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27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김연수
《그는 자신과 함께 걸어가는 검은 그림자의 친구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껄껄거린다. 여기인가? 아니, 저기. 조금 더. 어디? 저기. 바로 저기.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바로 저기. 문장이 끝나는 곳에서 나타나는 모든 꿈들의 케른, 더이상 이해하지 못할 바가 없는 수정의 니르바나, 이로써 모든 여행이 끝나는 세계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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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초는 고대 인도를 답사하고서 <왕오천축국전>이라는 책에 미지의 나라 소발률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나’는 일부가 소실된 채 전해 내려온 <왕오천축국전>의 내용을 복원하고 주석을 달았다. ‘그’는 여자친구가 마지막으로 빌려 본 그 책을 쓴 ‘나’에게 자신의 소설을 보낸다. 아무런 말 없이 세상을 떠나버린 여자친구를 이해할 수 없어 소설을 썼다는 ‘그’를 ‘나’는 알고 싶다.
1988년, ‘그’는 낭가파르바트 원정대에 지원해 옛 소발률의 산에 오른다. 해발 팔천 미터에 이르러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던 그는 목표한 마지막 날, 극한의 눈보라 속에 자리한 제 4캠프에서 새벽에 홀로 나섰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마지막 등반 일지에 그가 남긴 쓴 문장은 소발률의 나라에 대한 혜초의 기록으로 다음과 같다.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설산은 옛 발률국 왕이 토번으로부터 도망쳐 사라진 곳이자, 혜초가 한 달을 더 가야 도달할 수 있으리라 상상했던 곳이었다. 실재하지만 가보지 못한 곳, 우리의 이해가 도달하지 않는 장소라는 점에서 그곳은 타자의 세계이며, 모든 존재가 하얗게 덮여버린다는 점에서 설산은 공(空)의 세계이다.
바로 그런 상징성 때문에 설산을 오르는 일은 여러가지 표상을 낳는다. 혜초에게는 인식 너머의 세계를 상상하는 일로, 원정대장에게는 미정복 봉우리라는 기표를 욕망하는 일로, ‘나’에게는 말해지지 않은 행간을 추론하는 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는 어땠을까? 알고 싶었을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모든 것을. 죽은 여자친구가 과연 자신을 사랑했을 지, 그가 다시 사랑할 수 있을 지, 죽음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 지 알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밝혀질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이제 하나의 사실이 아니라 사건이 된다.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무의미한 물음이다. 그는 더이상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는 스스로 문장 너머로, 피안으로, 불가능성의 세계로, 그리하여 마침내 소발률에 도달한 것이다. 그는 존재의 벽을, 죽음의 계곡을 뛰어넘었다. 구름이 걷힌다. 그녀가 보인다. 비로소, 그는 이해한다. 고로 존재하지 않는다.
아껴왔던 보람이 있다. 최고의 중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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