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유정성의 문법은 서로와의 관계를 반영하는 지도 모른다. 어쩌면 유정성의 문법은 세상을 살아가는 전혀 새로운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른 종을 주권자로 대우하고 하나의 독재가 아니라 종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세상, 물과 늑대에게 도덕적 책무를 지는 세상, 다른 종의 처지를 고려하는 법률 체계를 가진 세상 말이다. 그런 세상에서는 모두가 대명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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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을 건너온 이들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숲을 빼앗았고, 이어서 언어를 빼앗았다. 이로써 그들의 세계와 영혼을 정복하였다.
정신분석자 라캉에 의하면 기표와 기의로 이루어진 언어의 세계는 각각 인간의 무의식을 형성한다. 한 인간이 어떤 언어와 문법/질서의 세계에 놓여 있느냐 하는 것은 곧 그가 어떤 정신을 가지고 있느냐는 문제이다. 이 책의 작가 로빈 월 키머러는 발굴을 하듯 몇 안남은 아메리카 토박이 종족의 언어를 배우고 이야기를 익히며 자신의 뿌리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녀는 카누의족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되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보는 법을 배운다.
하이데거는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 말한다. 이때의 언어는 물질/과학문명의 도구로서의 언어나, 측량할 수 있는 단위로서의 언어가 아닌, 시적 언어를 의미한다. 시적언어는 일상 속에 '빠져 있는' 존재자에게 세계의 틀/경계를 해체하고, '본래적 존재'를 열어밝힘으로써 '염려'로 경직된 존재자를 안식하게 하고, 주체성을 돌려준다는 의미이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언어는 그런점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언어, 우리에게 존재의 집이 되어줄 수 있는 언어이다.
키머러에 따르면 오대호 전역의 토착민들은 '하늘여인 이야기'로부터 자신들이 시작되었다고 믿었다고 한다. 하늘여인의 비빌언덕이 되어주기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희생한 사향뒤쥐가 구해온 흙에서부터 대지가 시작되었고, 그녀가 하늘로부터 가져온 선물 꾸러미로부터 온갖 식물의 씨앗이 자라나 자연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런가 하면 오논다가의 한 토착민 학교에서는 지금도 한 주를 시작하고 끝낼 때 '모든 것에 앞서는 말'이라는 감사맹세를 한다고 한다. 자연의 모든 구성원에게 일일히 감사를 건네곤 '이제 우리의 마음은 하나입니다'하고 마무리하는 식이다.
인간은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살아갈 지향성을 발견하고, 반복된 의례를 통해 그 지향성을 스스로에게 체화시킨다. 언어를 빼앗기기 전까지 아메리카 토착민이 보고 살아가던 세계는 오늘 우리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종류일 수 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기후위기의 문명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 이야기 속에 살아가는가? 우리의 자연은 인류가 정복하고 다스릴 자원인가? 아니면 모든 피조물의 구원에 이르도록 청지기로서, 동료 피조물로서 가꾸고 돌보아야할 우리의 세계인가? 또, 우리에게는 세계를 열어밝힐 시적 언어가 남아있는가? 우리의 사유와 말은 무엇을 위함이고 어디를 향해 있는가?
복잡한 철학적 개념 하나 없이, 지루한 인용 하나 없이 따뜻한 언어로 아메리카 원주민의 언어와 세계와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런 책이야 말로 우리를 잃어버린 본향으로 안내할 수 있는, 우리에게 숲을 되찾아 줄 수 있는 지침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