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해 너의 편지를 전해준 아이들의 마음이 나를 며칠 더 살 수 있게 했듯이, 다정한 마음이 몇 번이고 우리를 구원할 테니까." .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하나의 트라우마다. 어려서 사랑하는 언니를 잃은 주인공 해미는 마음 깊숙히 상처를 안고 산다. 그런 해미를 알아보고 밝은 빛을 비춰준 건 일찍이 파독 간호사로 독일에 건너와 터 잡은 이모와, 이모가 소개시켜준 친구 레나와 한수였다.
해미는 곧 한수에게도 아픔이 있음을 알게된다. 그 아픔이란 해미와 유사하지만 또 다른 것이었는데, 바로 한수의 엄마, 선자 이모가 뇌종양으로 투병중이란 사실이었다. 레나와 한수, 그리고 해미는 선자 이모를 위해 남몰래 한 가지 불가능한 계획을 세운다. 이름하여 선자 이모의 첫사랑 찾기 프로젝트. 셋은 수개월 간 치밀하고도 끈질기게 공모하지만 예상치 못한 전개로 끝내 그 일은 실패하고 만다.
세월이 흘러 사십줄에 접어든 해미는 우연히 대학 친구였던 우재를 만난다. 다시 만난 우재는 해미에게 새로운 빛을 비춘다. 우재와 만나며 해미는 잊고 있던 선자 이모와의 일을 기억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오래전 그녀에게 또 다른 트라우마를 안겨줬던 그 일에 혼자 힘으로 다시 도전한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죽음을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라 보았는데, 죽음은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 유일한 사태라는 점에서 불가능성이고, 너무나도 확실하지만 여전히 경험될 수 없기에 가능성이란 말이다. 하이데거에게 인간 존재란 죽음을 향해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죽음 앞에설때야 비로소 그 자신의 가능성, 곧 자기 존재 전체에 대해 감각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 죽음을 새로운 생명력을 주는 사건으로 보는 바울의 신학 역시 분명 교리 이상의 의미가 있다. 책에서 선자 이모는 죽음을 앞두고 내면에 새로운 빛을 경험한다.
죽음의 이러저러한 긍정성에도 불구하고, 죽음이란 반드시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을 낳는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모두 심각한 트라우마를 갖게 될 운명에 처해있다.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을 한번 생각해 보라! 그러므로 죽음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어떻게 다뤄야 하냐는 문제는 정신분석학의 영역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살림살이에 놓이게 된다. 인간 존재란 데리다의 말마따나 애도하는 존재란 말이다 "나는 애도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 책에서 해미와 가족들은 충분히 애도할 시간을 갖지 못해 평생 트라우마를 안고 살게 된다.
임상에서 심리적 트라우마는 내측 전전두엽에서 일어나는 신경 시냅스 손상이라고 보는데 이는 인지과정에서 상호작용에 영향을 미친다. 트라우마를 겪었을 때, 타인과의 관계나 창의성 같은 능력이 심각하게 손상받는 경우를 보면 이해가 가는 설명이다. 늘 벽을 세우고 도망가던 해미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부여한 건 이모와 우재의 섬세하고 끈질긴 관심, 그리고 (내가 보기에) 산책이었다. 끊어진 시냅스 연결은, 반드시 새로운 연결을 통해서만 회복될 수 있다. 연결을 재생시키는 힘이자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능력이기에 어떤 안부는 그 자체로 '눈부시다'.
최근 나오는 한국 소설 특유의 맛과 아쉬움이 모두 실린 책이었다. 무엇보다 인물들이 모두 해미를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아 아쉬웠는데, 어찌보면 그러한 구도야 말로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에 가까운 지도 모르겠다. 모임에서 한 선생님은 '여름이 끝나갈 무렵의 느낌'이 가득한 책이라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