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통증이 없어지는 약이 개발되었다. 그러자 곧이어 고통을 신비화하는 교단과, 그 교단을 신봉하는 무리가 생겨났다. 신자들은 단순히 고통의 의미를 묵상할 뿐 아니라 고통을 적극적으로 체험하고자 나섰고 그 과정에서 갖은 사건 사고가 발생했다. 부모들은 구원을 위해 자녀들을 학대했고 광신도는 제약회사를 테러했다. 기묘한 공생관계에 놓인 제약회사와 교단 사이에서 비슷한 처지에 놓인 경과 태는 자신들의 삶의 의미를 발견해간다.
고통이란 무엇인가? 작가는 책에서 통증과 고통을 구분하면서도 명확한 정의를 내리지 못한다. 책에선 고통을 형이하학적 주제로, 즉 생산 가능한 실체가 있는 것으로 다루고 있지만 내게는 그러한 설정이 그다지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덕분에 책을 읽으며 고통의 의미에 대해 나름의 생각을 정리해볼 수 있었다.
고통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고통이 없는 상태를 먼저 상상해 보자면, 이는 모든 욕구가 충족된 상태일 것이다. 라캉의 말대로 욕구의 결핍으로부터 욕망이 발생한다면 고통은 언제나 욕망과 함께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인간은 영아 시기의 '거울단계'를 지나면서 자아를 형성하고, 자아와 타자를 처음 구분하기 시작한다. 동시에,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자신의 세계 사이의 간격, 또 타자와 자기자신 간의 간격을 발견하게 되는데 여기서부터 욕구의 결핍과 함께 최초의 욕망이 발생한다. 이때 욕구의 결핍을 바로 '고통'이라 정의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때문에 고통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 있다면 그는 신생아가 아니라면 정신분석학적 정신병, 즉 나르시시즘 혹은 망상증을 가진 인간일 수 밖에 없다. 같은 맥락에서, 고통이 없는 사회가 있다면 그곳엔 도덕법칙을 포함해 아무런 규범도 없는 곳일텐데 간단한 칸트의 정언명령을 따라 사고실험을 해보면 그런 사회는 존재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애초에 욕망이 없는 상태란 자아와 타자의 구분이 없음을 말하므로 그런 집단이 있다 하더라도 이는 사회로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쯤에서 다시 정리해 보자면, 고통이란 욕망, 즉 우리가 지향하는 바 (아직 충족되지는 않은)가 있는 상태를 말하고, 의미란 나의 지향성 (가치관)으로 재해석한 사태를 말하므로 '고통의 의미'란 순환 오류적 서술이 되고 만다. 의미 없는 고통이나, 고통없는 의미는 불가능한 개념인 것이다. 책에 나오는 교단은 처음부터 실체가 없는 형이상학에 구원의 길이 있다고 설파한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야 말로 모든 종교의 필요조건인지도 모르겠다.
염세주의 철학자로 알려진 쇼펜하우어는 이 같은 맥락에서 삶은 고통이라 말했다. 그에게 구원이 있다면 그것은 '생에의 의지'를 초월하여 모든 고통에서 해탈한 상태를 의미했다. 고통을 지우기 위해선 먼저 자기를 지워야 하는 것이다. 한편, 니체 역시 삶은 고통의 연속이라 보았는데 그에게 고통은 맞설 수 밖에 없는 것이고, 맞서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초인 역시 궁극적으론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의 나르시시스트적 인간이었다. 고통을 보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야기하는 실체를 바로 보고 이를 초월할 때 스스로의 운명을 정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통엔 의미부여가 불가능하지만, 우리는 고통의 상황, 즉 '고난'에는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어떤 고난은 고귀한 정신을 낳지만 분명 세상엔 무가치한 고난, 고통만 생산하는 고난이 존재한다. 의미는 이를 부여할 주체가 있어야만 하는데 유대계 철학자 레비나스에 따르면 이 주체는 본래 '향유적 주체'이다. 거주할 집이 없이 타자를 맞이할 주체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스스로의 고난을 가치있는 '광야'가 아닌 오로지 고통으로 마주하는 이들이 있다. 주체를 말살당한 이들에게 고통은 실존을 뒤흔드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우크라이나, 니제르, 수단, 예멘,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을 생각한다. 벌거벗은 생명으로 존재하는 이들에게 구원은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 덜어질 고통이 아니지만, 고통밖에 없는 이들의 얼굴을 생각하며 내편에서 작은 고통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