신비의 언어가 가득하던 밤새들의 노랫소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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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그저 존재한다. 물질이나 에너지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영원히 회귀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관계는 우연적이다. 아내를 처음 만난 곳에 내가 가게 된 것이 우연이었고, 지독했던 지도교수를 만나게 된 것도 참 씁쓸한 우연이었다. 즐거웠던 청소년 시절이 시작된 고등학교 1학년 8반에 배정받은 것이 우연이었고, 형이 먼저 그 학교에 간 것도 우연이다. 중학교때 황우석이 등장해 진로를 결정하게 된 것도 결정적인 우연이었다.
무수한 사건의 집합인 생명은 우연한 조합의 염색체간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만들어 간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주어진 현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인간 고유의 능력에서 비롯하다고 볼 수 있다. '의미'란 삶의 무게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일단 어떤 일에 의미가 부여되고 나면, 그 일은 같은 의미를 공유하는 다른 사건과 연장선상에서 해석되게 된다. 독립된 사건이 아닌 하나의 흐름으로써 이야기가 탄생하고, 이야기들은 서사로서, 서사는 한 사람의 생애로서, 그리고 여러 생애는 다시 시대와 역사로까지 이어진다.
이 책은 춥고 굶주리고 서러웠던 시절, 우연한 만남으로부터 출발해 한 때 혹은 평생토록 서로에게 '의미'를 두고 살았던 옥희, 정호, 한철, 연화의 삶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는 단이, 성수, 명보와 사냥꾼과 야마다 대위의 삶으로, 다시 갓난 아기의 삶으로 이어지며 회귀한다. 비록 어느 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작가는 보편사를 두고 반복되는 하나의 서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책을 읽는 내내 두근 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어려웠다. 책에 나오는 모든 만남이 저마다 '의미'를 불러오는 사건들이기 때문에 그랬다. 그리고 동시에 내 삶에도 적지 않았던 '의미'있는 만남의 사건들이 하나하나 떠올랐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때의 두근거림, 설렘, 기대감, 궁금함, 긴장감 같은 것들이 아직 생생히 가슴에 보존되어 있다는 게 사뭇 새삼스럽기도 하다.
옥희와 한철이 인력거를 놓고 나란히 산책하던 밤 들리던 소쩍새 소리나, 단이가 명보를 만나고 돌아가던 길가에 내린 황금빛 햇살 같은 장면은 누군가 나로부터 의미를 발견할 때, 나와 내 세계가 얼마나 풍성해 지는지 잘 보여준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삶을 이끄는 힘이되고, 사랑하는 이로부터 사랑받는 일은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 작가는 아름다운 세상의 순간들을 탁월하게 묘사한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에는 삶의 어느 순간을 지나고 나면 더이상 새로운 인연이 생기지 않는 것 같다. 일단 우연한 만남이 부재하다. 만나기 전에 이미 정보를 파악하고, 만나면 계산하기 바쁘다. 무슨 일이든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인생은 계획한 대로 살아간다. 원자화된 개인의 시대에 '의미'는 부담스럽다. 하지만 우리가 바라는 삶의 양식이 과연 레포트인지 이야기인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분명한 것은 '의미'를 잃어버릴 때 세계는 그저 부유하고 나는 그 사이 흘러가버릴 뿐이란 사실이다.
가진 것 없던 어린 정호와, 기구한 삶을 지나온 연화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주던 옥희의 목소리가 귀에 맴돈다. 언제 어디에서나 그녀처럼 따뜻한 존재의 집을 지을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