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존재의 열쇠는 그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느냐 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 세계 내 그의 자리와 세계와 그의 관계, 그 안에서 그가 세계를 어떻게 배우게 될 것인가가 시대와 사회적 공간이라는 특정 지대에서 결정되었던 것이다."
.
스스로를 노동계급의 탈주자라 여기는 프랑스 철학자 디디에 에리봉은 자신을 하나의 텍스트로 삼고 그가 멀리 떠나온 자신의 어린 세계, 랭스로 되돌아간다. 부르디외와 푸코적 사유를 통해, 그리고 어느정도 (탈-라캉적) 정신분석학적 접근을 통해 그가 살았던 동네, 학교, 가정에서 자신을 형성한 세계를 재해석한다.
자기 비평이야말로 철학이 그 쓸모를 다하는 (다할 수 있는) 유일한 장이라는 생각이 들만큼 애리봉이 사용하는 개념 하나하나에 무게가 느껴졌다. 책을 읽으며 나를 형성한 세계와 더 나아가서 부모님이 살았던 세계까지 곰곰이 떠올려보게 된다.
내가 가진 취향과 태도, 말투와 표정, 그리고 욕망은 분명 내가 가져온, 아니 정확히 말해서 그때그때 위치지어진, 내 정체성에서 비롯되었다. 동시에 그것들은 내가 살기로 다짐한 나의 지향과 그에 따른 실천(수행)에 의해 강화되기도, 억압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위치지어짐'과 '위치함'의 상호작용에 따라 나의 주체이자 동시에 '장'인 정체성은 유지될수도, 변화될 수도 있다.
한 사람의 주체란 그야말로 구조와 실존, '결정론'과 '내재성', 예속화와 주체화의 연속이기에, 결국 그의 자기비평은 사건들의 사이사이를 무한히 미분해 내는 불가능한 과제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이러한 시도가 무의미하지 않음은, 자기비평 역시도 그의 정체성을 새롭게 빚어낼 하나의 '수행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깊이 있게 논하진 않지만, 에리봉은 계급 소속감, 혹은 공동체적 정체성이란 그 집단이 공유하는 수치심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개인 역시 그러하다). 그런 점에서 강한 정치 성향을 보이는 정체성 그룹을 이해할 때, 이들 배경에 있는 사회적 트라우마를 보지 않으면 안된다.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사회적 수치를 경험해본 적 없는 사람이 정치적 지향을 갖기란 불가능하다. 윤리적, 종교적 지향 역시 마찬가지다.
비록 에리봉은 랭스를 떠나옴과 동시에 새로운 장에 정착해 만족스런 삶을 살아간 것으로 보이지만, 그의 좌파 지식인으로서의 삶과, 그가 떠나온 노동계급 사이의 괴리를 말할 때 많은 지점에서 공감이 갔다. 개인적으로 자연과, 사회적 약자를 향한 감수성이 언젠가부터 내게 깊숙히 자리잡았는데 이는 분명 '앞산'으로 대표되는, 어린 시절 내가 자랐던 생활 세계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살아가는 세계는 분명 내가 대변하고자 하는 그곳으로부터 많이 벗어나 있다. 언젠가 도움이 될만한 실력이라도 쌓고자 책을 집어들었는데, 지식과 철학은 이제 내게 또 하나의 문화자본으로서만, 뽐낼만한 것으로만 쌓여가고 있다. 어쩌면 하이데거가 말하는 '고향상실'을 이미 경험하고 있는 중인 지도 모르겠다. 또 어쩌면 스스로 '구별짓기' 해온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부모님이 살아온 세계, 내가 살아온 세계를 그려보며 자연스레 내 다음 세대가 살아갈 세계, 곧 지금 내가 만들어야 할 세계를 생각해 본다. 어떤 지향, 어떤 정체성, 어떤 수치를 세습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